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없이 사랑해야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희망은 절망보다 더 절망적인 종신형이다

희망 없이 사랑해야 진면목을 만날 수 있다


“어떤 사람을 아는 사람은 희망 없이 그를 사랑하는 사람이다”(99쪽). 발터 벤야민이 《일방통행로》에 남긴 말이다. 희망 없이 누군가를 사랑할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 눈앞에 드러난다는 뜻이다. 희망 없이 사랑한다는 건, 상대에게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대로의 그를 껴안는 일이다. 보통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 그 사람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길, 내 기대를 채워주길, 혹은 더 괜찮은 사람으로 변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아니, 적어도 내 사랑을 어느 정도는 돌려받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런 ‘희망’—내 욕망과 기대—를 모두 내려놓고 사랑할 때, 비로소 그 사람의 진면목을 제대로 마주하게 된다고 벤야민은 말한다. 그렇게 마음을 비우면, 신기하게도 상대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내가 그려낸 환영이나 기대가 아니라, 그의 본모습과 그림자까지도 껴안게 되는 순간이 찾아온다. 이것이 바로 벤야민이 말하는 ‘진정으로 안다’는 경지 아닐까. 희망이라는 안경을 벗어야만 비로소 명확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이 통찰은 다른 영역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 진짜 아는 사람은, 희망 없이 글쓰기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뿐이다.”(257쪽) 황진규의 《스피노자, 자연스러운 삶을 위한 철학》에 실린 문장이다.


lights-9595813_1280.jpg


희망 없이 사랑해야 온전히 몰입할 수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희망 없이 사랑한다는 건, 그 자체에 온전히 몰입한다는 뜻이다. 글을 쓸 때라면, 이 글이 베스트셀러가 되면 어쩌나, 누군가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잠시 내려놓고, 오직 글을 쓰는 행위에만 집중하는 것이다. 한 단어, 한 문장을 붙잡고 의미를 찾아 헤매는 괴롭고도 아름다운 여정 자체를 사랑하다 보면, 글쓰기를 통한 깨달음에 한 발씩 다가서게 된다. 마치 보르헤스가 상상한 미궁을 설계하듯, 글쓰기라는 미로 속을 헤매는 그 과정 자체에 빠져드는 기쁨. 희망을 놓아버리고 글쓰기와 마주할 때, 우리는 마침내 글쓰기의 가장 밑바닥, 그 본질에 다가선다. ‘잘 쓰는 법’이나 ‘유명해지는 법’ 같은 기술적 희망이 아니라, 도대체 글을 쓴다는 행위가 우리에게 무슨 의미인지, 왜 그토록 반복해서 쓰고 싶은 충동이 생기는지와 같은, 근원적인 질문과 고통스럽게 씨름하다 보면, 어느새 글과 글쓰기의 맨얼굴과 맞닥뜨리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 안에서 글쓰기의 아름다움은 물론 한계마저도, 온전히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희망이라는 족쇄에서 벗어나면, 세상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자유도 주어진다. ‘잘 써야만 한다’는 압박이나 ‘실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해방되어, 오롯이 쓰는 나와 써지는 글만 남아 그 순간을 진하게 살아낼 수 있다. 마치 만화 속 주인공이 극한의 경험 끝에 자유를 얻는 장면처럼, 희망 없는 사랑은 창작자에게 오히려 역설적 자유를 선사하는 법이다. 결국 벤야민의 말은, 어떤 대상이든 내 욕망과 기대를 투영하지 않고 순수하게 마주할 때 비로소 그 진정한 의미와 얼굴을 알 수 있다는 깊은 통찰이다. 글쓰기든, 사람이든, 예술이든, 내가 가진 목적의 도구로 여기지 않고 그 자체로 사랑할 때, 그 안에 담긴 깊은 지혜와 마주하게 된다는 메시지다.


lights-9595813_1280.jpg


희망은 절망보다 더 절망적인 종신형이다


“희망이란 말이 세계의 폐허가 완성되는 것을 가로막는다… 희망은 종신형이다.” 김승희 시인의 ‘희망이 외롭다’라는 시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먼저 “희망이란 말이 세계의 폐허가 완성되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말은, 희망이란 것이 우리가 완전한 절망, 즉 모든 것이 다 무너진 폐허의 상태를 받아들이는 걸 끝끝내 허락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희망이 없다면, 우리는 어쩌면 모든 걸 포기하고 깊고도 고요한 절망 속으로 곤두박질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 작은 희망의 불씨가 끈질기게 우리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폐허 속에서마저 완전히 가라앉지도, 반대로 단순한 평화에 닿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 머무르게 된다. 어쩌면 폐허가 완성되는 순간이 오히려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일 수 있겠지만, 희망은 그 완성을 허락하지 않고 자꾸만 나아가라고 등을 민다. 결국 “희망은 종신형이다”라는 표현이 이런 역설적인 상황을 딱 집어낸 것이다.


