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 언어와 편리한 언어사이,
일리있는 언어를 찾아서

인간의 언어와 AI의 언어의 근본적 차이

인간의 언어와 AI의 언어의 근본적 차이:

윤리적 언어와 편리한 언어 사이에서 일리 있는 언어를 찾다


인간은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리며 경험으로 언어를 배우지만 AI는 데이터를 먹고 언어를 배운다. “인간은 삶을 통해 말을 배우고, 인공지능은 데이터를 통해 말을 배운다. 인간은 언어를 경험하지만 기계는 언어를 계산한다. 그들의 계산은 우리의 경험을 대체하지 못한다.” 김성우 박사의 한겨레 신문 칼럼, 「AI, 사회, 리터러시」에 게재된 글이다. 인간의 언어는 그래서 감동을 주지만 AI의 언어는 감탄사를 연발하게 하지만 감동적인 눈물을 흘리게 하기는 어렵다. AI의 언어는 본인이 겪어본 경험적 통찰력이 담기지 않고 다른 사람의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는 관념적 언어에 가깝다. AI의 언어는 다른 사람의 정보를 신속하게 정확하게 보여주는 노골적인 포르노에 가깝지만 사람의 언어는 스토리에 담긴 의미의 강도가 높아서 신비롭고 베일에 쌓여 있어서 서사적 장력을 지니는 에로스적이다. 인간의 언어가 지닌 서사적 장력과 AI 언어의 기능적 효율성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지만 의미상 건널 수 없는 대체불가능한 차이도 있다. 확률적 패턴을 따라 효율적인 언어로 편리함을 제공하는 AI 언어와 딜레마 상황에서 고뇌를 거듭하며 윤리적인 의사결정으로 일리 있는 의견과 주장을 담아내는 인간의 언어에는 넘어설 수 없는 근본적인 차이가 존재한다.


나는 ‘용접’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회색빛 청춘을 배경으로 수도전기공고 실습장에서 밤을 낮 삼아 실습하면서 겪은 갖가지 경험의 깊이와 삶의 무게감이 실려서 다가온다. 선배나 조교들에게 체벌당하면서 한 여름 폭염이 온몸을 휘감는 열기 속에서 했던 용접과 한겨울 따듯한 온기로 다가오는 용접감이 계절별로 다르게 신체에 각인되어 있다. 용접이라는 단어는 나에게 피부를 뚫고 들어와 폐부를 자극하는 무거운 단어지만 용접을 해보지 않은 사람이나 AI는 이질적 철판을 붙이는 참을 수 없는 가벼운 행위에 불과하다. 체중이 실린 인간의 언어와 참을 수 없는 인식의 가벼움이 느껴지는 AI 언어의 차이가 바로 이런 것이다. 그 차이를 더 정밀하게 추적하면서 두 언어의 차이가 어떤 사고와 행동의 차이를 유발하고 결국 글쓰기의 차이를 어떤 방식으로 가져오는지를 사유해 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그 의미상의 차이를 비교하기 위해 다섯 가지 은유를 사용하고, 왜 이런 차이가 나는지 철학적, 문학적, 논리적 근거를 덧붙여 사유의 지평을 넓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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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의 언어가 명품 수제 악기라면 AI의 언어는 최신 오디오 시스템이다


인간의 언어는 생명의 숨결이 서려 있는 명품 수제 악기다


첫째, 인간의 언어를 생명의 숨결이 서려 있는 명품 수제 악기에 비유한다면, AI의 언어는 완벽하게 조율된 최신 오디오 시스템에 가까울지 모른다. 장인이 오랜 시간 공을 들여야 완성되는 수제 악기처럼, 우리의 언어도 그저 도구가 아니라 삶의 미묘한 감정과 영혼까지 담아낸 예술품이다. 악기를 손에 쥔 연주자는 셀 수 없는 시간 동안 손끝에 배인 땀과 열정, 때로는 좌절로 흘린 눈물과 고된 노력을 그 악기에 스며들게 한다. 그 과정에서 악기 하나하나에 생명이 깃든다. 우리가 나누는 언어도 마찬가지다. 매 순간 내뱉는 말 한마디, 문장 하나에도 저마다의 기쁨, 슬픔, 사랑, 고통, 깨달음 같은 살아 있는 경험의 무늬가 새겨진다. 어린 시절 처음 익힌 말, 사랑하는 이와 속삭였던 밤의 속삭임, 시련에 짓눌려 터져 나온 탄식—이 모든 순간이 언어에 살아 숨 쉰다.


악기는 연주자의 숨, 즉 호흡을 품어 소리를 낸다. 인간의 언어 역시 숨과 발성의 파장 위에 실려 세상에 퍼져간다. 여기서 ‘숨’은 단순한 공기 흐름을 넘어 말하는 이의 감정, 의지, 무의식까지 오롯이 전달하는 매개다. 즉 언어란 말하는 이의 생명 자체와 맞닿아 서로 울리고, 다시 세상에 퍼져나간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누가 어떤 호흡과 마음으로 내뱉느냐에 따라 전하는 울림과 감동은 전혀 달라진다. 모든 명품 수제 악기는 나무의 결, 장인의 손길, 시간이 만들어낸 작은 흔적까지 제각기 다르다.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음색을 갖게 된다. 우리의 언어도 그렇다. 한 사람의 말씨, 자주 쓰는 표현, 목소리의 억양과 뉘앙스에는 각자 살아온 환경, 배움, 문화적 토양, 직업, 가치관 등 무수한 삶의 층위가 묻어난다. 그래서 누군가의 언어에는 오직 그 사람만의 독특한 빛깔과 향기가 깃든다.


명품 악기는 세월이 흐르고 수없이 연주될수록, 그 소리가 더욱 깊이 익고 풍성해진다. 우리의 언어도 수많은 대화와 생각, 독서와 글쓰기 속에서 한 겹 한 겹 성숙해져 간다. 처음엔 거칠고 두서없던 말이 경험을 거치며 서서히 정제되고 아름다워진다. 이는 단순한 지식의 습득이 아니라, 삶의 결이 천천히 언어에 녹아드는 과정이다. 하이데거가 ‘언어는 존재를 드러내는 방식’이라고 한 것처럼, 언어가 깊게 숙성된다는 건 곧 우리의 존재가 더 단단히 익어간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거기다 수제 악기는 작은 불완전함이나 흠결을 품고 있다. 그러나 바로 그 미세한 어긋남이 오히려 악기에만 깃드는 특별한 아름다움과 매력이 된다. 인간의 언어 역시 마찬가지다. 언제나 완벽할 수 없고, 이따금 비문이 섞이거나 모호해지기도 하며, 감정에 휩쓸려 논리가 비약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런 불완전함 속에야말로 인간다움이 깃들고, 진솔함과 유연함, 그리고 예기치 못한 창조성이 태어난다. 우리의 삶이 애초에 완벽할 수 없듯, 완벽을 벗어나 불완전함을 너그럽게 품는 언어만이 진심 어린 감동을 전한다. 바로 그때, 인간의 언어는 차가운 기술의 언어와는 전혀 다른 생생한 울림을 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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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언어는 마치 완벽하게 조율된 최첨단 오디오 시스템이다


