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얼룩’에서
‘희망의 누룩’을 노래하다

전달의 실패는 인생의 실패다

‘절망의 얼룩’에서 ‘희망의 누룩’을 노래하다:

전달의 실패는 인생의 실패다


세상 끝 벼랑에 걸린 위태로운 언어들

칼바람 맞아가며 실핏줄까지 곤두 세운다

비통한 흔적, 바람에 흩날려 휘발되지만

맞바람에 부딪혀 앙갚음으로 되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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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빛에 마른 눈물

달빛에 희석된 울분과 격분 사이

밤의 적막으로 흐릿해진 분노와 적개심

사유를 잃은 사연은

오늘도 동맥을 타고 흐른다


뉘우침의 냄새에는 반성의 기미보다

또 다른 반격의 기회를 엿보는

의심과 반전이 꽈리를 틀고

기도를 거듭하며 기세를 안으로 삭힌다


완성된 실수로 끝나기를 바라지만

실수는 늘 실패로 마무리되고

깊게 파고드는 격앙과 앙금의 파도는

여지없이 가슴 한가운데에서 철렁인다


후벼파는 언어가 폭력을 등에 엎고,

피습당한 냉가슴을 얼음처럼 굳혀버리는 사이

뜨거운 술기운을 쫓아 목젖을 할퀴며

식도를 따라 제 갈길로 갈지(之)자로 흘러간다


새벽 창가에 맺힌 한 바탕의 내전 얼룩

밤 사이 성에로 덮어씌워지지 않고

서늘한 상처가 그림자위에서

밤잠을 설치던 절치부심의 흔적으로 새겨져 있다


무심코 눈길이 간 흩날리는 낙엽

끝내 참지 못하고 자기 몸을 뒤틀며

몸부림으로 항거하지만

허공을 향해 흔적도 없이 휘날린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자기 주장의 정당함은

트럭으로 실어날라도 끝이 없고

가슴에 박히는 못질과 무분별한 발설은

영혼을 갉아먹는 숙주로 번식중이다


눈이 시릴 정도로 한파가 밀려든 적막한 겨울밤

깊은 수련 끝에 가라앉은 앙심

언제 휘젓고 나타날지 모를 앙금이

끊어질 듯 이어지는 숨을 쉬며 졸고 있다


밤새 문풍지를 떨며

시커멓게 태워버린 배신의 늪

깨져버린 유리창처럼 앙금으로 얼룩진 신뢰(信賴)

어느 새 실례(失禮)의 가면을 쓰고 가로 누워있다


후미진 골목 구석구석마다

헐값으로 팔려나가는 상처받은 언어가

혹한의 눈보라를 피해 숨죽이며

나를 세우지 않고 날을 세우고 있다


위로와 격려로 격한 감정 달래는 안타까움

피곤한 문자공격 피하려는 안간힘

쏟아지던 소낙비가 멈추듯 멈추지 않고

언어의 화살은 여전이 과녁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빗발치듯 심장을 관통한다


언어가 분노를 만나

울분의 바다를 이룰 때

약속으로 이어진 숱한 인연의 끝은

야속의 산맥을 타고 흐르다

깊은 고랑을 만들며 하늘높이 치솟는다


서러운 그늘을 가리는 그림자

비어져 나오는 비통한 사연 틀어막고

머릿속으로 파고들어간 심장박동

가위눌린 채 순간의 기억에 자주 비명을 지른다


발효되지 않고 핏발로 서린 몸부림의 기억

보이지 않는 사연의 뒤안길을 걷다

돋보기 너머로 희석된 어둠의 심연을 들여다본다


땀흘려 가꾼 사랑과 옳음의 터전위에

뽑아도 자라는 이름모를 풀처럼

되풀이되는 소문과 풍문의 맥락없는 기억은

다리도 건너지 않고 어쩔 줄 모르다

해석조차 하기싫은 곤란한 의미를 심장에 꽂는다


‘차라리’와 ‘어치피’ 사이에 흐르는 넋두리와 하소연

넋을 잃고 하염없이 하품을 토해내며

방황하는 길위에서 오늘도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골목길을 흐느적거리며 새벽이슬을 맞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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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울인 정성이 영원히 기울져도

믿었던 기대가 산산조각나도

함께 가꾸어온 산물(産物)이 신물이 나도

불안한 앞날을 벗삼아 가던 길을 걸어간다.


평생을 읽어도 읽어내기 어려운

밤하늘의 별 도서관

난해한 감정 고전의 의미가 무엇인지 물어보고

새로운 느낌의 신간에게도

풀리지 않는 분(憤)과 노(怒)와 한(恨)의

숨겨진 의미를 되새기며 물어본다.


여전히 그리고 아직도 버리지 못하는 믿음은

긴 시간 받은 고통의 흔적이

씨줄의 고랑에서 새싹을 틔우고

모든 기억의 순간을 발효시켜

아름다운 추억으로 소생시키는

누룩의 힘이다


상처는

사랑의 얼룩이 아니라

누룩이다(구병모의 《절창》 중에서)


희망과 용서의 숨결로

잊지 못할 추억을 직조하는

생각의 내밀한 근육이

사유의 저력으로 자랄 수 있음을 믿는다


희망은 절망의 얼룩이 아니라

누룩이라는 믿음과

앙갚음의 깊이가 갚음의 미덕으로 돌변하는 기적이

단순한 소망으로 끝나지 않고

냉담한 서릿발도 녹이는 경이로운 전율감과

온기품은 정감으로 회생기를 바란다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기형도의 ‘정거장에서의 충고’ 중에서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절망의 얼룩에서

희망의 누룩을 노래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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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셀로나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쓰고

몬세라트 성당 야경을 배경으로

2026.1.25일의 밤이 26일 새벽으로 건너가기 전에


P.S.: 《전달자》출간 한달만에 2쇄에 돌입했습니다. 전달의 실패는 인생의 실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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