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는
사랑의 얼룩이 아니라 누룩이다

은유로 짧은 문장을 쓰는 한 가지 방법

상처는 사랑의 얼룩이 아니라 누룩이다



“상처 없는 관계라는 게 일찍이 존재나 하는 것인지 나는 모르겠다. 상처는 사랑의 누룩이며, 이제 나는 상처를 원경으로 삼지 않은 사랑이라는 걸 더는 알지 못하게 되었다. 상처는 필연이고 용서는 선택이지만, 어쩌면 상처를 가만히 들여다봄으로 인해, 상처를 만짐으로 인해, 상처를 통해서만 다가갈 수 있는 대상이, 세상에는 있는지도 모르겠다고”(344쪽). 구병모의 《절창》에 나오는 절절한 울림을 주는 문장이다. 누룩은 술을 만드는 효소를 갖고 있는 곰팡이를 곡류에 번식시킨 것을 말한다. 술을 빚는 데 쓰는 당화제이자 발효제다. 누룩은 밀가루를 부풀려 빵을 만들고, 포도를 숙성시켜 와인으로 빚어내듯, 무언가를 변화시키고 더 풍요롭게 만드는 촉매와 같다. 작가님의 말처럼 상처가 '사랑의 누룩'이 된다는 것은, 상처가 사랑이라는 원료를 새로운 형태로 발효시키고 숙성시켜 더욱 깊고 향기로운 것으로 만든다는 의미다. 상처가 아픔이나 슬픔의 감정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상처 위에서 사랑은 이전과 차원이 다른 인간적 실존의 의미와 이유로 거듭나는 것이다. 고통과 시련을 통해 사랑은 얕은 감정을 넘어선 존재론적 깊이를 얻게 되는 것이다. 사랑은 상처의 얼룩이 아니라 누룩이 되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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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가 사랑의 누룩’이라는 깊은 사유를 문학적, 철학적 은유 다섯 가지로 풀어본다면, 우리는 상처의 의미를 훨씬 더 깊고 무게 있게 들여다볼 수 있다.


상처는 밤을 더 깊이 물들이는 별빛이다


첫 번째 은유로, 상처는 밤을 더 깊이 물들이는 별빛이다. 상처란 어둠이 짙게 깔린 밤하늘 같은 것이다. 별들은 언제나 그곳에 있지만, 밤이 충분히 깊지 않으면 그 존재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다. 사랑 역시 관계 속에서 상처를 겪으며 어둠을 맞지만, 그 어둠 속에서 오히려 흔들림 없는 사랑의 진짜 모습이 별빛처럼 또렷하게 드러난다. 잠깐의 위로가 아니라, 찬란하게 영원히 빛나는 사랑의 본질을 우리는 고통을 겪은 뒤에야 비로소 발견하게 된다. 상처는 절망과 어둠 속에서 진실을 드러낸다. 사랑하는 이들과 맺는 관계에서의 상처는 마치 온 세상의 빛이 사라진 깊고 고요한 밤과 같다. 이 밤은 평화로웠던 낮의 시간 동안은 미처 알지 못했던 약점, 오해, 또는 이기적인 마음 같은 것들을 가감 없이 마주하게 만든다. 캄캄한 밤을 거치며 사람은 때로 혼란에 빠지고, 길을 잃은 듯 외로움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이렇게 깊은 밤을 만나야만, 우리는 정말로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되돌아볼 수 있다. 낮에는 그저 하늘에 뿌려진 작은 점처럼 보이던 별들이, 밤이 깊을수록 더 찬란하게 다가오는 것처럼 말이다.