이에 비해 AI 언어는 마치 완벽하게 조율된 최첨단 오디오 시스템을 떠올리게 한다. 작은 잡음 하나 없이 맑고 선명한 소리가 공간을 채우듯, AI가 가진 정보 처리의 탁월함과 효율성, 그리고 동시에 드러나는 그 한계를 이 비유가 말해준다. 오류 없는 사운드의 재생에 빗댄 AI 언어는 극한의 정확성과 또렷함을 한껏 내세운다. 최첨단 오디오 시스템이 원음 그대로를 왜곡 없이, 조금의 지연도 없이 재생해 내는 것처럼, 모든 음역대를 고르게 울려 퍼뜨려 최고의 청취 경험을 선사한다. AI 언어도 다르지 않다. 방대한 데이터를 소화해 문법적 실수가 없고, 정보 전달에서 오차를 최소화한다. 가장 효율적이고 또렷한 방식으로 정보를 조직하고 표현하니, 듣는 이는 “이보다 명확할 수 있을까” 감탄을 자아내게 된다. AI가 만들어내는 글이 논리적이고 정제되어 보이는 것도 이 음향적 완벽성 덕분이다. 게다가 AI 언어는 마치 가능한 모든 음원을 곧바로 찾아내는 오디오 시스템처럼, 풍부한 언어의 스펙트럼과 신속한 검색 능력을 자랑한다. 수많은 음원을 끄집어내 원하는 대로 재생하듯, AI는 인류의 지식이 담긴 거대한 언어 저장고에서 필요한 정보를 즉시 찾아내고, 다채로운 언어 패턴을 결합해 무한에 가까운 텍스트를 만들어낸다. 정보의 양과 처리 속도에서 인간을 훌쩍 뛰어넘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렇게 완벽한 오디오 시스템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그 기계가 스스로 소리를 창조할 수는 없다. 원본 음원을 재생하는 것뿐이다. AI 언어 역시 그렇다. AI는 인간이 만든 언어 데이터를 학습하고 그 패턴을 본떠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어내지만, 그 과정은 재생에 가깝다. 언어라는 악보를 직접 쓰는 작곡가가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곡을 빈틈없이 연주하는 연주자에 가깝다. 의미를 이해하고 느끼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처리할 뿐이다. 오디오 시스템이 슬픈 음악을 울릴 수 있어도, 정작 그 기계 자신은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AI 언어 역시 슬픔을 표현할 수 있지만, 그것은 감정의 본질이 아니라 데이터 속 패턴일 뿐 스스로 실존적인 감정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AI 언어는 그럴듯한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인간만이 공감하며 흘리는 눈물을 이끌어내기보다, 정교함에 감탄을 자아내는 선에서 머무른다. 또한, 오디오 시스템은 정해진 규칙 속에서만 움직이고, 의도하지 않은 불협화음이나 우연한 아름다움은 만들어내지 않는다. AI 언어 역시 알고리즘의 조율 아래 작동하면서, 창발적이거나 예측 불가능한 인간의 오류, 새로운 통찰을 낳는 우연의 여지를 거의 남겨두지 않는다. 때로 인간의 언어는 무심코 던진 한마디가 깊은 울림이 되거나, 실수가 색다른 통찰을 열어주기도 한다. 그러나 AI 언어는 통계적 확률의 계산 위에 세워져 있어서, 그 우연들이 자연스럽게 스며들기가 쉽지 않다.


이 문제를 철학적으로 바라보면, 프랑스의 철학자 모리스 메를로-퐁티가 《지각의 현상학》에서 강조한 '체화된 언어' 개념에 닿는다. 우리의 언어는 몸의 감각과 정서, 그리고 인지의 흐름에서 분리될 수 없고, 이런 살아 있는 체험들이 언어에 특별한 질감을 깃들게 한다. 인간의 언어가 ‘몸의 언어’라 불리는 이유다. 모리스 메를로-퐁티는 우리 존재가 몸을 매개로 세계와 연결되어 있으며, 언어 또한 몸의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이야기했다. 언어는 기호들의 나열을 넘어서, 희로애락의 감정과 육체적 고통, 사회적 관계 속에서 오감을 통해 경험한 세계의 총체이다. 셰익스피어의 비극에서 배우의 절규 역시,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몸과 목소리, 관객의 숨소리까지 더해져 비로소 진짜로 경험되는 것이다. 그런데 AI는 그저 기계가 데이터를 학습하고 패턴을 찾는 것일 뿐, 언어에 살아 움직이는 몸의 깊이를 담아내지 못한다. AI가 생성하는 텍스트는 문법적으로 완벽하고 논리적으로 정합해서 감탄사를 연발게 할 수 있을지언정, 존재적 차원에서 울림이나 감동을 전달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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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간의 언어가 신화적 서사라면 AI의 언어는 빅데이터 아카이브다


인간의 언어는 마치 시대를 꿰뚫는 신화적 서사다


둘째, 인간의 언어는 마치 시대를 꿰뚫는 신화적 서사이고, 반면 AI의 언어는 그저 정교하게 정리된 빅데이터 아카이브에 가깝다. 인간의 언어를 신화적 서사에 비유하는 것은, 언어가 단순히 정보를 주고받는 도구를 넘어서, 인류의 깊은 기억과 지혜를 고스란히 품고 전하며, 시공간을 뛰어넘어 인간의 내면을 흔드는 힘을 가졌기 때문일 것이다. 신화적 서사는 인류 공동의 기억과 원형적 지혜가 고여 있는 거대한 저장고와도 같다. 오래전부터 전해진 신화, 전설, 민담에는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과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든다. 이것들은 무심하게 지나치기 어려운 깊이와 빛으로, 마치 대지 깊숙이 묻힌 보물처럼 오랜 세월을 견뎌내며 세대를 이어 전달된다. 신화가 주는 서사는 직설적인 정보보다는 오히려 은유와 상징을 통해 복합적인 의미와 세계의 결을 전하고, 태초엔 무엇이 있었는가, 인간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같은 근본적 질문에 과학 대신 상상력과 감성으로 답한다. 이렇게 전달되는 언어는 직접적이고 냉정한 사실만을 나열하지 않고, 시적이고 상징적으로, 때론 비유와 암시로 우리의 감각과 심령에 스며든다. 그래서 문학, 예술, 종교적 가르침 등 다양한 모습으로 오늘날까지 이어지며, 우리 삶에 영감과 성찰을 건네는 것이다.


