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이 붉게 물드는 이유를 우리는 끝내 모를지라도

진리란 완전한 답이 아니라 완전한 질문이 되는 까닭은?

단풍이 붉게 물드는 이유를 우리는 끝내 모를지라도:

진리란 완전한 답이 아니라 완전한 질문이 되는 까닭


“나뭇잎 지는 까닭은 다 알 수 없고, 다 안다 해도 끝내 내가 모르는 최후의 까닭 하나가 있을 것이며, 그 하나가 가장 결정적인 까닭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그리고 무엇을 서서히 알아가다 보면 끝내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고 끝내 알 수 없을 것이라는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다. 절망의 나락에서 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직관의 세계가 열릴 것이고, 진리란 완전한 답이 아니라 완전한 질문임을 알게 될 것이다.” 남덕현의 《한 치 앞도 모르면서》의 작가의 말에 나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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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덕현 작가의 글을 읽다 보면, 우리는 어느새 진리와 인간 존재의 뿌리를 향한 근원적인 질문 앞에 선다. 나뭇잎이 왜 떨어지는지, 마치 모든 이유를 다 아는 듯해도 마지막 한 가지, 결국 우리가 끝내 알지 못하는 그 작은 ‘까닭’이 남는다. 그리고 바로 그 작은 ‘까닭’ 하나, 우리가 미처 닿지 못한 원인이야말로 진리의 핵심일지도 모른다는 믿음은 우리에게 낯선 시선을 건넨다. 남 작가의 글이 던지는 ‘진리는 완전한 답이 아니라 완전한 질문’이라는 이 한마디엔, 단순한 명제가 아닌 오래된 삶의 숨결이 담겨 있고 진리는 영원한 미완성임을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는 인식의 명제다.


우리는 늘 ‘왜’라는 물음에 명쾌한 답을 찾아 헤매곤 한다. 나뭇잎이 지는 이유를 생물학적으로 분석하고, 우리 삶에서 불행과 행운이 어디서 비롯됐는지 인과의 실마리를 붙잡으려 애쓴다. 어쩌면 ‘완전한 답’만이 불안을 잠재우고 우리를 진리에 가깝게 해 줄 거라 굳게 믿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어 뒤척이며 찾는 그 정답이 때로는, 오히려 우리를 단단한 틀에 가두는 감옥이 되어버리곤 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오만이 꺾이는 순간, 우리는 어둡고 깊은 ‘절망의 나락’에 떨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떤 이들은 그 끝에서 오히려 새로운 빛을 목격한다고 말한다. 작가가 부르는 ‘직관의 세계’는 바로 여기, 대답할 수 없음에서 찾아온다.


첫째, 진리는 인간의 한계와 무척이나 가까이 붙어 있다. 세상의 모든 현상과 원인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설명할 수 없다는 것, 그것은 결국 세상 자체가 언제나 불확실성 속에서 부단히 변화를 거듭하고, 이전과 차원이 다른 수준으로 확장되어 가는 미완성의 흐름 속에 있기 때문이다. 나뭇잎이 지는 이유쯤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몰라도, 그 속에서 일어나는 작고 복잡한 생태계의 움직임과 우주의 미세한 이치까지 우리 눈에 전부 담아낼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게 인간의 인식은 늘 불완전함에 머무르기 마련이고, 진리는 어디까지나 늘 열린 가능성으로 존재하며 어제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안간힘의 산물이다. 가까이 가면 더 멀어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리가 품고 있는 진의를 알아내기 위해 오늘도 탐구의 손길을 멈추지 않고 부단히 변신을 거듭하며 진리의 빛을 향해 진군하는 것이다.


둘째, ‘완전한 질문’으로서의 진리는 결국 우리로 하여금 탐구와 성찰의 길을 계속 걷게 만든다. 만약 진리가 완벽한 정답이라면, 어쩌면 우리는 어느 순간 더 이상 묻지 않게 될지 모른다. 진리는 하나의 ‘정답’이 아니라, 끊임없이 다가서는 ‘질문’의 모습으로 다양한 해석을 통해 찾아가는 일리 있는 해답일 뿐이다. 정답은 명사로 존재하지만 해답은 동사다. 누군가에는 정답이 될 수도 있지만 또 다른 사람에게는 적절한 답이 아니기 때문에 상황에 알맞은 답은 끊임없이 다른 가능성을 품고 찾아 나서야 할 역동적인 흐름이다. 정답을 찾았다고 생각하는 순간도 사실은 화두로 떠오른 일부만 설명할 수 있는 부분적인 답일 뿐이다. 오히려 “진리란 질문이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답이 아닌 질문 속에서 삶의 의미를 발견하고, 그 불확실함 안에서 한 걸음 더 자신을 들여다보게 된다. 진리는 뚜렷한 답변을 주기보다는, 우리를 한 번 더 멈춰 세우고 다시 묻게 하며, 그 과정에서 점점 더 깊어지고, 성숙해진다.