상처는 상실감 속에서 사랑의 본질을 재발견하게 만든다. 밤하늘을 밝히는 별빛은 바로 사랑이 지닌 가장 순수하고 단단한 요소들—믿음, 변치 않는 지지, 조건 없는 이해, 그리고 쉽게 끊어낼 수 없는 깊은 유대다. 평소에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거나, 존재조차 의식하지 못했던 이 가치를, 상실의 어둠 속에서 사람은 비로소 마음 깊이 깨닫게 된다. 이 놀라움과 감동은 일시적인 기쁨과는 다른 차원의, 한층 더 깊고 본질적인 사랑의 빛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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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밤의 깊이를 더한다’는 그 표현에 담긴 의미다. 상처는 단순히 밤을 만드는 데 그치지 않는다. 상처는 그 밤을 더욱 깊고 진하게 만든다. 아이러니하게도 밤이 깊을수록, 오히려 별빛이 또렷이 보인다. 관계 또한 상처로 인해 위태로워지고, 때로는 파국에 이르는 듯 보일 때가 있다. 하지만 그 시련과 아픔을 겪으며, 우리는 서로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너그러움, 더 큰 용서, 그리고 인간관계의 복잡함과 삶의 유한함에 대한 깊은 통찰을 얻게 된다. 이 시간은 관계를 단순한 행복의 추구를 넘어서, 함께 아픔을 이겨낸 역사와 의미로 채우게 만든다. 결국 상처는 사랑의 밤을 더 깊이 있게 해 주고, 그 안에서 빛나는 별빛 같은 진정한 가치를 더욱 또렷하게 느끼게 해 준다. “별이 더 잘 보이려면 어둠이 필요하다”는 말처럼, 상처라는 어둠이 있어야 비로소 사랑이라는 별빛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생생하게 드러난다. 알베르 카뮈가 절망 속에서 피어나는 희망에 대해 이야기한 것처럼, 상처는 사랑의 진짜 빛을 다시금 발견하게 해주는 소중한 계기가 된다.


문학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이별이나 상실의 아픔을 겪으면서 비로소 삶의 진정한 의미와 타인에 대한 깊은 애정을 깨닫게 되는 이야기가 자주 그려진다. 상처란, 사랑이 얼마나 소중한지, 어둠 속에서 오히려 별처럼 빛나는 그 본질을 보여주는 통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순간들을 조용히 담아낸 작품들을 생각보다 많이 만난다. 가령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에서 라스콜니코프는 자신의 죄책감과 깊은 절망 속에서 부유한다. 그 곁에 소냐는, 한없이 따스하고 지친 기색도 없이, 연민과 사랑으로 그를 다독인다. 살인이라는 절망적인 상처와 죄의 어둠 속에서, 소냐의 사랑과 헌신은 어쩌면 밤하늘의 별빛처럼 아스라하게 빛나면서 라스콜니코프에게 구원의 실마리를 보여준다. 그가 마음 가장 깊은 곳에서 껴안고 있던 절망은, 소냐의 빛나는 사랑에 스며들면서 천천히 희망의 모습으로 바뀐다. 라스콜니코프가 끝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자신의 고통스러운 상처를 지나 타인의 사랑과 용서가 얼마나 값진 것인지 깨닫게 되는 과정, 바로 그 변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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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굳건한 뿌리를 내리는 바위틈의 씨앗이다