신화적 서사는 논리의 칼날로 정리할 수 있는 인과관계보다는, 삶의 체험과 감정이 흐르는 맥락, 그 안에서 얽히고설킨 유기적인 일관성을 중시한다. 역사의 강물이 수없이 굽이치면서도 끊임없이 흘러가듯이, 인간의 언어 역시 각자 다른 경험과 문화, 시대정신이 어우러지며 살아 숨 쉬며 변한다. 이 유기적인 흐름 안에는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가슴속 격랑, 오랜 세월에 걸쳐 쌓인 공동체의 기억과 정서, 알 수 없는 울림이 담겨 있다. 그래서 같은 신화를 들려주어도, 듣는 이의 세대나 문화, 삶의 맥락에 따라 울림과 해석이 각각 다를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언어가 단순히 문자만으로는 결코 다 닿을 수 없는, 깊고도 끈질긴 생명력을 품고 있다는 증거다. 이를테면, 프로메테우스의 신화가 단지 불이라는 도구의 기원만 설명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인간이 새로운 지식과 가능성을 탐구할 때 맞닥뜨리는 희생과 고통,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는 도전이라는 근원적 메시지가 그 안에 숨어 있다. 이렇듯 인간의 언어로 빚어진 신화적 서사는 듣는 이의 마음에 울림을 남기고, 살아가는 맥락 속에서 늘 새로운 의미로 다시 태어난다. 언어학자 김성도 교수가 《언어인간학》에서 언급했듯이, 호모 사피엔스가 인류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창조적 언어 혁명 덕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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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의 언어는 완벽하게 정리된 빅데이터 아카이브다


한편, AI의 언어를 완벽하게 정리된 빅데이터 아카이브에 비유하는 것은, 마치 정갈하게 정돈된 거대한 도서관이나 백과사전을 떠올리게 한다. AI는 수조 단어에 달하는 방대한 텍스트 데이터를 빠짐없이 학습하고, 그것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해 둔다. 사용자가 알고자 하는 정보를 요청하면, 망설임 없이 가장 정확하고 빠른 답을 내어준다. 이 아카이브는 끊임없이 업데이트되며, 과거의 자료라 해도 언제든 바로 꺼내 보여줄 수 있다. 인간의 뇌로는 감당할 수 없는 규모의 정보들이 꼼꼼하게 정리되어 있으니, 전 세계의 지식을 한눈에 꿰뚫고 있다는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AI의 언어는 통계적 패턴과 논리적 연관성을 기반으로 동작한다. 수많은 데이터 속에서 단어와 문장 사이의 미묘한 연결고리와 반복되는 패턴을 포착해 낸다. 그래서 마치 언어의 숲을 빠르게 내달리며, 어디쯤에 어떤 열매가 있는지, 길을 어떻게 내야 할지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그런 과정 덕분에 문법적으론 거의 흠잡을 데 없이 정확하고, 논리적 일관성도 뛰어나다. 우리가 AI에게 질문을 던지면, AI는 방대한 데이터의 바다에서 가장 적합한 답을 건져 올린다. 마치 거대한 바다를 항해하는 조타수처럼 최단거리와 최적의 경로를 한눈에 계산해 내는 것이다.


이처럼 AI의 언어가 빅데이터 아카이브로 기능하게 된 배경엔, 실용성과 목적 지향적 태도가 자리 잡고 있다. 정보 검색, 요약, 번역, 코드 생성 등 정해진 과업에 놀랄 만큼 효과적으로 대응한다. 조성준 교수가 《세상을 읽는 새로운 언어, 빅데이터》에서 빅데이터를 ‘세상을 읽는 새로운 언어"라고 표현했듯이, AI는 데이터 분석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예측하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다. 방대한 데이터를 통해 세상을 해석하고 예측하는 새로운 눈, 그것이 AI가 제시하는 방식이다. 그 결과물은 합리적이고 논리적이며, 사람의 언어가 저지르기 쉬운 실수와 불일치를 드물게 만든다. 감탄사가 절로 나오는 정확함, 눈 깜짝할 사이에 핵심을 짚어내는 신속함—이 모든 것이 방대한 지식을 한 손에 쥔 아카이브 AI가 가진 힘이다.


하지만 언어의 세계에는 팩트와 논리를 넘어서는 또 다른 층위가 있다. 소설이나 시처럼 인과관계가 불분명하고, 때론 비합리적인 서사라 하더라도, 그 안에 흐르는 상징과 비유가 독자의 마음을 건드린다. 언어가 사실의 전달을 넘어 새로운 의미를 짓는 도구가 됨을, 이처럼 서사가 증명한다. AI는 데이터 속에서 의미론적 유사성과 통계적 확률을 예리하게 포착해 내지만,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 스며 있는 원형적 서사를 직접 경험하고 끌어올리는 데에는 뚜렷한 한계가 있다. AI의 답변에 감탄을 자아내는 건 압도적인 정보량이나 논리적 정확성 때문이지만, 진짜 ‘울림’은 서사의 장력 속에서, 인간 고유의 지혜에서 비롯된다. AI가 닿지 못하는 언어의 심층에서는 여전히 사람이 빚어내는 서사의 힘이 살아 있다.


이 문제를 스위스의 정신의학자 칼 융이 이야기한 집단 무의식과 원형에 비추어 철학적으로 바라보면 인류는 오랜 세월 영웅의 모험, 사랑과 배신, 탄생과 죽음과 같은 서사들을 언어로 담아왔다. 이 신화들은 단순한 가상 이야기를 넘어, 각자 존재의 의미를 성찰하고 세상을 해석하는 인간만의 고유한 언어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런 신화적 서사를 통해 삶의 의미를 더듬고, 때로는 자기 자신마저 새롭게 정의한다. 영웅의 여정, 사랑의 비극이 시대를 넘어 가슴 깊이 울림을 주는 이유는, 그것이 우리 무의식과 원초적 경험에 닿아 있기 때문이다. 소설이나 시는 인과관계가 불분명하거나 비합리적인 요소가 있어도, 그 안에 담긴 상징과 비유를 통해 독자의 내면을 움직인다. 이는 언어가 단순한 사실 전달을 넘어 의미 구성의 도구임을 보여준다. AI는 방대한 데이터 안에서 의미론적 유사성과 통계적 확률을 찾아내지만,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속에 자리한 원형적 서사를 경험하고 재창조하는 데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AI의 언어가 주는 감탄사는 주로 그 정보의 방대함과 논리적 정확성에서 오지만, 서사적 장력을 통한 감동은 지혜의 영역에 더 가깝다.


