육체적 '일리'가
정신적 ‘편리’함을 이긴다

AI에게 길들여진 사람들이 싫어하는 형용사 목록

육체적 '일리'가 정신적 ‘편리’함을 이긴다


경험(經驗)을 뜻하는 영어 단어, ‘experience’의 어원은 '위험(危險)으로부터'라는 뜻의 라틴어 ‘expericolo>에서 유래됐다고 한다. 경험이라는 단어의 ’peri‘는 사실 '위험한'을 뜻하는 ’perilous‘와 어원이 같다. 결국 경험은 밖으로부터(ex) 위험(peri)을 겪어나가며 다양한 깨달음을 얻는 경전이나 다름없다. “모험이 부족하면 좋은 어른이 될 수 없다”는 일본 철도(JR: Japan Railroad) 광고 카피처럼 위험한 모험을 통해 경험적 깨달음이 축적되지 않으면 좋은 어른으로 성장할 수 없다. 문제는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고 AI시대가 일상생활로 깊숙이 침범하면서 직접 경험으로 깨우치는 교훈보다 가상경험으로 대체하면서 오감각으로 감지하는 앎은 점차 퇴화되고 있다. 처음 겪지만 경험한 것 같은 느낌을 대자뷰(Déjà vu)라고 하고, 이미 알고 있거나 경험한 것을 마치 처음처럼 낯설고 생소하게 느끼는 현상을 부자데(Vuja de)라고 한다. 최근 《경험의 멸종》이라는 책에 새로운 개념이 등장했다. 현실에서 한 번도 경험한 적이 없는 걸 가상으로 경험하는 걸 베자듀(Veja du)라고 한다. 가상으로 디지털 세계에서 경험하며 접속하는 기회는 많아지고 직접 경험하며 접촉하는 기회는 줄어들거나 아예 실종되면서 감각적 촉으로 더욱 무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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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것의 잡다한 경험이 작가를 키운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육체적으로 마주치며 판단하고 행동하는 놀이도 위험하다는 학부모의 보호막으로 차단되고 있다. “놀이는 불안에 맞서는 백신”이라고 《불안 세대》를 쓰는 조너선 하이트가 주장한다. 그런데 아이들을 비롯해 대부분의 사람은 이제 직접 겪어보며 감각적 데이터를 축적하지 않는다. 내가 겪어본 경험적 깊이와 넓이가 얇아지고 좁혀질수록 세상을 직감적으로 판단하고 결단할 수 있는 능력도 현격하게 줄어든다. 내가 겪어본 경험의 깊이와 넓이만큼 읽을 수 있고 쓸 수 있으며 세상을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다. 직간접적인 경험과 깨우침의 얼룩과 흔적이 교양의 두께로 쌓이면서 그만큼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주장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이해하며 주체적인 사유를 할 수 있다. 궁금하면 몸을 던져 물음표(?)의 근원지를 찾아가지 않고 AI에게 바로 물어보는 순간 감동의 느낌표(!)를 선물로 주지 않고 삶의 종지부를 찍는 마침표(.)를 빛의 속도로 찍어준다. 육화 된 앎은 실종되고 다른 사람의 정보로 주워모는 앎의 파편만 늘어간다.