둘째, 상처는 굳건한 뿌리를 내리는 바위틈의 씨앗이다. 사랑이란 씨앗은 말랑말랑하고 비옥한 흙에서는 금세 싹을 틔운다. 하지만 때로는 냉혹한 바람에 실려 아무런 예고도 없이 척박하고 메마른 바위틈에 떨어지기도 한다. 그 바위틈, 바로 상처의 자리다. 씨앗은 살아남으려고 바위를 파고들며 뿌리를 내려야만 한다. 이때 씨앗은 이전보다 더 단단하고 질긴 뿌리를 갖게 된다. 상처는 사랑이라는 감정이 표면을 넘어, 속 깊이 단단해지도록 한 차례 시련을 안긴다. 그래서 사랑은 어떤 거센 폭풍이 몰아쳐도 쉽게 흔들리지 않는 고요하고도 굳건한 힘을 얻게 된다. 사랑이 처음 시작될 때는 한없이 작고 여린 씨앗 같다. 새로운 관계 앞에 싹트는 부드러운 희망, 아직 알 수 없는 거대한 가능성과 함께 고요하지만 불안하게 출렁인다. 기름지고 말랑한 흙 속에서는 씨앗도 주저 없이 뿌리를 뻗겠지만, 아무리 씨앗이 단단한 생명력을 품었다 해도, 태생적으로 외부 환경에 크게 의존하고 만다. 그래서 사랑의 시작도 설렘과 기대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손가락 하나로 터질 듯한 연약함과 조심스러움을 감춘다. 얼핏 보면 미지의 감정, 아직 한 번도 재어보지 못한 감정의 얕은 결이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이 여린 씨앗이 떨어진 바위틈이란 곧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경험하는 상처, 갈등, 혹은 배신처럼 우리를 아프게 하는 일들이다. 그 상처는 생긴 자리에 존재론적 균열을 만들어낸다. 바위틈은 포근한 흙처럼 쉬운 안식을 주지 않는다. 차갑고 거칠며, 생명의 싹조차 품어내기에 버거운 공간이다. 그래서 이 틈은 단순한 감정의 상처가 아니라, 관계의 깊숙한 곳까지 파고드는 본질적인 균열, 상처를 의미한다. 때론 사랑이 뜻밖의 고난과 마주하며 이미 모든 것이 끝났다고 느끼는 절망의 흑암에 닿을 수도 있다. 그 바위틈 한가운데, 씨앗은 본능적으로 끝내 뿌리를 내리려 몸부림친다. 살아남으려는 작은 의지는 결국 척박한 바위를 어떻게든 뚫고 들어간다. 그리하여 씨앗은 겉만 훑는 가느다란 뿌리가 아니라, 바위의 차가운 틈새를 비집고 내려가 깊고도 단단하게 버틴다. 마치 상처라는 고통을 등을 돌리지 않고 마주한 끝에, 그 아픔 한가운데서 사랑의 본질을 찾아가고 새로 정의 내리는 작업과도 같다. 바위틈을 뚫고 자란 그 뿌리는, 비옥한 흙에서 자란 뿌리보다 훨씬 거칠고 단단하다. 아무리 사나운 폭풍이 몰아쳐도, 타는 가뭄이 닥쳐도 변함없는 생명력으로 버텨낸다. 사랑 역시 그렇다. 상처를 만나고 나서야 비로소 더 깊어지고, 서로의 불완전함과 부족함을 알아가며, 용서하고 인내하는 법을 배워나간다. 그렇게 견딘 고난의 뿌리가 자리 잡을 때, 사랑은 감정이라는 여린 껍질을 벗고 진짜 유대, 정신적인 힘으로 거듭난다. 바로 이 순간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서로를 정말 이해하게 되는 결정적인 시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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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가 땅속 깊이 내려가는 일은 결코 쉽지도, 금세 이루어지지도 않는다. 어느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는 곳에서, 오랜 침묵과 묵묵한 노력이 오롯이 쌓여야만 한다. 상처를 딛고 사랑을 단단하게 만들어가는 길 또한 순식간에 깨닫게 되는 것도, 한순간의 마음가짐만으로 가능한 일도 아니다. 고통을 마주하고,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인내로 시간을 건너야 사랑은 비로소 속살 깊은 힘과 회복하는 탄력을 얻게 된다. 이 지난한 시간을 견디고 나면, 사랑은 겉만 반짝이는 감정이 아닌, 바람에도 끄떡없이 굳게 버티는 속내의 단단함을 품는다. 결국 세찬 외풍에도 흔들리지 않는 결기로 뿌리가 더욱 깊어지고, 그제야 사랑은 온전한 성장의 순간을 맞이한다. 척박한 땅에서는 나무가 더디게 자라지만, 바로 그래서 그 나이테마다 단단하고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지는 것처럼—상처라는 바위틈 속에 뿌리내린 사랑은, 그 깊이와 시간의 결을 따라 남다른 아름다움과 굳건함을 지니게 마련이다. 처음엔 겨우 숨결만 붙어 있던 씨앗이라 해도, 수많은 시련을 거쳐 마침내 꺾이지 않는 뿌리 깊은 생명으로 다시 태어난다. 이런 은유가 말하려는 것은 상처가 단순히 아픔이나 결핍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의 본질을 단단히 붙잡고 그 깊이를 한껏 확장시키는 꼭 필요한 과정임을 시적으로 역설한다는 점이다.