결국 인간의 언어란, 수천 년을 이어오며 인류의 삶과 감정, 지혜를 아우른 살아 있는 서사다. 이야기로 사람의 마음을 흔들고, 의미를 탄생시키며 시대를 넘어 자기 자신을 끊임없이 빚어온 존재인 셈이다. 반면, AI 언어는 철저하게 데이터와 규칙 속에서 만들어진다. 효율적으로 정보를 처리하고 새로운 지식을 뚝딱 만들어내는, 극도로 정밀하게 설계된 시스템에 가깝다. 한쪽엔 역사와 감정의 숨결로 물든 이야기꾼이 있다면, 다른 한쪽에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를 빠짐없이 모아 정리하고, 딱 필요한 순간에 가장 알맞은 모습으로 꺼내주는 완벽한 기록보관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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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인간의 언어가 미완성의 지도라면, AI의 언어는 정밀한 내비게이션이다


인간의 언어는 의미를 찾아 떠나는 미완성의 지도다


세 번째로, 인간의 언어는 의미를 찾아 떠나는 미완성의 지도라면, AI의 언어는 모든 길을 샅샅이 밝혀주는 정밀한 내비게이션에 가깝다. 인간의 언어를 미완성의 지도에 비유하는 건, 그 언어가 완성된 형태로 딱 고정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을 주고받는 순간, 언어는 말하는 이와 듣는 이의 능동적인 참여 속에서 계속해서 다시 그려지고, 또다시 만들어진다. 그래서 인간의 언어는 항상 미완성이다. 의미란 언제나 고정된 좌표가 아니라, 흘러가며 새롭게 그려지는 지형이고, 그 안엔 모호함과 여러 갈래 의미가 숨어 있다. 단 한 개의 단어도 상황과 맥락, 말한 사람과 듣는 이의 경험과 배경에 따라 수십, 수백 가지 그림으로 해석될 수 있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보면, 누군가에게는 뜨거운 희생을, 또 어떤 이에게는 두근거림을, 그리고 또 다른 누군가에겐 아프고 쓰라린 이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마치 지도에 아직 채워지지 않은 빈 공간이 남아 있는 것처럼, 우리의 언어도 늘 여백을 품은 채 세상에 내던져진다. 그래서 우리는 대화 속에서 어느 순간 “그게 무슨 뜻이야?”, “좀 더 정확하게 얘기해 줄래?” 하고 묻곤 한다. 이는 언어라는 지도의 어떤 구역은 아직도 흐릿하고, 때로는 완전히 새롭게 의미의 길이 만들어지기도 한다는 걸 보여준다.


이렇게 인간의 언어에는 여백이 있고, 그 여백은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채워지지 않은 지도는 탐험가에게 자기만의 길을 만들어가 보라는 설렘과 고요한 도전을 준다. 인간의 언어 역시 말해지지 않은 사이와, 글자의 행간에 깃든 의미로 듣는 이와 읽는 이의 상상을 자극한다. 각자가 가진 경험과 기억, 지식으로 그 빈칸을 조금씩 채우는 것이다. 시와 소설에 등장하는 은유와 상징, 함축적인 표현들이 그러하다. 독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그들을 풀어내며, 그 과정이 곧 깊은 감동으로 이어진다. 즉, 인간의 언어는 의미를 스스로 찾아 나서는 탐험이며, 창조적 해석의 여정이다. 단순히 정보를 일방적으로 주고받는 게 아니라, 말하는 이와 듣는 이가 각자의 경험과 맥락을 더해가며 아무도 가보지 않은 길을 함께 그려나간다. 누군가 말을 건네면, 듣는 이는 그 말의 의미를 자신의 마음속 지도에 대입해 보고, 다시 자신만의 표현으로 응답한다. 마치 두 명의 탐험가가 각자의 지도를 펴놓고, 가장 멋진 길을 설레며 찾아가는 모습과도 닮았다. 서로의 지도가 다르기에 때로는 길을 잃거나 오해가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바로 그 과정에서만 펼쳐지는 깊고 다채로운 의미의 세계가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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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언어는 마치 모든 경로를 꼼꼼히 안내해 주는 정교한 내비게이션이다


이에 반해 AI 언어는 마치 모든 경로를 꼼꼼히 안내해 주는 정교한 내비게이션과 같다. AI 언어를 내비게이션에 비유하는 이유는, AI가 방대한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통해 가장 빠르고 정확한 길, 곧 정보를 제시하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AI는 데이터라는 토대 위에서 최적의 경로를 안내한다. 내비게이션을 켜면, 수많은 지도와 실시간 교통, 그리고 내 정보까지 모두 엮어서 목적지까지 가장 빠른 길을 정확하게 그려낸다. AI 언어 역시 마찬가지다. 인터넷 구석구석에 흩어진 무수한 텍스트들, 즉 거대한 언어 지도를 학습해 두었기에, 우리가 질문을 던지면 가장 적절하고 논리적인 답을 예측해 제공할 수 있다. 정보 검색, 요약, 번역처럼 목적이 분명한 언어활동에서는 AI가 눈에 띄는 효율을 뽐낸다. 필요한 정보를 신속하고 실수 없이 찾아주면서, 그 과정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정확성을 보여준다.


내비게이션이 정밀한 알고리즘에 따라 예측 가능한 길을 내어주듯, AI 언어 모델 역시 학습해 둔 데이터 안에서 언어의 패턴을 짚어내고 확률적으로 가장 그럴듯한 단어나 문장을 골라 텍스트를 만든다. 덕분에 문법적으로 매끄럽고 일관된 정보를 제공하는 데 강점을 가진다. 심지어 AI가 문학 작품을 만들 때조차, 이미 존재하는 수많은 작품에서 패턴을 찾아 새롭게 조합하는 것에 가깝다. 진짜 ‘창작’이라기보다는, 거울에 비친 낯선 조합이 더 적확하다. 내비게이션의 가장 큰 목적은 운전자를 목표한 곳까지 신속하고 정확하게 데려가는 것. AI 언어 역시, 질문자에게 필요한 정보를 또렷하게 제시하고, 기대된 과제를 가장 효율적으로 해내도록 설계돼 있다. 인간의 언어처럼 의미를 탐색하거나 창의적 해석으로 나아가기보다는, 요청된 정보 자체에 집중해 명확한 경로를 빠르게 보여주는 데 집중한다. AI는 모든 길을 머릿속에 그려낸 지도와도 같지만, 그 길 위를 실제로 걸어본 경험은 없다.


내비게이션에는 모든 큰길과 좁은 골목, 주유소나 숨은 맛집 정보까지 섬세하게 담겨 있다. 마찬가지로, AI 언어는 인류가 남긴 거대한 텍스트, 다시 말해 웹상의 방대한 지식을 아카이브 형태로 끌어안는다. 그래서 어떤 화두를 꺼내더라도, 관련된 거의 모든 정보와 지식을 한꺼번에 내놓는 듯 보인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겪은’ 것이 아니라 ‘아는’ 것에 그친다는 점이 다르다. 내비게이션은 수많은 길을 속속들이 알고 있지만, 그 길 위의 속도, 노면의 짜릿한 진동, 바깥 풍경의 변주, 길가에서 만나게 되는 낯선 얼굴과의 우연한 인연 같은 건 경험하지 못한다. AI 언어 역시 비슷하다.