이 시에서 “희망이 종신형”이 되는 첫 번째 이유는, 바로 희망이 영원히 끝나지 않는 명령과 같기 때문이다. 시인은 “희망이 우리에게 그것들을 견디고, 끝끝내 살아남으라고 명령한다”라고 말한다. 이 명령은 우리가 숨이 다할 때까지 이어진다. 마치 밖에서 들려오는 형벌이 아니라, 우리 안에서 끊임없이 속삭이는 목소리와도 같다. 평생 우리는 희망이라는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고, 무언가를 기다리고, 고통을 견디라는 요구를 계속 떠안고 살아가게 된다. 진심으로 모든 걸 단념하고 싶을 때조차도, 마음 한 자락엔 아주 작은 희망이 잔류한다. “폐허가 완성되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표현처럼, 완전한 체념이나 평온에 닿으려 해도, 희망이라는 집착이 자꾸만 발목을 잡는다. 이 희망은 누군가가 밖에서 강제로 씌워준 형벌이 아니라, 우리 존재 깊숙이 뿌리내린 족쇄다. 사람이 사람인 이상,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숙명이다. 이 벗어날 수 없는 속박이 바로 ‘종신형’이라는 무거운 단어로 다가온다.


희망이 종신형이 되는 두 번째 까닭은, 희망이란 것이 극심한 외로움의 동반자이기 때문이다.

희망이란 말은 입 안에서 굴러다니지만, 정작 희망다울 만한 희망은 좀처럼 우리 곁에 다가서지 않는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희망이라는 이름 하나만 움켜쥐고 외로이 살아간다. 이건 마치, 아무도 오지 않는 감방에서 끝 모를 희망을 하염없이 기다리는 사람과도 같다. 그 절대적인 외로움마저 종신형이 되어 우리의 삶에 들러붙는다. 이상과 현실 사이, 메울 길 없는 틈이 크게 자리 잡은 세상에서 우리는, 항상 ‘저 너머 어딘가’를 향해 희망을 품고 또 품는다. 희망은 그저 존재한다는 이유만으로도, 지금 여기에 머무는 우리를 앞으로 내몰아 버린다. ‘더 나은 것’은 늘 손에 닿을 듯 말 듯 우리를 애태운다. 한 가지 희망이 이루어졌다고 해도, 사람은 곧 또 다른 희망을 찾아 나선다. 전보다 훨씬 더 커다란 꿈, 더 대단한 갈망만이 남는다. 이런 끝없는 바람과 기다림이, 결국 우리를 외로움이라는 종신형으로 가둬놓는다. 만족이라는 종착역은 끝내 오지 않고, 우리는 멈춤 없는 기차를 타고 다음 역, 그다음 역을, 오늘도 외로운 승객처럼 달려간다.


christmas-background-1926414_1280.jpg


희망은 끊을 수 없는 족쇄다


희망이 종신형처럼 느껴지는 세 번째 이유는, 희망이 결코 쉽게 끊을 수 없는 족쇄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희망 없음’의 현실을 인식하더라도, 희망을 완전히 버린다는 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누구나 마음 한구석엔 ‘혹시나’ 하는 적은 가능성을 붙들고,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다. 이 ‘혹시나’는 결국 평생 우리 곁을 맴도는 족쇄가 되어, 우리가 스스로 자유로울 수 있지만 오히려 자발적으로 감옥에 갇힌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만든다. 희망 때문에 마음 편한 날이 좀처럼 오지 않고, 항상 무언가를 바라며 괴로워하고, 쉽사리 포기하지 못하며 희망에 사로잡혀 살아가게 된다. 희망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라’, ‘곧 더 나아질 것이다’, ‘끝내 극복할 수 있다’고 속삭인다. 이런 속삭임은 때로 축복처럼 느껴지지만, 한편으론 편히 쉬거나 완전히 내려놓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한다. 마치 시지프스가 영원히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처럼, 우리 역시 희망이라는 바위를 평생 굴려야 하는 존재다. 이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이 바로 종신형과도 같은 무게로 다가온다. 만약 희망이 전혀 없다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희망이라는 가능성은 우리를 끊임없이 현재의 불완전함과 미래의 불확실성 속으로 몰아넣는 역할을 한다.