시련과 고난을 딛고 사랑이 더욱 단단해지고 뿌리 깊어지는 모습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가슴을 울린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작품 중 하나가 바로 샬럿 브론테의 《제인 에어》다. 고아로 태어나 온갖 학대와 외로운 시간을 견뎌내야 했던 제인 에어의 삶은 마치 물 한 방울 없는 바위틈처럼 척박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조차 배신을 겪고 상처로 얼룩진 하루하루를 보내지만, 제인은 결코 무너지지 않는다. 어떤 고난 앞에서도 존엄성을 놓지 않고, 로체스터와의 인연에서도 단순히 기대고 의존하는 사랑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키는 독립적이고 강인한 사랑을 꽃피운다. 마침내 모든 걸 잃은 로체스터를 제인의 온전한 의지로 다시 선택할 때, 두 사람의 사랑은 얕은 감정의 표면을 넘어 깊고 굳은 뿌리를 갖게 된다. 이처럼 상처에서 비롯된 아픔은 제인과 로체스터의 사랑을 한층 더 단단하게 다져주는 비옥한 흙이 된다.


스토아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아모르파티’, 즉 운명마저 사랑하는 태도 역시 이러한 성장을 응원한다. 고난마저 끌어안으며 삶의 평온함을 얻는 그 자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에서도, 산티아고 노인은 험난한 바다에서 거대한 청새치와 외로운 싸움을 이어가며, 스스로의 한계를 마주하고 그 끝을 조금씩 넘어선다. 사랑도 이처럼, 상처와 고통과의 싸움 속에서 비로소 진짜 힘을 얻고, 점점 더 본연의 빛을 내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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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금이 간 도자기를 잇는 킨츠기(Kintsugi)다


셋째, 상처는 금이 간 도자기를 잇는 킨츠기(Kintsugi)다. 깨진 도자기에 금이나 은으로 금을 메우는 일본의 예술, 킨츠기는 상처 입은 그릇을 버리기보다, 오히려 그 흠집 자체를 새로운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는 지혜를 담고 있다. 마치 사랑의 상처도 그렇다. 도자기에 남은 금이 그러하듯, 우리 또한 그 상처를 감추고 싶어 지지만, 용서와 치유라는 마음으로 그 자리를 황금빛으로 이어 붙인다면, 그 흔적 위로 한층 더 깊고 독특한 이야기가 깃든, 그래서 전보다 더 소중한 사랑이 완성된다. 애초의 상처가 사랑만의 특별함이 되는 역설이 여기 있다. 사랑은 흔히 귀한 도자기에 빗대어진다. 정성 깃든 손길과 마음으로 빚어지는 예술품처럼, 사랑 역시 섬세한 감정과 소중한 약속, 풋풋한 희망이 쌓여 완성되는 관계의 걸작이다. 그 형태는 참으로 맑고 고우나, 한순간의 실수나 뜻밖의 충격 앞에서는 너무나 쉽게 금이 가거나 산산이 부서질 수 있다. 가장 순수하고 맑은 감정인 사랑이 오히려 너무 여려서, 조그만 오해나 삐걱거림에도 쉽게 상처 입고 균열이 이는 모습은, 아름다운 백자가 작은 충격에도 쨍하고 금이 가는 순간과 닮았다.