셋째, 절망과 희망, 그리고 직관적 깨달음에 관한 작가의 고백은 진리 탐구의 역설을 역설하고 있다. 진리를 완전히 인식하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하니, 진리 탐구 여정에서 부단히 찾아오는 완벽한 앎의 불가능성 앞에 수시로 찾아드는 깊은 절망감에 익숙해져야 한다. 하지만 바로 그 절망 이후에, 이전과는 다른 문 곧 직관과 영감의 문이 열린다. 가던 길이 막히거나 생각대로 풀리지 않는 문제에 직면하면 이전과 다르게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의 문이 열린다. 앞으로도 못 가고 뒤로도 못 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는 옆으로 가면 또 다른 길을 찾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처럼 말이다. 결국 진리는 물음의 왕국 속에서, 끊임없이 새로운 이해와 감정, 절망 앞에서 희망을 찾으려는 발버둥으로 우리에게 다가오며, 단순한 논리나 이성의 영역에서 정체된 명사 형태로 머무르지 않는다. 진리가란 끝내 완성될 수 없는 삶의 문턱을 넘는 특별한 과정, 쉼 없이 이어지는 물음과 깨달음의 여정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자연과 인생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발견하는 진리의 본질은 우리에게 겸손과 동시에 경이로움을 일깨워 준다. 나뭇잎 하나가 낙엽으로 스러질 때, 그 안에서 펼쳐지는 신비로운 변화처럼, 우리 삶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질문들로 가득하다. 열길 물속은 과학적 탐구 기술로 알아낼 수 있지만 한 길 사람 속은 쉽게 이해할 수 없는 영원한 질문의 왕국이다. 질문을 던져 놓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역지사지로 헤아려보는 인문학적 탐구는 절망 앞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며 부단히 질문이 인도하는 길로 걸어가는 여정이다. 그래서 진리는 확정된 결론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하나의 질문이며, 우리 존재를 조용히 들여다보고, 다시금 새로운 물음을 찾게 만든다. 이 질문 안에서 우리는 천천히 삶의 본질에 다가가게 되고, 결국 그 과정, 흔들리고 헤매는 그 길 위에서 진리의 속내를 엿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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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이것이다.” 한 번 그렇게 정의해 버리면, 탐구의 길은 막히고 대상은 그저 박제가 되어버린다. 정답이 찍히는 순간, 마침표 너머에는 상상의 여지가 더 이상 남지 않는다. 닫힌 정답의 세계에는 질문도 같이 실종된다. 정답은 닫힌 문이다. 정답의 세계에서 물음은 금기사항이다. 닫힌 정답의 문을 열어가는 방법은 질문이다. 질문은 언제나 열린 문이다. “이것은 무엇일까?”라는 물음은 오히려 우리를 영원한 현재에 머무르게 한다. 진리가 ‘완전한 답’이 아닌 ‘완전한 질문’에 깃드는 까닭은, 바로 이 질문만이 우리를 삶이라는 신비 앞에 고요하고 겸허하게 세워두기 때문이다. 단풍잎 하나가 어째서 지는지, 정말로는 모른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서야 우리는 그 마지막 붉은빛을 머뭇거리며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 이때 우리는 ‘직관’이라는 창을 통해 비로소 세상을 새롭게 읽어내기 시작하는 문이 열리는 셈이다.


삶이라는 것은 한 치 앞도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어딘가 두렵고 막막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만약 우리가 내일 일어날 일과 자신의 운명을 이미 모두 알고 산다면, 가을 오후 우연히 마주한 단풍의 선명한 붉음조차 기대치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삶이라는 거대한 미지의 세계에 던져진 ‘질문자’다. 진리는 정복해야 할 목표가 아니라, 끝없이 물으며 놀라고 감탄하는 여정에서 어제와 다르게 부단히 자신의 진리를 스스로 부정하며 거듭나는 흐름이자 움직임이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기에 오늘이, 이 순간이, 우리에겐 언제나 다시 태어나는 기적으로 다가온다. 마치 단풍잎은 왜 붉게 물들다 흩날려야 하는지 끝내 몰라도, 그 추락이 마냥 아름다운 것처럼―.


이처럼 진리가 완전한 답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완전한 질문으로 남는 이유는 우리가 마주한 세상이 끝없이 열려 있고, 인간 인식의 한계와 그 너머의 미묘한 깨달음이 뒤섞인 깊고도 풍부한 실존의 흐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은 한 걸음 앞을 내다볼 수 없어 더욱 아득하고 황홀하며, 우리가 던지는 매 순간의 질문들 속에서 비로소 자신과 진리를 조금씩 더 가까이 만날 수 있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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