포경선 선원이었던 허먼 멜빌이 소설 《모비딕》을 쓰고, 보험국 관리자였던 프란츠 카프카가 《변신》과 《성(城)》을 썼던 것도 힘든 노동 경험 덕분이다. 세관원이었던 미국의 너 대니얼 호손이 《주홍글씨》를 쓰고, 공장 노동자였던 영국의 찰스 디킨스가 《올리버 트위스트》라는 역작을 쓴 비결도 잡다한 노동 경험 덕분이다. “잡것들이 너나 할 것이 책을 내려고 한다.” 로마시대 키케로 남긴 말이지만 잡것들이야말로 위대한 고전이나 명작을 쓸 수 있는 작가들이다. 잡것들이 아니고서야 누가 책을 내는 작가가 될 수 있을까. 작가의 상상력의 텃밭은 육체노동으로 몸에 각인되는 경험이다. ‘상’으로 끝나는 말, 예를 들면 공상(空想)이나 허상(虛想), 망상(妄想)이나 몽상(夢想)에는 힘력(力) 자가 붙어 있지 않지만 상상력(想像力)에만 힘력(力) 자가 붙어 있다. 상상력은 앉아서 생각한다고 생기지 않고 구체적인 현장에서 타자의 입장이 되어 겸손한 다정함으로 다가가 깊은 관심과 애정으로 보듬어주지 않으면 생기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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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고된 노동 경험을 언어로 벼려서 작가가 된 ‘잡사’가 자기 신념을 숨기고 가급적 다른 권위자의 주장에 담긴 관념의 파편을 책상에서 조립해서 배우는 학사와 석사와 박사보다 현실적 설득력과 논리적 호소력이 높다. 넘어지고 자빠지며 부딪쳐본 경험, 현실과 마찰을 일으키며 갈등 상황에서 절치부심했던 고뇌의 순간을 통과해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삶의 깊이감에 체중으로 전달되는 통찰력이 생기지 않는다. 낯선 경험(감각)도 하지 않고, 책(지각)도 읽지 않은 채 영상과 이미지에 중독되면, 아이만도 못한 ‘어른 아이’가 되어 AI(에이 아이)에게 농락당할 수 있다. “당신이 무엇을 먹었는지 말해 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려주겠다.” 프랑스의 법학자이자 미식가였던 장 앙텔므 브리야 사바랭의 말이다. 이걸 한 사람이 겪은 고난이나 고생을 통해 느끼는 고통에 대입해도 일맥상통한다. “당신이 겪은 고난이나 역경을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말해주겠다.” 고통을 겪어보지 않으면 세상을 알 수 없고 살아가는 진정한 의미도 이해할 수 없다. 몸속에 각인된 고통의 흔적과 얼룩이 삶의 무늬로 번역될 때 사람이 살아가는 의미를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넘어지고 자빠지는 가운데 사람은 어제와 다른 실패를 통해 색다른 실력을 쌓아나간다. 행복도 추상명사가 아니라 동사다. 행복한 기분이 들 때는 여지없이 일상의 신비로운 경험 속에서 일깨워진다. 살아있다는 느낌, 나의 존재 의미가 빛난다는 느낌, 깊은 감동이 뼛속 깊이 사무치면서 전율감이 느껴지는 순간, 사람은 행복한 기분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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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감한’ 결단과 ‘두려운’ 도전이 심장을 뛰게 한다


주방보조에서 한국인 최초로 미슐랭 3 스타가 된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베누 총지배인이자 경영자가 된 이동민 셰프의 경쟁력은 AI가 대체할 수 없는 고유한 경쟁력을 지니고 있다. 그는 처음부터 자기 이름을 걸고 전 세계 그 어느 곳에서도 맛볼 수 없는 대체 불가능한 요리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권민 편집장의 《엔텔러키브랜드-1인 기업가의 휴먼브랜드》에서 강조하는 세 가지 질문에 비추어 대체 불가능한 원본 셰프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했다. 첫째, 나만 할 수 있는가? 대체 불가능한 고유함의 문제다. 그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나만의 고유한 정체성을 드러내는 요리를 만들기 시작했다. 둘째, 나만이 보이는가? 통찰의 문제다. 음식점에 들어서면 주방의 전체 장면에 한눈에 들어오는 시야가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는 걸 본다. 고객의 요구를 넘어 말하지 않는 욕구를 포착한다. 셋째, 나만 즐거운가? 꿈꾸는 일 앞에 ‘가난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여도 여전히 심장이 뛰는가? 가난한 요리사여도 심장이 뛰는 일을 해야 누가 뭐래도 즐겁고 신나는 일로 자기만의 브랜드를 만들 수 있다.