김승희 시인은 희망이 늘 긍정적이고 밝은 것만은 아니라는 점, 오히려 우리를 영원히 고통과 외로움의 자리로 이끄는 잔인한 측면도 있음을 시를 통해 드러낸다. 희망이 없으면 오히려 더 평안할 수도 있지만, 희망이라는 이름 아래 평생 무엇에 매달리고 버텨야 하는 종신형을 선고받은 셈이다. 결국 희망감옥에 갇혀 살아가는 우리에게, 시인은 슬쩍 석방의 메시지를 건네고 있다. 그래서 “남들은 절망이 외롭다고 말하지만/나는 희망이 더 외로운 것 같다”는 김승희 시인의 고백이 더욱 절실하게 와닿는다.


hands-1838658_1280.jpg


희망은 고착된 거울이자 영원한 미완의 조각상이다


발터 벤야민이 말하는 희망 없이 사랑하는 사람과 김승희 시인이 말하는 종신형으로 작용하는 희망에 비추어 희망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은유적 사유를 시도해 본다. 첫째, 벤야민의 희망 없는 사랑과 김승희 시인의 종신형 희망은 각각 고착된 거울과 영원한 미완의 조각상이다. 벤야민의 ‘희망 없는 사랑’은 고착된 거울이다. 벤야민이 말하는 ‘희망 없는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나의 기대나 소망으로 왜곡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완벽하게 인식하는 상태를 말한다. 마치 아무런 그림자나 왜곡 없이 대상을 있는 그대로 비추는 ‘고착된 거울’과 같다. 이 거울은 대상을 변화시키려 하지도 않고, 어떤 미래의 모습으로 만들려 하지도 않는다. 단지 현재의 나를 투명하게 반영할 뿐이다. 여기에 희망이 개입한다면, 거울에 김이 서리거나 덧칠이 되어 대상의 본질을 흐리게 만든다. 희망 없는 사랑은 이처럼 순수한 인식과 전적인 수용의 공간을 만든다. 희망이 없기에, 오직 존재 자체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만이 남는다.


이에 비해 김승희 시인의 ‘종신형의 희망’은 영원한 미완의 조각상이다. 김승희 시인의 희망은 완성을 가로막고 끊임없이 우리를 묶어두는 ‘영원한 미완의 조각상’과 같다. 이 조각상은 결코 완성될 수 없다. 완성의 직전에 놓일 때마다 희망은 더 나은 형태, 폐허를 면한 모습을 약속하며 우리의 손을 잡아끌고, 새로운 조각을 시작하게 부추긴다. 하지만 이 새로운 조각도 결국은 또 다른 미완으로 끝난다. 마치 영원히 마스터피스를 만들려는 조각가가 결코 만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깎아내고 덧붙이기를 반복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 과정이 ‘종신형 희망’이다. 완전한 폐허라는 절망적인 완성(어쩌면 안식)에 이르지도 못하게 하고, 그렇다고 완벽한 아름다움이라는 희망의 끝에도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끝없는 조각 행위 그 자체에 머물게 한다. 희망은 이처럼 우리를 미완의 상태에 영원히 가두는 도구인 셈이다.