사랑의 도자기 위에 드리워진 금의 흔적, 그건 관계가 겪어낸 상처와 좌절, 해결되지 못한 갈등과 배신의 아픔의 자국이다. 이 금은 피상적인 상처가 아니라, 온전했던 표면을 가르며 사랑의 형상마저 위태롭게 만드는 마음의 균열이다. 우리는 종종 이런 금을 덮어두거나 애써 외면하려 한다. 완벽하던 도자기가 금이 간 현실에 닥쳐올 때의 낙담, 아름답던 사랑이 상처 입은 채 드리워진 실망감이 마음의 구석마다 그늘처럼 번지기 때문이다. 이때 사랑은 제 빛을 잃고 하나의 파편으로 흩어질 위기에 놓인다. 하지만 킨츠기의 비유는 치유와 용서, 그리고 새로운 창조의 힘을 조용히 일러준다. 킨츠기는 단순히 깨진 그릇을 이어 붙이는 기술을 넘어선다. 부서진 조각을 내던지지 않고, 그 금 간 틈마저 황금이나 은으로 매만지는 과정에서, 평범했던 도자기는 이전보다 깊고 새로운 아름다움을 입는다. 사랑에서 이 비유를 적용하면, 상처를 감추거나 지우려 애쓸 필요 없이 오히려 상처의 흔적을 용서와 이해, 인내와 깊은 애정이라는 황금빛 마음으로 하나하나 메워가는 과정이 된다. 그 길에는 관계를 회복하려는 의지, 상대의 아픔을 부드럽게 감싸는 손길, 그리고 불완전함마저도 껴안고자 하는 진심이 스며 있다. 그렇게 황금으로 메워진 선은 지나간 상처를 잊지 않으면서도, 그 아픔마저 새로운 아름다움의 일부로 환하게 품어 안는 숭고한 창조의 순간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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킨츠기로 다시 태어난 도자기는 결코 예전 모습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다. 오히려 금빛으로 번지는 새로운 선들이 더해지면서, 그 위에 남은 상처의 자국이 고유한 무늬와 깊이 있는 이야기로 피어난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그 도자기는 이제 부서졌던 지난 시간을 고스란히 품고, 그 모든 아픔을 견디고 일궈낸 복원의 흔적까지 켜켜이 담아낸다. 그 결과,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독특한 아름다움과 가치를 얻게 된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상처를 딛고 다시 이어진 사랑은 옛날의 순수함에 머물지 않는다. 서로의 불완전함을 인정하고 끌어안은 지혜, 함께 아픔을 견뎌낸 강인함, 그 시간 속에서 쌓인 깊은 신뢰와 유대감이 사랑을 한층 특별하게 만든다. 금빛으로 메운 상처의 결은 이제 사랑의 흉터가 아니라, 두 사람이 함께 써 내려간 아름다운 고난의 역사가 된다. 다시는 깨어지지 않겠다고 다지는 굳건한 약속의 징표, 그 자체인 셈이다. 이런 사랑은 단순한 기쁨과 만족을 넘어, 고통마저 온전히 품어 안는 영원한 고유성과 심오한 아름다움을 안겨준다. 결국 상처를 킨츠기에 비유하는 것은, 완벽만을 좇던 사랑이 어느 순간 부서지고 깨어졌을 때—그 불완전함을 외면하지 않고, 용기와 다정함으로 껴안음으로써 오히려 더 깊고 찬란한 사랑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처럼 섬세하게 그려내는 일이다. 상처란 결코 끝이 아니며, 오히려 새로운 아름다움이 태어날 토양이라는 뜻이다.


킨츠기는 결점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며, 그 과정을 통해 전혀 다른 가치를 만들어내는 역설의 미학을 품고 있다. 상처와 결핍이 사랑을 더욱 깊고 유일한 세계로 이끌고, 이전과는 다른 모습으로 완성시키는 순간을 문학에서 보여준 작품으로 조지 엘리엇의 《미들 마치》가 있다. 주인공 도로시아는 늘 이상적인 삶과 사랑을 꿈꾸지만, 현실은 종종 크고 작은 상처로 답한다. 특히 첫 결혼의 실패와 환멸은 그녀에게 깊은 흔적을 남긴다. 그러나 도로시아는 그 아픔을 통해 한 인간의 나약함과 따뜻한 이해심을 배우게 되며, 세상의 불완전함을 받아들이는 너그러움을 얻는다. 그리고 결국 서로의 상처를 다정하게 감싸주는 리드가이트와의 관계 속에서, 그녀의 흠집과 상처들은 오히려 금빛 킨츠기처럼 사랑을 더욱 독특하고 완전하게 빛내준다. 그녀가 겪은 불완전함이야말로 사랑을 더 깊고 넓게 만들어주는 새로운 출발점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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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겨울을 이겨낸 꽃봉오리다


