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보나의 낡은 성벽 위,
버려진 뒷골목의 말을 찾아 모아
저마다의 비밀코드를 해독해서 밝혀 보지만
상식을 뒤덮은 몰상식이
일상을 지배하며 여전히 식상함을 배반하지 않는다.
시간의 켜가 쌓인 벤치에 걸터앉으면
푸른 지중해는 도도히 출렁이는 과거의 뉴스를 안고
어제와 같은 파도로 출렁이는데
배반당한 언어들이 반항의 깃발을 내리지 않고
어둠의 그림자를 짓밟으며 저녁 노을을 잉태한다.
불안감은 가시지 않고
불확실성의 시간은 시도때도 없이 급습하고
어둠의 이불을 덮고 뒤척이며 기다리다
새벽이슬이 먼동의 체온에 녹아내려야
정해진 쓰임새를 거부하는 반항이 시작된다.
기약이 없는 이별이 매일같이 반복되고
가망이 없는 미래가 무겁게 앞을 가려도
멈춤은 미덕이 되지 않음을 믿으려는
발버둥으로 지금도 저 멀리서 나를 향하고 있다.
적의 침입을 막으려 돌을 쌓던 이 높은 곳
이제 나는 보이지 않는 침입자를 경계하며
정신 없는 삶이 만드는 관습과 타성의 늪을 생각한다.
성찰을 지워버린 속도와 능률복음의 찬양
역사의 맥락을 끊어낸 단절의 파도,
그 거센 물결 앞에 지식은 계산하고
지혜는 데이터 축적으로 역할을 대신한다.
시름을 부둥켜안고 하룻밤을 지새워도
낙엽에 쌓인 서글픈 그리움은
여전히 추위에 떨며
추억의 백지에 번역되기만을 기다리는
알 수 없는 시 한 구절을 싣고
먼바다를 가르는 거대한 배들은
쉼 없이 미래를 향해 고동을 울린다.
매번 맞이하는 우리들의 일상이
매일 경이로운 기적처럼
행복하지 않을 수는 있어도
보잘것없는 보행이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위대한 행보로 다가오는 기적을 믿는다.
바람 타고 쓸려간 상처 속의 신음도
우리들의 인생 악보를 구성하는
찬란한 슬픔의 화음으로 재생되는
작지만 감동적인 위력을 또한 믿는다.
하늘에 갈매기 날고
땅위에는 개미가 기어가도
발밑의 거친 돌들이 속삭이는
‘오래된 미래’는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복음이다.
인생의 시기마다 우리가 겪어내는 쇠락의 전주곡은
현재를 비추는 거울로 성찰을 촉구하며
어제와 다른 생각의 옷들이
언어의 동맥을 타고 흐를 때마다
삐뚤어진 감정으로 울분을 토하며
어지러운 언어를 벼리고 벼려서
삶의 풍파 따라 흐르는 선율로 노래한다.
의식의 흐름을 방해하는 바람이 차고 거세지만
고독한 사색의 시간을 멈출 수 없는 까닭은
자신이 만든 허상의 요새 속에 갇히지 않기 위해서다.
격랑의 파도에 새겨진 고단한 생의 발자국이
휘몰아치는 눈보라에 지워져도
새벽 찬 이슬 맞으며 땅바닥에 엎드려
그 자리를 지키내려는 요새의 족적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삶을 건축해왔다.
망각의 바다 위로 성찰의 닻을 내리며
나는 비로소 내일로 가는 지도를
시시각각 바뀌는 현실의 지형을 토대로
다시 고쳐 그리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2026.1.31.일 이탈리아 사보나 프리마르 요새(Fortezza del Priamar) 정상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