이동민 셰프는 AI도 흉내내기 어려운 5가지 형용사로 자신의 지속적으로 단련하고 수행의 길을 묵묵히 그리고 꾸준히 걸어가고 있다. 첫째, ‘불편한’ 문제의식이다. 지금의 요리 수준이나 상태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불편한 문제의식이 세상에서 처음 맛보는 요리를 창조하는 길로 안내해 준다. 당연함에도 질문을 던지지만 편안함에 머무르려는 관성과 타성에도 질문을 던져 늘 자신을 문제의식으로 무장한다. 둘째, ‘과감한’ 결단의 칼을 뽑는다. 치밀한 숙고를 하지만 오래 하지 않고 과감하게 결단을 내리고 결연한 자세로 자신의 길을 걸어간다. 과감한 결단 없이 습관적인 요리 관행을 파괴하고 새로운 길로 접어들 수 있다. 셋째, ‘두려운’ 도전을 감행한다. 심장이 뛰는 일이거나 시작하기 전에 설레는 일이 어느덧 밋밋해지고 동일함이 반복될 때 일상의 신비를 습관의 덫에 걸린다. 미지의 세계로 몸을 던지는 도전은 언제나 두렵다. 두려운 도전을 멈추는 순간 성장과 발전도 멈춘다. 넷째, ‘위험한’ 실험을 반복한다. 실험하는 경험도 일종의 위험한 모험이다. 위험한 실험을 어제와 다르게 시도하지 않으면 새로운 요리가 창조되지 않는다. 리스크를 짊어지지 않고 평온한 호숫가에서 노를 젓는 배만 타서는 험난한 파도가 몰아치는 바다에 나가기 어렵다. 마지막으로 ‘색다른’ 반복이다. ‘위험한’ 실험을 반복하되 어제와 다른 ‘과감한’ 도전이라야 다름과 차이가 나온다. 동일성을 반복하면 지루하지만 다름과 차이를 반복하면 반전이 일어난다. 경지에 이르는 지름길은 없다. 마스터리에 이르는 길은 모두 미스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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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민 셰프는 ‘불편한’ 문제의식, ‘과감한’ 결단, ‘두려운’ 도전을 감행한다. 심장이 뛰는 일이거나 시작하기 전에 설레는 일이 어느덧 밋밋해지고 동일함이 반복될 때 일상의 신비를 습관의 덫에 걸린다. 미지의 세계로 몸을 던지는 도전은 언제나 두렵다. 두려운 도전을 멈추는 순간 성장과 발전도 멈춘다. ‘위험한’ 실험, ‘색다른’ 반복을 통해 혀끝에서 펼쳐지는 맛의 우주를 선보였고, 오감을 자극하는 미각의 향연을 펼쳐 보였으며,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로 다가오는 미식의 지문을 각인시켜 주었다. 이 모든 것의 이면에는 책으로 학교에서 이론을 배우지 않고 현실에서 고객을 대상으로 실전을 통해 요리의 진면목을 몸으로 익혔다. 마스터리에 이른 거장이나 대가들의 노하우는 책으로 배울 수 없다. 학교로 가는 길보다 살아 숨 쉬는 현장으로 내려가 몸을 던져 매사를 경험적 감각으로 깨우치며 형언할 수 없는 요리의 정수와 핵심을 육화(肉化)시켰다. 고통스러운 과정을 몸소 겪어낼 때마다 직업정신이 몸에 아로새겨지며 반드시 정상에 이르고야 말겠다는 열망과 의욕을 불태우며 철저한 자기 관리를 통해 마침내 한국인 최초로 미슐랭 3 스타에 오르는 경이로운 신화를 창조했다. 요리는 ‘요리조리’의 산물이 아니라 ‘이리저리’의 부산물임을 몸소 증명한 이동민 셰프는 이름만으로 이제 휴먼 브랜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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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은 새로움의 산파다


“본질적인 것은 아픔 속에서 태어난다. 아픔은 또한 새로움의 산파다. 아픔이 없으면, 우리는 같음의 지옥에 갇힌다”(127쪽). 한병철의 《신에 관하여》에 나오는 말이다. 존재는 아픔을 견디며 고통을 감내하는 가운데 자기 본질을 찾아간다. 앎도 상처가 만든 얼룩 속에서 피는 무늬다. 깊이 깨닫는 앎은 통념이 깨지는 아픔 속에서 태어나지만 상처받기도 전에 편안한 앎을 아무런 불편함 없이 즉각적으로 밖에서 충족한다. 그 밖이 이제 대부분 AI가 제공하는 사유의 진원지다. 내 생각의 근원을 밖에서 찾는 아웃소싱(outsourcing)이 가속화될수록 주체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기반은 뿌리째 흔들리며 인간은 아웃(out)당하고 있다. 이제 인간은 생각의 주도권을 AI에 넘겨주고 인지파산 상태에 직면해 있다. 위험한 경험을 하기 전에 해야 될지 말아야 될지를 판단조차 AI에게 맡긴다. 편안한 앎을 깊은 고뇌 없이 뇌리에 심을수록 뇌세포는 점차 굳어져 타성에 젖어간다. 낯선 지적 자극을 받아야 이전과 다른 방식으로 뇌를 사용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어지고 있다. 사람이 AI를 사용하면서 점차 싫어하는 형용사가 등장하고 있다. ‘예측불가능한’ 경계를 넘어서려는 모험심은 물론 ‘불확실한’ 상황에 몸을 던지는 ‘두려운’ 결단은 이제 소수 몇몇 탐험가나 할 수 있는 희귀한 능력으로 간주되고 있다.