넷째, 상처는 겨울을 이겨낸 꽃봉오리다. 한 해의 모든 영양분을 응축하고 기다림의 시간을 견뎌내야만 비로소 만개하는 꽃처럼, 상처는 사랑이 꽃피우기 위한 혹독한 겨울과 같다. 차가운 바람과 얼어붙는 추위 속에서 꽃봉오리는 쉬이 피어나지 못하지만, 이 인고의 시간은 꽃의 색깔을 더 선명하게 하고 향기를 더 깊게 만드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상처를 통해 사랑은 인내와 성숙의 시간을 거치며, 그 결과로 피어나는 사랑은 단순한 설렘을 넘어선 감동적인 아름다움을 지니게 된다. 사랑의 시작은 언제나 여린 꽃봉오리와 같다. 봉오리 속에 아직 다 펼쳐지지 않은 무수한 꽃잎들처럼, 사랑은 미지의 아름다움과 무한한 가능성을 품고 시작된다. 갓 움튼 새싹처럼 신선하고 희망적이지만, 동시에 외부의 작은 바람에도 쉽게 흔들리고, 서리에도 얼어붙을 수 있는 더없이 연약한 존재다. 관계가 맺어질 때의 설렘과 기대, 함께 만들어갈 미래에 대한 약속들이 이 꽃봉오리의 섬세한 모습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는 아직 만개하지 않았지만, 언젠가 활짝 피어날 고귀한 아름다움을 예비하고 있는 사랑의 태초적 순간이다.


상처가 드리우는 혹독한 시련과 정체를 겨울에 비유하는 이유가 있다. 사랑은 늘 따뜻한 봄볕 아래 머물지 않는다. 때로는 매서운 겨울을 맞이한다. 여기서 겨울은 사랑이 겪는 상처와 고난, 침묵, 그리고 고통스러운 정체의 시간을 은유한다. 차가운 바람은 의심을, 얼어붙는 대지는 외로움과 단절을, 길고 어두운 밤은 절망을 상징한다. 상처는 사랑의 꽃봉오리가 더 이상 피어날 수 없을 것 같은 혹독한 시련을 안겨주며, 때로는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 듯한 절망감에 빠뜨린다. 모든 색채가 사라진 듯한 무미건조한 시간 속에서, 사랑의 숨결마저 끊어진 듯한 고통이 이 겨울이라는 이름으로 찾아든다. 하지만 꽃봉오리는 겨울 동안 그저 얼어붙어 있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는 침묵하고 고요한 듯 보이지만, 그 안에서는 살아남기 위한 처절한 싸움과 견고한 인고의 시간을 보낸다. 차가운 공기 속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며, 다음 계절을 위한 영양분을 응축하고, 뿌리를 더 깊이 내린다. 이 겨울을 이겨내는 과정은 사랑이 상처 속에서 무너지지 않고, 고통을 회피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아픔을 통해 자신을 성찰하고 강화하는 시간과 같다. 이 시기 동안 사랑은 얕은 감정을 넘어선 본질적인 가치를 깨닫고, 서로에 대한 진정한 이해와 인내심을 기르게 된다. 마치 고독한 철학자가 겨울밤을 지새우며 진리를 탐구하듯, 상처는 사랑에게 깊은 내면의 힘을 기르고, 관계의 의미를 재확립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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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를 통해 얻은 영롱하고 진실한 사랑은 만개의 즐거움 속에서 잠시 잊히는 것처럼 느껴진다. 혹독한 겨울을 이겨낸 꽃봉오리는 마침내 봄을 맞아 만개할 때,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선 영롱하고 진실한 아름다움을 선보인다. 상처라는 겨울의 풍파를 겪어낸 꽃은 이전보다 훨씬 선명한 색깔을 띠고, 더 깊고 그윽한 향기를 뿜어낸다. 악조건의 날씨를 이겨낸 단풍이 상처받으며 더욱 아름답게 빛나듯이 겨울의 추위를 겪으며 단련된 줄기와 꽃잎은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을 강인한 아름다움을 갖추게 된다. 마찬가지로 상처를 겪고 피어난 사랑은 찰나의 뜨거움이나 단순한 설렘을 넘어선다. 그것은 고통을 함께 견뎌낸 두 영혼의 역사와 지혜가 담긴, 훨씬 더 견고하고 깊이 있는 사랑이다. 상처의 흉터는 사라지지 않겠지만, 그 흉터는 이제 사랑이 겪어낸 인고의 증표가 되어 관계에 숭고한 깊이를 더한다. 겨울을 이겨낸 꽃봉오리가 지닌 생명력처럼, 상처를 통해 더욱 성숙해진 사랑은 더는 외부의 작은 흔들림에 무너지지 않는, 본질적이고 영원한 아름다움을 지닌다.