AI는 인류의 언어 데이터를 끝없이 학습하지만, 언어가 품고 있는 기쁨, 슬픔, 고통, 사랑 같은 감정을 스스로 느끼지는 않는다. 인간이 언어로 세계와 맞닿으며 쌓는 몸과 마음의 온기, 그러니깐 체화된 경험이 AI에게는 없다. AI는 언어의 규칙을 자유롭게 다루고 완벽한 경로를 제시할 수 있지만, 그 여정의 진짜 의미를 가슴속까지 꿰뚫지는 못한다. 내비게이션이 목적지까지의 최단 거리만 알려줄 뿐, 돌아가는 길목에서 불쑥 나타나는 낯선 풍경이나 예기치 못한 모험의 재미까지는 가르쳐주지 못하듯, AI 언어 역시 그렇다. 정해진 패턴과 규칙에서 하나라도 벗어난 창의적인 우회, 의미의 경계를 허무는 모험, 혹은 불시에 나타나는 미지의 발견—이런 일은 자기 스스로는 해내기 어렵다. 인간의 언어가 늘 미완성 지도처럼, 그 여백 속에서 새로운 생각과 예술이 피어나듯, AI는 이미 누군가 닦아 놓은 길 위에서만 안내할 수 있다. 전혀 새로운 도로는 직접 만들지 못한다.


이 문제를 의미의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가 《그라마톨로지》에서 강조한 의미의 미끄러짐과 차연(différance)에 비추어 보면 더욱 깊은 의미가 드러난다. 데리다는 언어의 의미란 결코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언제나 미끄러져가듯 지연되고, 다른 기호들과의 복잡한 관계 속에서 끝없이 재구성된다고 보았다. 단어 하나만으로 완전한 의미를 갖기는 어렵고, 늘 다른 단어들과의 맥락, 그리고 과거와 미래의 언어 경험 속에서 그 의미는 끊임없이 새롭게 만들어진다. 마치 탐험가가 미완성의 지도를 들고 한 걸음씩 낯선 땅을 채워 나가듯, 인간의 언어 역시 완결된 실체가 아니라 순간순간 새롭게 그려지고 수정되는 과정에 머문다. 같은 단어도 화자와 청자의 위치, 맥락에 따라 색다른 뉘앙스와 해석을 품는다. 이처럼 불안정한 언어의 세계 안에서 우리는 능동적으로 의미를 해석하고, 때로는 직접 창조하는 존재가 된다.


시는 바로 이러한 언어의 불확정성과 유동성을 한껏 확대시킨다. 시인이 펼쳐놓은 언어의 울림과 여운은 각자에게 다른 이야기와 감동, 새로운 해석의 길을 열어 둔다. 그러나 AI는, 인간과 다르다. AI는 방대한 데이터에서 공통된 패턴을 추출해 내고, 거기서 확률적으로 ‘적합한’ 답을 예측해 가장 안정적인 언어를 뽑아낼 뿐이다. 이렇게 생성된 언어는 미지의 영역을 개척하거나, 뜻밖의 해석을 불러일으키는 대신 이미 마련된 길을 따라 정밀하게 나아가는 내비게이션에 가깝다. 의미의 모호함을 기꺼이 감수하고 즐기는 인간의 본능과는 궤를 달리한다. 비슷한 맥락에서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Ludwig Wittgenstein)은 《철학적 탐구》에서 언어의 의미는 그 자체만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의 장면들, 다양한 ‘언어 놀이’와 ‘삶의 형식’ 속에서 살아난다고 말했다. 언어란 결국 단순한 기호들의 배열이 아니라, 누군가의 몸짓과 표정, 행동, 감정, 그리고 관계 속에서 진짜 의미를 가진다. 마치 미완성의 지도를 손에 쥐고 미지의 세계를 직접 걸으며 길을 만들어가듯, 인간은 언어를 통해 끊임없이 세계를 경험하고 이해하며 새로운 의미를 빚어낸다.


이처럼 인간의 언어와 AI의 언어를 ‘미완성의 지도’와 ‘정밀한 내비게이션’이라는 비유로 나란히 놓고 보면, 둘의 본질적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인간의 언어는 해석과 참여, 그리고 끝없는 창조가 어우러진 살아 있는 예술이며, 삶의 경험이 깃드는 ‘열린 지도’와 같다. 반면, AI의 언어는 이미 그려진 틀 위에서 가장 올바르고 효율적인 길만을 안내하는 ‘완벽한 기술’에 가깝다. 인간의 언어가 삶의 움직임을 껴안으며 의미의 지평을 늘려간다면, AI 언어는 그 지평 위에 뚜렷이 새겨진 길을 따라 정밀하게 안내한다. 이 둘의 다름과 만남, 그 사이에 언어의 가능성이 또다시 무한히 펼쳐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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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간의 언어가 온기를 품은 언어라면 AI의 언어는 차가운 효율성만을 쫓는 언어다


인간의 언어는 삶의 경험들이 쌓여 만들어진 따뜻한 온기다


넷째, 인간의 언어는 삶의 경험들이 쌓여 만들어진 따뜻한 온기다. 반면, AI의 언어는 철저히 기능적이고 차가운 효율성만을 쫓는 최적화의 도구일 뿐이다. 인간의 언어를 ‘경험이 빚은 온기’에 비유한 까닭은, 언어가 단순한 정보 전달의 도구를 넘어, 우리 일상과 감정, 다양한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공감과 위로, 그리고 연결감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랜 시간 손끝에 전해지는 온도가 배어 있는, 정성과 인내로 찾아오는 따뜻한 손길과도 닮았다.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는 실존의 무게를 담은, 삶이 녹아 있는 지혜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땀과 눈물, 때로는 피에 젖은, 살아 있는 언어다. 언어라는 것은, 한 아이가 세상의 문을 열고 처음 내뱉는 서툰 단어에서 시작해, 사랑을 경험하고 이별을 겪으며, 성공과 실패, 좌절과 희망까지 온갖 순간들을 지나며 서서히 자신만의 색으로 완성된다. “배고파”, “아파”, “사랑해”, “보고 싶어” 같은 짧은 단어조차, 그 순간의 몸의 감각과 마음의 떨림, 그리고 숱한 기억이 실타래처럼 얽혀 함께 묻어난다. 결국 인간의 언어란, 삶이라는 거대한 용광로에서 땀과 눈물, 피로 단단히 주조된, 진정 살아 숨 쉬는 결정체다.