AI에 종속되어 인지 주권을 박탈당한 사람들이 싫어하는 형용사들이 AI 앞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지루한’ 순간을 한 순간도 참지 못한다. 순간적 접속 후에 빛의 속도로 안겨주는 노골적인 정보와 이미지에 이미 뇌는 해석능력을 잃어버렸다. ‘따분한’ 시간은 게으른 자의 일거리 없음을 의미한다. 현대인은 따분할 시간은 없고 분노와 적개심으로 피는 언제나 끓고 있다. ‘괴로운’ 순간이 밀려오기 전에 외면하고 ‘외로운’ 시간을 보낼 수 없어서 세상과의 직접 접촉보다 가상 경험으로 접속하는 시간을 보낸다. 물리적으로 ‘힘든’ 노동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어려운’ 고뇌애 찬 결단은 너무 ‘불편한’ 일이 되어버렸다. ‘불확실한’ 도전은 언제나 ‘위험한’ 일이기도 하고 ‘두려운’ 프로젝트이기에 이제 옛날이야기가 되어 버렸기에 편안한 길을 선택했지만 마음은 언제나 ‘불안한’ 순간의 엄습으로 좌불안석이다. 서두름에 종속된 머뭇거림은 무능력자의 소치로 전락했다. 하염없이 머무르기는 이제 불가능해졌다. 서성거리는 망설임은 망한 자의 패배 요인으로 둔갑했다. 하지만 경이로운 신비와 기적은 소요보다 고요, 편안함보다 불편함 속에서 ‘불확실한’ 미래를 끌어당겨 ‘과감한’ 결단을 내리고 ‘위험한’ 도전을 감행하는 사람에게 가지 않은 길을 내준다. 때로는 한 없이 외로운 가운데 베일 속에 가려진 의미의 실체를 밝혀내가 위해 하염없이 머무르며 골똘히 고민할 때 안갯속에 숨은 태양이 번쩍이는 광채를 안고 문명을 밝히는 등불로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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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깨닫는 에피파니, 우연히 만나는 세렌디피티


갑작스럽고 현저한 깨달음, 직관, 혹은 영감을 에피파니(epiphany)라고 한다. 기독교에서는 예수의 현현을 축하하는 주현절(主顯節)을 뜻하기도 하고, 문학이나 영화에서는 인물의 극적인 자각의 순간을 묘사하는 용어로도 사용한다. 뉴턴이 만유인력 법칙을 발견하는 순간이나 아르미데스가 부력의 원리를 깨닫는 순간도 에피파니다. 에피파니(epiphany)는 갑작스럽고 현저한 깨달음이나 통찰을 의미하는 반면, 세렌디피티(serendipity)는 우연히 찾아온 행운으로 예상치 못한 발견을 하는 것을 뜻한다. 에피파니는 내면적 ‘아하!’하는 순간의 깨달음이고, 세렌디피티는 외부적 사건을 통해 얻는 ‘뜻밖의 발견’으로, 준비된 자세로 우연을 기회로 만드는 데 중점을 둔다.


에피파니가 내면의 등대라면, 세렌디피티는 우연히 손에 들어온 보물지도 같다. 에피파니는 네 마음 깊은 바다를 비추는 한 줄기 등대 불빛처럼, 답답하고 막막한 순간에 외부의 힘이 아닌 스스로의 내면에서 번쩍—‘이거였어!’ 하는 깨달음을 맞이하는 시간이다. 깜깜한 방 안에 갑자기 불이 켜지듯, 그 빛에 이끌려 길을 찾아내는 예기치 않은 영감이기도 하고. 반면 세렌디피티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길을 걷다가 우연히 낡은 보물지도를 발밑에서 주워드는 순간과 비슷하다. 난 보물을 찾겠다고 애쓰지는 않았지만, 그냥 마음을 열고 세상을 살아가던 어느 날, 뜻밖의 행운이 문득 찾아와 새로운 길이 열리는 경험, 그런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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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에피파니가 엉킨 실타래의 매듭을 풀어내는 일이라면, 세렌디피티는 엉뚱한 장소에서 대어를 낚아 올리는 듯한 우연한 행운에 가깝다. 실마리를 못 찾아 한참을 헤매다가 ‘아하, 이렇게 푸는 거였네!’ 하고 갑자기 답이 터지는 경험—스스로 복잡한 문제의 해답을 찾아내 희열에 벅차오르는 그 순간이 바로 에피파니다. 반면 세렌디피티는 본래 평범한 물고기나 잡으려고 드리운 낚싯줄에, 느닷없이 황금빛 대어가 걸려드는 어처구니없는 놀라움 쪽이 더 가깝다. 계획하지도,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냥 이대로 해보자’ 하는 태도가 뜻밖의 커다란 행운을 불러오는 법이지.


에피파니를 짙은 안개가 걷힌 산 정상에 비유한다면, 세렌디피티는 예상치 못한 꽃밭과의 만남이다. 오랜 시간 안개에 가려 무거웠던 마음이 어느 순간 싹 걷히고, 드디어 맑게 드러나는 광활한 풍경—그 앞에서 숨이 멎은 듯한 감동, 바로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는 경험이 에피파니다. 반면 세렌디피티란 하이킹 중 길을 잃은 줄 알았던 어느 지점에서, 무심코 방향을 트는 바람에 그곳에 숨어 있던 상상조차 못 한 비밀의 꽃밭을 발견하는 기쁨일 것이다. 원래 의도한 길이 아니었음에도, 엉뚱한 곳에서 더 크고 새로운 행복이 펼쳐지는—인생이 주는 뜻밖의 선물과도 같은 순간 말이다.