이 은유는 상처가 사랑의 종말이 아니라, 오히려 그 사랑을 더 큰 차원으로 이끌고 만개하게 만드는, 역설적이지만 필연적인 과정임을 시적으로 강조한다. 겨울이 없는 봄은 허약하듯이, 상처 없는 사랑은 진정한 깊이를 알기 어렵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 인간의 삶이 순환하며 성장하는 과정에서 겨울과 같은 고통의 시기는 필연적으로 따르며, 이는 오히려 더 큰 성장을 위한 디딤돌이 된다. 많은 시인들이 겨울의 인고를 이겨내고 피어나는 봄꽃에서 희망과 재생의 메시지를 찾듯이, 사랑 또한 상처를 통해 더욱 생명력 넘치고 깊이 있는 의미를 획득한다. 사랑이 혹독한 겨울과 같은 고통의 시간을 견디며 더욱 풍성하고 아름답게 만개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문학 작품 중에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을 들 수 있다. 장 발장의 삶은 법과 사회의 냉대, 그리고 끊임없이 자신을 쫓는 자베르 경감으로 인한 고통의 연속이다. 그는 팡틴의 딸 코제트를 사랑으로 보살피고, 마리우스와 코제트의 사랑을 이루어주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다. 이 모든 과정에서 겪는 희생과 고통은 마치 매서운 겨울과 같다. 하지만 그 겨울을 이겨낸 끝에 피어나는 그의 헌신적이고 숭고한 사랑은 어떤 로맨스보다도 깊고 감동적인 꽃이 된다. 그의 사랑은 추운 겨울을 겪고 더욱 단단해진 꽃봉오리처럼, 마침내 만개하여 세상을 따뜻하게 비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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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는 의미를 새기는 시간의 인장이다


다섯째, 상처는 의미를 새기는 시간의 인장이다. 상처는 그저 아픈 기억 하나로만 남지 않는다. 사랑이라는 여린 관계 위에 시간이 스며들면서, 마치 지워지지 않는 인장처럼 깊은 의미가 새겨진다. 그리고 그 인장은 단순한 흔적을 넘어선다. 그 안에는 사랑의 역사, 함께 견뎌 온 고통, 이겨낸 시간의 무게 같은 것들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그래서 이 상처가 남긴 인장은, 사랑이 어떤 과정을 겪었고, 얼마나 소중한 의미를 품고 있는지 말해주는 확실한 증거인 셈이다. 유리처럼 얄팍한 만남이 아닌, 서로 깊은 유대감을 맺게 만드는, 관계만의 특별한 표식이기도 하다. 상처는 존재의 표면에 길게 드리워지는 날카로운 틈과도 같다. 때론 굳건하고, 때론 흐물거리는 사랑의 표면 위로, 이 상처는 마치 조각칼처럼 깊숙이 흔적을 남긴다. 단순히 살갗을 스치는 순간의 아픔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오히려 관계의 핵심을 관통하는, 속살 깊이 파고드는 균열이며, 마음 한편 부드러운 피부결에 날 선 흔적으로 남는 상처다.