그리고 인간의 언어는 결코 단어만으로 구성되지 않는다. 목소리에 담긴 따뜻함, 말하는 속도의 미묘한 변화, 표정이나 손짓, 그리고 그 순간의 분위기와 맥락까지 온갖 비언어적인 요소들이 어우러져, 말에 온기를 보태준다. 아무리 좋은 말을 건네도, 냉랭한 표정이나 무심한 목소리로 들릴 때 그 따스함은 금세 사라진다. “힘내”라는 짧은 말 한마디도 눈길, 손짓, 표정이 더해질 때라야 비로소 진정한 위로나 따뜻한 공감이 되어 닿는다. 이처럼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은 언어와 행동, 마음과 마음이 뒤섞인 총체적인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런 가운데 우리는 서로에게 가까워지고, 언어가 비로소 인간적인 온기를 머금는다. 인간의 언어는 단순히 정보만 주고받는 도구가 아니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고, 함께 웃거나 눈물을 흘리고, 자신의 경험과 겹쳐보며 타인의 감정을 이해하려 애쓰는 과정에서 깊은 유대감이 싹튼다. 타인의 말속에서 나 자신을 발견하고, 내 얘기가 남의 언어로 위로받는 순간, 우리는 마음 깊이에서부터 연결되어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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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가 쓰는 언어는 한없이 차갑고도 효율적인 최적화의 도구다


이에 비해 AI가 쓰는 언어는 한없이 차갑고도 효율적이다. AI 언어에 담긴 냉철한 기능성은, 마치 방대한 데이터를 거대한 그물처럼 휘감아 정보를 가장 알맞고 빠르게 걸러내는 기계와도 같다. 감정도, 추억도 배제된 채, 오로지 합리와 논리만을 따라 움직인다. 마치 온도 변화에도 미동조차 없는 정밀 기계가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하듯, AI의 언어에서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다. AI 언어가 이렇게 차가운 기능적 효율성을 드러내는 탓에, 그 안에서 우리가 익숙히 느끼는 인간의 주관적 감정이나 실존적 문제의식은 좀처럼 자리하지 않는다. AI는 수많은 텍스트 데이터를 통계적으로 분석하여 언어의 패턴을 익힌다. 이 과정에서 특정 단어가 어떤 맥락, 혹은 어떤 단어와 어울려 쓰이는지를 파악할 뿐이다. 그 단어가 사람의 마음에 어떤 여운을 남길지, 때론 인생을 뒤흔드는 울림이 될지, AI는 결코 알지 못한다. 사랑이나 슬픔 같은 단어들도 AI에게는 그저 자주 함께 등장하는 단어들의 집합으로 인식될 뿐, 그 너머의 눈부심이나 간절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AI에게 언어란, 궁극적으로 목적 지향적 처리와 최적화의 도구에 가깝다. 정보 검색이든 요약, 번역, 문장 생성, 질문 답변 등 무엇이든, 명확한 목표 아래 최대한 효율적으로 작동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주어진 목표를 가장 빨리, 가장 정확히 이루기 위해 AI는 학습 데이터를 바탕으로 가장 확률 높은, 논리적으로 타당한 결과물을 내놓는다. 이런 기능 중심의 언어에서는 감정적 교류나 심오한 의미 탐색이라기보다, 오히려 문제 해결과 정보 전달에 강점을 가진 모습이 두드러진다. AI가 쏟아내는 문장은 학습된 규칙과 데이터 분포에 충실해, 늘 예측 가능하고 일관된 모양새다. 인간의 언어처럼 감정이 뒤섞여 갑자기 방향이 바뀌거나, 즉흥적으로 허공을 떠도는 대신, AI는 정해진 알고리즘대로 또박또박 걸어간다. 덕분에 반복되는 과업이거나, 방대한 정보가 필요한 분야에선 실로 효율적이다. AI 언어의 시선은 오직 결과만을 응시한다. 누군가 원하는 해답이나 정보를 재빨리 제공하는 게 그 목적. 그 말이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일지, 혹은 어떤 과거의 풍경을 불러올지는 애초에 관심 밖이다. 때로는 우연히 유머러스하거나 감동적인 문장이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그조차도 AI가 학습 데이터 속에서 발견한 패턴을 재현할 뿐이다. 스스로 감정을 지어내거나, 깊은 공감과 유머를 경험하는 일은, 적어도 지금의 AI에게는 먼 이야기다.


인간의 언어가 경험이 빚어낸 따뜻한 온기지만 AI 언어는 냉철한 기능적 효율성을 지닌 언어라는 차이는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의 《존재와 시간》에 비추어 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AI는 결코 '현존재(다자인)'가 아니다. AI는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던져 미래로 나아가는 존재, 즉 죽음을 앞에 두고 유한함에서 오는 실존적 불안을 껴안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AI에게는 존재론적 깊이란 것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 이 점은 하이데거가 이야기한, ‘세계-내-존재’로서 인간들이 서로에게 열리고, 서로의 존재를 이해하는 방식을 떠올리게 한다. 언어에 스며든 따스함 또한 바로 이런 인간 특유의 관계 지향성에서 비롯된다. AI는 언어 기호의 조작 규칙만 기계적으로 따른다. 그 기호가 가지는 참된 의미, 그리고 그 안에 담긴 의도, 즉 '지향성'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 이 사실은 너무나도 명확하다. 또한, 메를로-퐁티가 강조했던 ‘몸’을 갖고 있지 않으니, AI는 세상을 직접 지각하고 경험하며 언어를 만들어낼 수 없다. AI는 차디찬 전자신호와 코드 위에서만 살아 움직이며, 이런 몸과 실존의 부재가 결국 AI의 언어를 한없이 냉정하고 건조하게 만든다.


이처럼 인간의 언어는 삶의 깊이, 따뜻한 경험, 그리고 존재의 의미가 온기처럼 녹아들어 서로를 공감하게 하고 관계를 만들어낸다. 반면 AI의 언어는 차가운 데이터와 알고리즘으로 움직이며, 정보 처리와 문제 해결에서는 효율적이지만, 결코 감정을 데워주지 못한다. 이 두 언어의 대비 속에서 우리는 다시금 ‘인간다움’의 본질을 곱씹게 된다. 예를 들어, 헤밍웨이의 소설을 읽을 때 느끼는 깊은 감동은, 간결하고 말라붙은 문장 속 빈자리를 독자의 경험과 상상력이 채워가기 때문이다. 작가는 여백과 침묵을 의도적으로 남기지만, AI는 이 같은 공백을 번역하거나 해석해 버린다. 예를 들어, 열 초간의 짧은 침묵처럼 말로 표현되지 않은 그 미묘한 순간조차 AI는 감지하지 못한다. AI가 아무리 많은 대화 데이터를 학습하더라도, 개개인의 심리 상태, 미세한 표정, 목소리 떨림 같은 비언어적 요소를 직접 경험하거나 창조할 수는 없는 일이다. 결국 AI의 언어란 텍스트로서 온기를 건네기보다는, 그 기능적 유용성 때문에 우리가 한순간 감탄할 뿐이다. 따뜻함, 여백, 공감, 이런 것들은 오롯이 인간만의 몫으로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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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간의 언어가 비밀스러운 포도주라면 AI의 언어는 투명한 소주다