의도적으로 노력해서 만나는 영감인 에피파니든, 우연한 마주침으로 얻는 행운의 영감인 세렌디피티든 고뇌하는 화두를 붙잡고 어제와 다른 방식으로 치열하게 노력하다 만나는 선물 같은 깨달음의 순간이다.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고 어떤 노력도 하지 않은 상태로 무위도식하는 사람에게는 에피파니도 세렌디피티도 오지 않는다. 머리를 싸매고 해결하려는 난감한 문제와 곤란한 화두를 붙잡고 이런저런 시도와 실험 도중에 잠시 부담을 내려놓고 한 눈 파는 사이에 뜻밖의 아이디어가 갑자기 찾아드는 경우가 생긴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불현듯 다가오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우발적 마주침으로 깨우침이 생기기도 한다. 궁금한 게 생기면 무조 간 AI에게 물어보는 사람에게 에피파니도 세렌디피티도 절대로 찾아오지 않는다. 한 가지 화두를 붙잡고 사유의 육박전을 치르는 와중에 에피파니를 시행착오 끝에 만날 수도 있고 우연한 기회에 세렌디피티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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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한 계획과 대단한 다짐보다 과감한 실천과 색다른 시행착오가 필요하다


새해에는 다리가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한계에 도전도 해보고, 두려운 일에도 겁에 질리지 않을 정도로 시도해 보는 시험을 해보는 가운데 긴장감을 생동감으로 바꾸는 자기만의 노하우를 개발하자. 완벽한 계획을 세우고 뜨거운 다짐과 대단한 결심을 할 시간에 작은 실천이지만 어제와 다른 낯선 상황에 나를 노출시켜 당황하는 순간도 만들어보자. 새해에는 철저한 준비와 적극적 검토로 장시간의 숙고 끝에 악수(惡手)를 두는 상황을 초래하기보다 과감한 실천과 색다른 시행착오로 판단착오를 줄이는 경험적 깨달음을 내 삶의 스승으로 모시자. 정보와 이미지가 주는 흥분의 도가니에서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휩쓸려 떠내려가는 복사본 인생에서 벗어나 내 몸이 겪어낸 경험을 나만의 언어로 벼리고 벼리면서 감각적 데이터를 번역하는 언어의 꾸러미를 늘려나가자. 앉아서 AI에게 딴생각을 물어볼 게 아니라 스스로 딴짓으로 생긴 딴생각을 기반, AI가 당황하는 질문을 설계하고 문제를 일으키는 문제아가 되어보자.


하루가 지루해지고 일상의 신비감이 없어지기 시작하면 하루만이라도 일상을 탈출하고 일탈하는 사건을 일으켜보자. 모든 사유는 사건이 낳은 자식이다. 사건 속에 나타나는 모든 낯선 현상이 기호다. 그 기호는 해석을 기다린다. 기호를 해석하다 보면 사건이 품은 사유가 잉태되기 시작한다.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고 편리함을 추구하며 편안하게 살다가 안락사로 불시에 죽을 수 있다. 죽음으로 향하는 급행열차에서 지금이라도 뛰어내리지 않으면 생각하지 않고 살다가 적시(適時)에 죽지 않고 불시(不時)에 죽는다. 우리가 찾는 진리는 언제나 진저리가 낳은 자식이다. 모든 진리는 불편함을 일용할 양식으로 먹고, 고통스러운 경험을 수시로 먹다가 몸서리나 된서리를 맞고 추운 겨울 동사 당하기 직전에 기사회생해서 탄생한 나력(裸力, Naked Strength)의 산물이다. 존재의 본질은 형용사의 덤불을 벗어버리고 부사의 거품을 걷어내고 벌거벗은 채 혹독한 시련과 역경을 고독하게 버티고 견뎌낸다. 불편함을 감수하지 않고 편리함에 물들수록 불리한 위치로 스스로를 무의식 중에 몰아가는 모르핀을 맞는 것이나 다름없다. 불편하고 낯선 경험으로 생긴 깨달음을 어제와 다른 언어로 번역할 때 언어가 담아내는 의미의 깊이와 넓이만큼 나의 인지체계는 물론 인식의 가능성도 심화되고 확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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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적인 전달에 필요한 세 가지 액체: 눈물과 땀과 피