돌멩이가 깎이고 다듬어지며 제 모습을 찾아가듯, 상처는 보이지 않던 사랑이라는 존재에 특정한 모양과 그림자를 드리운다. 바로 이 순간, 사랑은 머릿속의 추상적 관념이 아니라, 거침없는 현실 속에서 마주해야만 하는 실체로 모습을 바꾸게 된다. 인장, 곧 영원의 증표이자 고유함의 인증. 고대부터 인장은 계약이나 소유를 증명하고, 편지 한 장에 권위를 불어넣는, 쉽게 지워지지 않는 표식이었다. 사랑에서도 상처가 인장이 된다는 건, 그 아픔이 단순히 먼 옛 기억으로 사라지지 않고, 관계의 현재와 미래를 송두리째 흔드는 영원한 표식이 됨을 의미한다. 이 인장은 “우리 사랑이 이런 고통을 겪어냈다”는 진실을 또렷하게 각인시킨다. 상처의 인장이 찍힌 사랑. 이제 그 사랑은 결코 피상적일 수 없다. 고난을 견디고 버텨낸, 단 하나뿐인 관계만의 정체성을 얻게 된다. 마치 순수했던 사랑의 첫 순간이, 이 인장 하나로 깊이와 무게를 더해 영원한 서명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 인장은 결코 잠깐의 낙인이 아니다. 상처가 남긴 각인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의미와 무게를 점점 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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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픔을 견딘 그 시절, 상처와 함께 한 시간, 치유를 향한 다짐과 같은 것들이 한 겹 한 겹 쌓이며, 인장의 형태를 또렷하게 완성한다. 처음엔 흐릿하던 감정도 시간이 지나는 사이, 점차 선명한 의미로 농축된다. 함께 쏟은 눈물, 깊은 밤 나눈 이야기, 끝없는 용서와 포기의 반복—이 모든 순간들이 인장의 무늬를 한 조각씩 채워나간다. 이렇듯, 시간은 상처를 지워주는 약이 아니다. 오히려 그 상처라는 인장을, 사랑의 역사 속에 한층 더 깊게 새겨 넣는 숙성의 시간이 된다. 결국 이 인장은 사랑의 연대기가 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비추는 나침반이 되기도 한다. 인장은 사랑의 의미를 곱씹게 만드는 비유일 뿐 아니라, 때로는 사랑의 본질을 새롭게 써 내려가는 행위이기도 하다. 결국 상처라는 시간의 흔적을 몸과 마음에 각인한다는 건, 곧 사랑이란 무엇인지 다시 묻는 일이다. 상처는 사랑이 어디까지이고, 어디서부터가 아닌지를 우리에게 뚜렷하게 알려준다. 누구나 고통을 지나면서 비로소 진짜 헌신, 무조건적인 이해, 존재 깊숙한 곳에서 이어지는 유대감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 이전엔 겉으로 드러난 관계에서는 절대 알 수 없었던, 어둠 속 심연에서 건져 올린 사랑의 참된 얼굴이 마침내 상처라는 인장을 통해 형태를 얻는 것이다.


이 깨달음은 그저 머리로 이해하는 차원을 넘어서, 온몸으로 겪고 배우는 일이다. 상처란 결국 사랑을 살아가며 전신으로 받아들이는 통과의례인 셈이다. 여기서 사랑은 더는 장밋빛 환상이 아니다. 아픔과 시련을 견디며, 한층 강인해진 현실의 힘으로 변모한다. 상처의 인장은 ‘우리가 이렇게나 버텨냈기에, 이 사랑은 이제 더 이상 예전과 같을 수 없다’고 조용히 외친다. 결국 그것은 과거의 미완을 뛰어넘어, 두 사람만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가는 증표가 된다. 이렇게 새겨진 의미는 그 어떤 말로도 온전히 담을 수 없는, 오직 두 사람이 시간과 아픔을 함께 견디며 쌓아 올린 단 하나의 영혼의 이야기다. 그래서 상처란 겉으로만 아는 사랑을 넘어, 고통과 시간이라는 강렬한 매개를 통해 관계의 내밀한 의미를 영원히 새기는, 가장 깊은 인장인 것이다.


사랑이 겪은 상처가 단순한 아픔을 넘어, 관계의 역사와 존재를 깊이 새기는 인장으로 남게 되는 순간―이 장면을 그려낸 문학작품으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있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은 결국 비극적인 상실과 죽음, 가장 깊은 상처로 막을 내린다. 하지만 두 연인의 짧고 불꽃같았던 사랑은, 그저 사라져 버린 허상으로 남지 않는다. 오히려 두 가문의 오랜 앙금과 갈등은 자식들의 죽음이라는 깊은 상처를 통해 종결되고, 그 아픔은 몬터규와 캐플릿 양쪽 모두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흔적으로 남는다. 이 상처는 화해와 새로운 질서의 조짐을 알리는 인장이 되어, 이제 더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음을 품은 채 모두의 영혼에 새겨진다. 두 사람의 사랑은 짧았지만, 그들이 남긴 상처의 깊이만큼이나 오래 기억되며, 시대를 넘어선 강렬한 의미의 인장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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