chinese-998917_1920.jpg


희망은 명징한 해탈이자 끈끈한 거미줄이다


둘째, 벤야민의 희망 없는 사랑과 김승희 시인의 종신형 희망은 각각 명징한 해탈과 끈끈한 거미줄에 비유할 수 있다. 벤야민의 사랑 없는 사랑은 명징한 해탈이다. 벤야민의 문장에서 희망 없음은 일종의 해탈과도 같다. 모든 기대를 버리고, 모든 집착을 내려놓는 명징한 해탈의 경지다. 욕망과 기대가 사라진 자리에 비로소 순수한 형태의 이해와 수용이 돋아난다. 일반적인 희망은 ‘이것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바뀔 것이다‘라는 욕망의 옷을 입고 있다. 그런데 그 옷을 벗어던지면, 비로소 대상의 본모습이 드러나고, 그 존재 자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깊은 사랑에 다다르는 길이 열린다. 어쩌면 모든 것이 완성되고 무위(無爲)에 이르는 것, 거기서 비로소 고통 없는 사랑이 가능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한편 김승희 시인의 종신형 희망은 끈끈한 거미줄이다. 김승희 시인의 희망은 우리를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두는 ‘끈끈한 거미줄’ 같은 속성을 지닌다. 이 거미줄은 죽음의 폐허 속으로 완전히 떨어지지 않게 붙잡아주는 역할도 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서 빠져나갈 수 없게 만드는 족쇄이기도 하다. 우리는 희망이라는 끈적한 실타래에 얽혀서, 완전히 무너지지도, 그렇다고 자유롭게 날아가지도 못한다. 계속해서 아등바등 거미줄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지만, 그 몸부림조차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는 영원한 감옥에 갇힌 꼴이다. 마치 날개가 꺾인 나비가 거미줄에 갇혀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상태와 비슷하다.


ai-generated-8657656_1920.jpg


희망은 고독한 산정이자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이다


셋째, 벤야민의 희망 없는 사랑과 김승희 시인의 종신형 희망은 각각 고독한 산정과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에 비유할 수 있다. 벤야민의 사랑, 곧 희망조차 허락하지 않는 그 마음은 마치 세상과 멀찍이 떨어진 산 꼭대기 같다. 희망 없이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건, 모든 세속의 번뇌와 기대를 훌훌 털어내고 혼자서 고즈넉이 산정에 서서 세상을 내려다보는 일과 다르지 않다. 아래에서 소란한 감정들—복잡한 인간관계며 기대며, 실망 같은 안개의 층위들—은 차츰 걷히고, 결국 남는 것은 오롯한 대상과의 맑은 마주침뿐이다. 그 높이에서 마주하는 사랑은 더 이상 미래에 대한 투사도, 과거에 대한 미련도 아니다. 그저 이 순간, 존재의 결을 예민하게 느끼는, 지고하면서도 고독한 깨달음의 자리일 뿐. 그곳엔 희망이라는 번잡한 감정이 스며들 틈 따윈 없다.


반면, 김승희 시인의 종신형 희망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그림자다. 그녀의 시에 드리운 희망이란 인간 존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늘 곁에 붙어 다니는 그림자와도 같다. 어떤 태양빛이 내리쬐더라도 그림자가 반드시 생기듯, 사람이 살아 숨 쉬는 한 희망이라는 감정은 결코 소멸하지 않는다. 이 그림자는 때로는 우리 뒤를 말없이 지켜주고, 어딘가로 이끌어주는 듯하지만, 동시에 영원히 따라붙으며 몸과 마음을 지치게도 만든다. 완전한 휴식을 허락하지 않는, 말 그대로 종신형의 동반자이자 빼놓을 수 없는 감시자의 얼굴이랄까. 빛이 있으면 반드시 그림자도 존재한다는 역설처럼, 인간에게 삶이 있는 한, 희망 역시 그림자처럼 늘 우리 곁에 머물며 결코 놓아주지 않는다는 잔혹한 진실을 말한다.

candle-1144728_1920.jpg


희망은 녹슬어가는 닻이다


두 시인의 통찰 끝에는 이런 공명이 잔잔하게 남는다. 희망이란 건 단순히 긍정과 행복만을 상징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인간 존재의 깊은 비극과 모순, 그리고 결코 벗어날 수 없는 내면의 굴레까지 은근하게 비추는, 어쩌면 가장 고독하고, 또 잔인한 은유라고 속삭이는 듯하다. 두 사람의 희망에 관한 은유적 사유는 오히려 희망의 절망적인 그림자를 더 또렷이 드러낸다. 예를 들어, 희망은 녹슬어가는 닻에 비유된다. 닻은 배가 표류하지 않도록 바다 밑바닥을 단단히 붙잡아 주지만, 깊은 심해 속 시간과 염분에 조금씩 갉아먹힌다. 처음에는 모든 무게를 견디던 쇳덩이가, 서서히 녹이 번져가며 힘을 잃어간다. 언젠가 ‘툭’ 하고 끊어져 버릴지 모른다는 불안, 혹은 이미 쇠약해진 닻이 나를 더 이상 붙들지 못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마음속에 차오른다. 희망이란, 절망의 바다로 한 번에 떨어지지 않게 잡아주는 존재이면서도, 그 희망조차 영원하지 않다는 예감이 우리의 내면을 서서히 침식하는 아이러니한 구원이다. 때로는 이런 불안이, 차라리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체념해 버리는 것보다 더 깊은 고통으로 가슴을 짓누를지도 모른다.