AI 기술이 아무리 발전해도 나는 내일 밥을 먹어야 하고,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생각하고 매 순간을 내 몸이 움직여 뭔가를 하지 않으면 내 삶은 생존자체가 어려워진다. AI가 나 대신 책을 읽고 읽은 내용을 요약해 주고 내 생각을 글로 써주는 과정을 대신해 줄수록 나는 대체 가능한 AI의 복사본으로 전락할 뿐이다. 아무리 AI기술이 스마트해진다고 해도 내가 주체적으로 읽고 나의 주관으로 재해석하며 나의 생각과 느낌을 언어로 정리하며 글을 쓰고 경험적 깨달음의 정수를 직접 전달하는 노고를 겪어내지 않는다면 나는 AI에게 생각의 주도권을 빼앗긴 채 사고의 식민지로 살아가야 한다. AI는 눈물과 땀과 피를 흘리지 않는다. 가상의 데이터를 조합, 확률적 패턴을 익힌 다음 문장을 생성해서 우리에게 전달한다. AI가 사용하는 언어는 눈물 흘리는 감동적인 경험도 없고 땀 흘리는 고통스러운 노고도 없을 뿐만 아니라 피 튀기는 사투의 흔적도 없다. 눈물과 땀과 피는 인간 존재가 존재다움을 유지하고 증명하는 세 가지 액체다. 세 가지 액체 없이는 나만의 스토리는 직조되지 않으면 서사는 건축되지 않는다. 스토리와 서사는 눈물과 땀과 피가 연주하는 고통스러운 3중주의 향연이다. 육체적으로 깨달은 일리 있는 육중한 깨달음이 정신적으로 배운 관념적 진리를 이긴다.


“나타나엘이여, 그대를 닮은 것 옆에 머물지 말라. 결코 머물지 말라. 나타나엘이여, 주위가 그대와 흡사하게 되면, 또는 그대가 주위를 닮게 되면 거기에는 이미 그대에게 이로울 만한 것이 없다. 그곳을 떠나야만 한다”(53쪽). 앙드레 지드의 《지상의 양식》에 나오는 말이다. AI에게 물어보고 AI가 급조해서 던져주는 답을 먹고사는 인간들의 같음의 지옥에 살아가는 복사본 죄수들이다. 나의 육체적 노동과 정신적 노고로 만들어낸 작품이라야 세상의 복사본을 잠재울 감동적인 내공으로 눈물 흘리게 만들 수 있다. AI가 생성하는 정답을 먹고살며 닳고 닳은 닳인의 언어는 피눈물과 피땀을 씨줄과 날줄로 직조해서 전달하는 달인의 언어와는 무게감이 다르고 심장을 파고드는 전율감이 다르다. 데이터로 말을 배운 인공지능의 언어와는 다르게 삶으로 말을 배우는 사람의 언어는 저마다의 경험의 깊이와 넓이가 스며들어 감당할 수 없는 몸의 언어다. 니체가 말했듯이 단어에는 그 사람의 향기가 배어있다. 냄새가 풍기는 인공지능의 언어와는 다르게 사람의 언어는 경험적 진실함과 진정성이 깊은 잔향으로 남아있다. 참을 수 없는 인식의 가벼움이 느껴지는 인공지능의 언어에 휩쓸려 정보의 바다에서 표류하지 말고 작고 사소한 깨달음이라도 육체적 고통이 동반되는 불편한 마주침으로 깨우침을 얻어가는 2026년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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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에 집중할수록 정신 차리지 못하고 정신이 나간다


정신 문제를 정신없이 해결하려고 할 때 우리는 정신 나간 사람이 된다. 우울한 마음을 부여잡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거듭할 때 우울한 정신은 더욱 정신없이 우울해진다. 괴로운 마음에 사로잡혀 있을 때 정신없이 괴로운 생각에 빠질수록 더욱 정신이 나간 괴로운 사람으로 전락한다. 정신의 문제는 정신으로 절대 해결할 수 없다는 게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주장하는 핵심 메시지 중의 하나다. “정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최초의 것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신체의 관념이기 때문에, 우리 정신의 제일 중요한 노력은 우리 신체의 존재를 긍정하는 것이다”(제3부 정리 10, 증명: 165쪽). 정신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정신이 어떤 관념에 사로잡히는 순간 정신을 멈추고 신체가 정신없이 움직여야 정신 차릴 수 있다. 정신이 나갔을 때나 정신이 없을 때일수록 정신없이 신체를 움직여 땀을 흘리면 맑은 정신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정신의 문제를 정신적으로 해결하려는 사람은 정신 나간 사람이다. 정신의 문제는 오로지 신체가 포착한 관념, 신체에 달라붙은 집착을 떨궈내는 강렬한 신체적 움직임으로 해결될 수 있을 뿐이다.