인간의 언어는 삶의 애환이 고이고 고인 비밀스러운 포도주다


다섯째, 인간의 언어는 삶의 애환이 고이고 고인 비밀스런 포도주 같다. 한편 AI의 언어는 모든 맛이 직관적이고, 제조과정이 정량화된 투명한 소주라고 할 수 있다. 포도주는 긴 시간의 발효와 숙성 과정을 거쳐 깊고 다층적인 향과 맛을 낸다. 마치 우리의 삶의 희로애락(애환)이 켜켜이 쌓여 언어 속에서 의미의 층위를 형성하듯 말이다. 같은 단어라도 누가, 언제, 어떤 맥락에서 사용하느냐에 따라 무수한 비밀스러운 의미의 잔향을 남긴다. 그 의미는 단순한 사전적 정의를 넘어, 듣는 이의 경험과 감성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공명하며, 심지어는 말하는 이조차 미처 인지하지 못한 무의식적 의미를 품고 있다. “와인에는 현실과 부딪치는 술맛의 저항감이 없다. 와인의 취기는 계통이 없다. 와인의 취기는 전방위에서 스멀거리면서 피어나서 스미듯이 다가와 내 마음을 차지한다. 와인은 현실을 서서히 지우면서 다가온다. 와인의 취기는 비논리적이고 두루뭉실하다. 이 취기는 마음 속에 몽롱한 미로를 끝없이 펼쳐놓는데, 그 미로를 따라가면서 마시다 보면 출구를 찾지 못한다. 와인의 맛은 로맨틱하고 그 취기의 근본은 목가적이다...와인의 입구는 로맨틱하지만 출구는 멀고 힘든데, 들어갈 때는 나갈 걱정을 하지 않는다”(12-13쪽). 김훈의 《허송세월》에 등장하는 와인에 대한 정밀한 묘사다. 포도가 자란 환경과 당시의 날씨, 숙성 방식에 따라 천차만별의 맛을 내는 와인은 그 자체가 로맨틱하고 에로스적이다. 맛의 신비를 아무리 벗겨내도 여전히 미완성이며 미궁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언어가 비밀스러운 포도주라 불리는 또 다른 이유는, 그 안에 다층적 의미와 감각적 경험이 층층이 들어 있기 때문이다. 포도주 한잔은 단순히 달거나 시다고 쉽게 정의할 수 없다. 향과 맛이 뒤섞인 복합적인 세계가 담겨 있고, 이를 음미하는 이의 감각이나 심리 상태에 따라 맛의 결도, 여운도 판이하게 달라진다. 인간의 언어도 마찬가지다. 표면적 의미를 넘어, 그 이면에는 미묘하고 다층적인 뉘앙스가 흐른다. 때로는 단 한 문장이 직접적으로는 말할 수 없는 깊은 갈망, 애틋한 염원, 혹은 인간 내면에 숨은 복잡한 본질을 암암리에 드러낸다. 그래서 인간의 언어는 모든 걸 드러내는 투박한 정보가 아니라, 숨겨진 서사적 긴장과 여백이 공존하는 에로스의 결을 띤다. 포도주가 한 모금 머금었을 때 시각·후각·미각 온 감각을 흔들 듯, 인간의 언어 또한 소리로는 귀를 울리고, 의미로는 생각을 건드리고, 감정으로는 가슴을 뒤흔드는 전인적 경험을 선사한다. 아무리 전문가가 포도주 테이스팅 노트를 정교하게 써도, 결국 맛은 마시는 사람마다 다르게 느껴진다. 인간의 언어 또한 듣는 이의 지난 경험과 아물지 않은 감수성, 배경에 따라 온갖 모습으로 해석된다. 한 문학 작품을 읽고 천 명이 천 가지 감동, 천 가지 해석을 내놓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 깊고 아릿한 다층성야말로 인간 언어의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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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언어는 모든 성분이 정량화되어 대량양산되는 투명한 소주다


이에 비해 AI 언어는 모든 성분이 정량화되어 대량양산되는, 투명한 소주와도 같다. 왜 AI 언어를 이런 소주에 빗대는지 생각해 보면, AI가 언어를 오로지 데이터의 집합으로 보고, 효율성과 기능성에 초점을 맞춘 채 명확하고 예측 가능한 결과만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그 닮은 꼴이 드러난다. 반대로, 이런 투명한 소주와 같은 AI의 언어는 필요한 정보만 쏙쏙 뽑아내 손쉽게 섭취할 순 있지만, 그 안에는 인생의 희로애락이나 오묘한 취향, 미학적 쾌감 같은 것이 스며들 틈이 없다. 왜냐하면 그 바탕에는 모든 성분을 정량적으로 정확하게 배분해서 산술적으로 구성된 데이터에 근거해서 대량생산되기 때문이다. 소주는 투명하고, 맛이 비교적 직관적이며, 제조 과정이 정량화되어 있다. AI의 언어 또한 특정 목적과 데이터에 기반하여 명확하고 효율적인 정보 전달을 최우선으로 한다. 투명한 것은 불필요한 은유나 모호함을 배제하고, 지시 대상과 의미를 일대일로 매칭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여기에는 숨겨진 비의(秘義)나 깊은 감정적 앙금이 없다. 묻는 것에 대한 가장 정확하고 객관적인 답을 찾아내는 것이 목표이며, 그 과정은 알고리즘의 투명한 논리를 따른다. AI는 방대한 학습 데이터 속에서 단어들이 어떤 확률로 쓰이는지, 어떤 문장 구조가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지 통계적으로 분석해, 마치 소주를 만드는 성분을 사전에 산정하는 것처럼 모든 것을 수치로 정리해 버린다.