또 다르게 바라보면, 희망이란 끝없이 반복되는 꿈이라는, 어쩌면 역설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다. 꿈은 현실에서는 닿을 수 없는 갈망을 잠시나마 달래주거나, 때론 잊고 있던 상상력을 슬그머니 일깨운다. 그런데, 만약 매일 밤마다 똑같은 꿈을 꾸면서도, 매번 꿈이 이루어질 듯싶은 절정의 순간에 깨어나 버린다면 어떨까. 그 순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편에 서늘한 먹구름이 몰려오듯, 서서히 절망이 스며들기 시작한다. 꿈이 찬란하고 간절할수록, 현실로 돌아왔을 때의 허탈감도 더 깊게 파고든다. 희망이란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언젠가는 이루어질 거야’라는 달콤한 속삭임에 이끌려 우리는 밤마다 또다시 꿈을 꾼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꿈이 완전히 현실이 되는 날이 좀처럼 오지 않아, 비극 같은 반복만 남는다. 아침에 눈을 뜨는 매 순간이 작은 절망의 연속일 뿐이다.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꿈은, 끝도 없는 기대 속에서 소진되고 또 좌절하게 되는 절망의 순환을 곱씹게 만든다. 꼭 시시포스가 바위를 산 위로 밀어 올리지만 번번이 굴러 떨어지고 마는 그 신화처럼, 성취 직전의 찰나마다 다시 출발점으로 되돌아오는 영원한 형벌을 연상케 한다.


clouds-2909266_1920.jpg


희망은 지울 수 없는 낙인이다


희망은 사막 한가운데서도 마르지 않는 샘물과 같다. 타는 듯한 모래밭 한복판, 그 푸른 샘은 곧 생명과도 맞닿아 있는 희망의 또렷한 상징이다. 그런데 만약, 이 샘이 아무리 퍼올려도 물이 마르지 않고, 계속해서 솟아나는데, 그 맑고 시린 물을 들이켠다 해도 목마름이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면 어떨까. 도리어 마실수록 갈증은 깊어지고, 샘물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 걸음은 점점 더 지쳐간다. 여기서 희망의 역설이 또렷이 모습을 드러낸다. 희망은 우리에게 구원의 약속처럼 다가오지만, 그 완성은 도달할 수 없는 저 너머에 머물러 있다. 샘은 결코 마르지 않지만, 우리의 갈증 역시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이 샘 앞에서 계속 목이 마르고, 그 갈증에 이끌려 끝없는 사막을 걷는다. 그리하여 희망이라는 환상은 오히려 끊임없는 목마름, 영원히 채워지지 않을 결핍으로 우리를 이끈다.


희망이란 단 한 번의 순간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영원히 반복되고, 벗어날 수 없는 속박처럼 우리 삶을 지배한다. 마치 종신형을 선고받은 죄수처럼, 희망은 끝이 보이지 않는 여정이 되고, 도망칠 수 없는 굴레가 되며, 좀처럼 마르지 않는 고통의 근원이 된다. 결국 희망은 지울 수 없는 낙인처럼 존재의 심장에 새겨진다. 우리는 그 낙인을 떼어낼 수도, 잊을 수도 없어, 매일 아침 뜨거운 숨결로 다시 한번 고통을 깨닫는다. 희망은 그래서, 우리를 살아가게도 하지만 결코 만족에 다다를 수 없게 만드는, 아이러니하고도 깊은 상처가 된다. 밀실에서 갈구하는 희망은 허망한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할 수 있다. 광장의 소요와 소란과 부딪치며 극복하는 야생성이 희망의 자생력을 높이는 밑거름이 된다. 광장의 야성없는 밀실의 지성은 지루하고 밀실의 지성없는 야성은 야만이다. 진정한 전달은 광장의 야성을 고독한 밀실의 지성으로 벼리는 가운데 자기만의 언어로 광장을 지휘하는 야전 아우성이다.


전달자 변화1.png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사랑은 잼이 아니라 샐러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