정신적으로 과도하게 쏠리는 에너지가 강할수록 정신문제는 해결되지 않고 정신없이 살아가며 정신 나간 사람이 된다. 정신 차리는 방법은 정신적으로 찾을 수 없다. 정신적으로 집착이 생길수록 신체를 강렬하게 움직여 다양한 경험에 노출시켜야 한다. 과도한 신체 움직임이 강렬해질수록 거꾸로 정신은 한 없이 맑아지며 제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된다. 스피노자도 《에티카》에 시종일관 주장하는 메시지가 바로 인간의 신체 능력이 커짐에 따라 인간의 정신력도 같이 높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신체에 입력되는 자극의 강도와 빈도는 정확히 정신적 집중력의 깊이와 넓이를 좌우할 수 있다. 더불어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밖으로 부딪치며 겪어내는 신체도 있지만 겪어본 경험의 의미를 반추하고 성찰하며 내면으로 파고들어 사유를 반복하는 고독한 신체도 있어야 비로소 정신 나간 존재는 정신 차린 존재로 거듭난다. 마치 소설가 최인훈이 소설 《광장》에서 비유로 비교한 것처럼 광장에서 야생성을 체득하는 신체와 밀실에서 고독하게 사유하는 신체가 조화와 균형을 이루며 자기만의 신념을 만들어가듯이. 광장의 신체는 부딪치는 신체이고 밀실의 신체는 깨우치는 신체다. 광장에서만 부딪치고 밀실에서 조용히 사색하며 부딪친 경험을 자기만의 언어로 벼리지 않으면 경험은 단속적 체험으로 끊긴다. 부딪치는 광장의 신체가 없는 고독한 밀실의 신체는 우울해지거나 외로움의 덫에 걸려 밀폐된 공간에 갇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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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에 나가야 운명이 바뀐다


“우리는 참 많은 풍문 속에 삽니다. 풍문의 지층은 두껍고 무겁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고 문화라고 부릅니다.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 풍문에 만족하지 않고 현장을 찾아갈 때 우리는 운명을 만납니다. 운명을 만나는 자리를 광장이라고 합니다”(20쪽). 최인훈의 《광장》에 나오는 말이다. AI는 광장에 나가본 경험이 없는 논리기계다. 밀실과 밀실이 연결되는 수평적 공간에서 방대한 데이터를 확률적으로 빠르게 계산할 뿐이다. AI는 풍문을 먹고 산다. 데이터에 따르면 이렇다고 한다더라는 풍문 중에서 가장 많이 들어본 소문만 믿고 패턴을 따라갈 뿐이다. 데이터가 말하는 풍문을 믿고 따라가는 사람은 운명을 바꿀 수 없다. 데이터화되기 이전의 야생의 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데이터 밀실에서 뛰쳐나와 광장으로 나가야 한다. 광장에 가봐야 뼈저린 현실의 목소리를 몸으로 느낄 수 있고 현장의 아우성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 거기서 내 운명을 바꾸는 혁명적인 만남이 일어난다. “몸의 길은 몸이 안다”(43쪽). 밀폐된 공간에서 생각의 꼬리를 물고 늘어질수록 광장의 야생이나 아우성을 왜곡하는 관념의 파편이 조립될 뿐이다. 교육학자가 교육 현장이나 광장에 나가지 않고 현실과 무관한 밀실이나 실험실 또는 밀폐된 연구실에서 생각의 조각을 조립할수록 사유뿐만 아니라 삶은 산산 조각날 뿐이다.


광장의 신체는 마치 한낮의 서울 광장을 닮았다. 누구나 서로를 훤히 바라볼 수 있고, 이곳저곳에서 쏟아지는 외침과 끊임없이 새로이 만들어지는 구호들이 공기를 물들인다. 사람들은 깃발을 흔들고, 플래카드를 높이 들며 말없이도 자기 뜻을 전한다. 이곳에서 내가 누구인가 보다, 무슨 구호를 외치고 어떤 집단과 함께 있는지가 더 큰 의미를 지닌다. SNS 프로필 속의 ‘나’, 팀 프로젝트에 매진하는 회사원의 모습—그런 것들과도 겹쳐진다. 나만의 개성보다는, 사회가 요구하는 역할이나 집단의 목표에 내 행동과 마음을 조율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한데 모여 서로 뒤섞이는 곳이 바로 이 광장이다. 생각과 감정보다는 남들에게 비치는 모습이 더 중요해지고, 때로는 마치 가면을 쓰고 무대 위에 선 배우처럼 스스로를 연기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이곳에서는 나라는 존재의 경계가 드러나고, 서로 다른 가치관이 충돌하고 마찰하며, 다양한 갈등이 얽힌다. 하지만 바로 그 부딪힘의 순간들에서 삶에 대한 통찰, 작고도 강렬한 깨달음이 싹튼다.