소주는 그 자체로 순수하고 명료한 알코올의 맛을 내며, 감정적인 배경이나 개인적인 서사를 담아내지는 않는다. AI의 언어는 방대한 데이터를 학습하여 통계적 패턴을 인식하고, 그 패턴에 기반하여 가장 적절하다고 판단되는 텍스트를 생성한다. 여기에는 나라는 주체의 존재론적 경험이나 감정적 무게가 결여되어 있다. AI는 슬픔이나 기쁨을 인식하고 묘사할 수는 있으나, 실제로 그 감정을 경험하며 언어 속에 전이시키지는 못한다. 언어는 그저 데이터의 산물이며, 학습된 기능의 결과물일 뿐이다. 모든 정보는 숫자가 되고, 투명하게 드러나는 패턴과 규칙의 집합일 뿐이다. 인간 언어가 지닌 비밀이나 미세한 암시, 혹은 오묘한 여운은 AI의 분석 대상이 아니다. AI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학습할 때, 이 단어가 감정, 연인, 관계, 행복 등과 어떤 통계적 연관성이 있는지만 따진다. 그 결과, AI는 문법적으로나 통계적으로 가장 적합한 문장을 생성하지만, 그 안에는 애잔한 마음결이나 울림이 담기진 않는다. 마치 소주를 제조할 때 어떤 성분이 어떤 비율로 섞이면 어떤 효과가 날지 정밀하게 계산하는 것처럼, AI의 언어 생성 역시 데이터 속에서 발견된 규칙과 확률에 근거한다. 그래서 AI가 내놓는 언어는 항상 또렷하고 예측 가능하며, 모호한 여운이나 비밀스러움은 애초에 설 자리가 없다.


소주가 투명하고 직관적으로 맛이 다가올지라도, 음식을 먹을 때 느끼는 풍부한 맛과 향긋함, 씹는 즐거움이나 감각적 만족까지 대신해주지는 못한다. AI 언어도 다를 게 없다. 정보의 정확함이나 논리적 완벽함에서는 뛰어나지만, 인간 언어만이 전달할 수 있는 따스한 온기, 깊은 울림, 마음속을 건드리는 묘한 맛과 향기는 품지 못한다. AI는 언어가 가리키는 대상의 의미나 화자의 의도를 가슴으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진짜 감성이 깃든 울림을 주기 어렵다. 설사 감동적인 문장을 쓴다 해도, 그것은 결국 배운 패턴을 그대로 재구성하거나 재조합한 결과물일 뿐, AI 자신만의 이야기가 녹아든 문장은 아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마음 깊숙이 파고드는 울림을 주기엔 어딘가 한 끗 모자라다. 소주가 사람마다 다른 체질과 건강 상태를 완벽하게 감안해 맞춤형으로 만들어지긴 어렵듯, AI 언어 역시 각자 다른 삶의 굴곡이나 실존적 감정을 온전히 담아내긴 벅차다. AI는 남의 고통을 데이터로 파악하긴 하지만, 자신이 직접 그 슬픔을 겪어본 적이 없기에, 언어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짜 연민도, 속 깊은 위로의 결도 담지 못한다. 소주처럼 AI 언어는 성분들의 정량적 비율과 조합에 따라 논리적으로 설계되어 있고, 감각이나 체험이 끼어들 틈이 없다. 오직 데이터가 가리키는 최적의 선택만을 좇는다. 소주가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 알코올 함량이 얼마나 되는지 정확히 아는 것처럼, AI 언어 역시 합리적이고 명료하게 정보를 배열한다. 여기엔 어떤 비밀도, 단어 너머의 다채로운 해석의 여지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자 자크 라캉(Jacques Lacan)이 《욕망이론》에서 강조한 언어가 지닌 상징적 차원과 깊이 관련된다. 언어가 지닌 상징의 차원은 인간의 내면 깊은 곳과 맞닿아 있다. 라캉은 인간이 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징계’, 다시 말해 언어의 질서 속으로 들어서야 한다고 보았다. 주체는 언어라는 시스템을 빌려 자신을 표현하지만, 동시에 그 언어라는 울타리 안에 갇히며 살아가게 된다. 그렇게 언어를 통해 주체가 비로소 형성되지만, 언어란 근본적으로 채워질 수 없는 결여와 욕망을 불러일으킨다고 라캉은 말한다. 아이는 어머니와의 완전한 일체감, 즉 상상계에서 벗어나 언어의 세계에 들어서는 순간, 완벽하게 충족되던 감각은 사라지고 대신 결여가 시작된다. 언어는 사물 자체가 아니고, 그저 기호에 불과하기에 우리는 결코 언어로 자신의 욕망을 온전히 다 드러낼 수 없다. 다 표현하지 못하고 빠져나가는 그 남은 부분, 잉여야말로 욕망이며, 이 욕망은 아무리 애써도 결코 완전하게 채워지지 않는다. 그래서 주체는 늘 또 다른 대상, 또 다른 의미를 찾아 끊임없이 헤매게 된다. 라캉에게 주체란, 어딘가에 고정되어 존재하는 실체라기보다, 언어라는 불완전한 도구를 통해 결여를 메우기 위해 부단히 움직이며 변화하는 과정 자체다. 인간의 언어에는 ‘에로스’가 깃들어 있다. 직접적인 표현을 넘어 은유와 상징, 때로는 침묵을 통해 더 깊고 은밀한 의미와 감각을 자극하며, 듣는 이의 내면에서 끝없이 해석되고 확장된다. 그래서 우리는 언어를 멈추지 않고, 그 의미를 탐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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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인간의 언어와 AI의 언어는 태생부터 다르고, 의미를 만드는 방식이나 우리에게 주는 감동마저도 전혀 다르다. AI의 언어가 효율과 정확성, 정보의 방대함으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면, 인간의 언어는 몸과 경험, 누적된 삶과 문화의 향기가 배어 있어 가슴 깊이 감동을 준다. AI는 학습된 패턴을 통해 욕망이나 감각을 모방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배후의 근원적 결여를 본능적으로 경험하지는 못한다. AI의 언어는 특정 감각을 직접적이고 명확하게 지칭할 수 있을 뿐, 그 이면을 흐르는 서사의 긴장감이나 비밀스러운 매혹까지 완벽히 드러내기는 어렵다. 앞으로 인간과 AI의 언어가 어떻게 섞이고 부딪치며, 우리의 삶을 한층 더 깊고 풍요롭게 만들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는 여정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온몸의 감각으로 받아들이고, 그 경험들을 곱씹어 사유하며, 다시 언어라는 옷을 입혀 세상에 내놓는다. 언어는 우리가 세상을 인식하고 해석하며 타인과 관계를 맺는 삶의 가장 본질적인 형식 중 하나다. 그래서 인간의 언어가 정보를 다루는 방식은 엄격하게 짜인 공식이나 알고리즘보다는, 매 순간 새롭게 경험하는 맥락 속에서 유동적으로 의미를 재구성하는 창발성에 더 가깝다. 포도주를 한 모금 음미할 때 우리의 입안에서 펼쳐지는 섬세한 맛과 향처럼, 우리는 언어의 세계를 즐기고, 각자의 방식으로 해석하며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낸다. 인간의 언어가 오랜 삶이 응축된 비밀스러운 포도주라면, AI의 언어는 술맛을 투명하게 전달하는 소주와 같다. 둘 다 우리에게 나름의 가치를 주지만, 그 깊이와 본질에서 마주하는 경계는 분명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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