그와 반대로, 밀실의 신체는 깊은 밤 자그마한 서재에 앉아 고요히 책 한 권을 펼치고, 사색에 잠기는 몸이다. 창문 밖 도시의 불빛은 아득하기만 하고, 방 안에는 나와 책만이 유일하게 존재한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오롯이 자신의 생각 속으로 천천히 잠겨든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을 일기장 한 귀퉁이에 솔직한 감정을 조심스레 기록하는 나의 내면, 또는 새벽 찬 바람을 마시며 혼자 걷는 산책길에 스며드는 고독한 사유—이런 모든 것들이 밀실의 신체가 품는 풍경이다. 이곳에서는 타인의 시선이나 평가로부터 자유롭지만, 광장에서 묻혀온 경험의 흔적과 얼룩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는다. 내면의 소리에 고요히 귀 기울이면서, 철저히 나 자신과 마주하고, 내 진짜 욕망과 두려움, 그리고 꿈을 하나씩 더듬어가는 존재, 그게 바로 밀실의 신체다. 외부의 모든 소음과 간섭이 멀어지는 이곳에서, 나는 비로소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세상에 흔들리지 않으며 나만의 생각과 감정을 어루만지는 진정한 주체로 존재한다. 이곳 밀실이야말로, 나만의 사색과 자유가 번지는 은밀한 성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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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고 느끼는 대로 산다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개인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의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 나온다. 우리는 분수가 터지고 밝은 햇빛 아래 뭇 꽃이 피고 영웅과 신들의 동상으로 치장된 광장에서 바다처럼 우람한 합창에 한몫 끼기를 원하며 그와 똑같은 진실로 개인의 일기장과 저녁에 벗어놓은 채 새벽에 잊고 간 애인의 장갑이 얹힌 침대에 걸터앉아서 광장을 잊어버릴 수 있는 시간을 원한다”(19쪽). 다시 최인훈의 《광장》의 서문에 나오는 말을 인용하면서 새해에는 광장의 야성과 밀실의 지성이 만나 인공지능을 내 삶의 동반자로 데리고 살아가는 인간지성의 매력이 꽃피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광장의 야성이든 밀실의 이성이든 스피노자의 《에티카》에 따르면 “인간의 신체는 우리가 그것을 느끼는 대로 존재하다”(97쪽). 인간은 생각하는대로 살지 않고 느끼는(감정) 대로 산다. 생각하는 이성은 합리적이고 긍정적인 인간으로 이해하고, 감정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뭔가 비합리적이고 부정적인 속성을 지닌 인간으로 구분하는 로고스 중심의 서구철학에 무의식적으로 지배당해왔다. 하지만 사람은 생각하기 전에 가장 정직하게 느낀다. 느낌이 먼저 오고 생각이 나중에 따라온다.


내가 느끼는 감정만큼 신체가 변하고 신체가 변한만큼 강렬한 기억으로 남는다. 살아오면서 느꼈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강도만큼 내 신체도 감정적인 기억의 얼룩과 무늬로 직조되어 있다.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 대로 생각한다”는 명언을 담긴 프랑스의 폴 브루제도 망언이다. 사람은 생각하는대로 살고 싶을 뿐, 느끼는 대로 살아간다. 신체적으로 느낀만큼 감정적인 관념으로 기억된다. 신체적으로 경험하면서 느낀만큼만 관념적 생각이 생성된다. 사랑을 느끼면 신체에 설렘의 감정이 생기고, 분노나 증오를 느끼면 신체에 떨림의 감정이 생긴다. 사랑인지 증오인지는 이성적으로 알 수 있는 게 아니고 신체의 반응으로 알 수 있다. 밀실에서 너무 오랫동안 생각할수록 생각하는대로 살지 못하고 생각의 꼬리를 물고 늘어지다 불행한 생각에 빠져버릴 수 있다. 명쾌한 생각은 상쾌한 신체적 느낌이 낳은 자식이다. 신체적 느낌은 책상에 앉아서 연구해서 생기지 않는다. 광장으로 뛰쳐 나가 몸으로 부딪혀야 생기는 감정이다. 광장의 신체가 몸으로 느낀 감정을 밀실의 신체는 반추하며 숙고하고 성찰할 때, 흐르는 감정은 확고한 신념으로 자리잡는다. 광장의 야성 없는 밀실의 지성은 지루하고, 밀실의 지성 없는 광장의 야성은 야만으로 흐를 수 있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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