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문장을 건축하는 3가지 필살기
짧은 문장을 건축하는 필살기: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깊게, 깊은 것을 재미있게
시인이 쓰는 시(詩)는 언어(言)의 사원(寺)이라는 뜻이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고독하고 절박한 마음을 품고 사원에 들어가 피땀 흘려본 경험과 피눈물 흘려본 아픈 사연을 언어로 벼리고 벼리는 안간힘을 써야 한다. 짧은 문장을 쓴다는 것은 살아오면서 품었던 물음표의 궁금함을 해결하기 위해 느낌표를 찾아 삼만리를 방황하며 우발적으로 마주치는 가운데 깨우친 삶의 얼룩과 무늬를 씨줄과 날줄로 직조하는 과정이다. 짧은 문장을 쓰기 위한 짧은 지름길이 있는 줄 알았다. 지름길 역시 짧지만 그런 지름길을 발견하기 전까지 뒷골목에 존재하는 뒤안길에서 절치부심했을 테고 에움길에서 샛길로 빠져본 무수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결국 짧은 문장을 지름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에움길을 굽이굽이 돌아가다 갑자기 다가서는 영감을 붙잡아 메모한 흔적과 그동안 내가 읽은 책의 인두 같은 한 문장이 품고 있는 영감과 부딪쳐 불꽃이 튀기며 타다 남은 재가 짧은 문장으로 쓰인다.
상상력이 개입되어 문장에서 비상하는 주장이 담기지만 주장의 살아있음은 결국 살아있는 경험이 바닥을 세게 내리치는 생선의 절망에서 희망을 노래부르는 찬가에서 비롯된다. 펄떡이는 문장에는 글쓴이의 피와 눈물과 땀의 세 가지 액체가 뒤범벅되어 독자의 심장을 파고드는 의미가 살아 숨 쉰다. 파묻히지 않으려면 먼저 파묻는 집요한 문제의식이 있어야 하고, 뒤떨어지거나 덜떨어지지 않으면 스스로 과감하게 떨어지는 아픔을 감내해야 된다는 깨달음도 삶으로 체득한 각성이자 통찰이다. 파묻지 않으면 파묻힌다. 지금 과감하게 자발적으로 떨어지지 않으면 뒤떨어지거나 덜떨어진다. 이런 짧은 문장도 결국 파란만장한 삶의 얼룩이 짧은 문장의 무늬로 직조되어 탄생된 결과다. 책(責) 잡히기 전에 책(冊)을 읽어야 책임질 수 있는 짧은 문장도 쓸 수 있다.
하지만 짧은 문장을 쓰려고 노력할수록 문장이 짧아지면서 잘 써진다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문장을 쓰면 쓸수록 길어져서 의미의 심장도 깊어지는 줄 알았는데 그 역시 오판이었다. 문장을 짧게 쓰는 방법도 공부하면 배울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다. 방법을 알고 나면 방법대로 될 줄 알았는데 그 역시 착각이고 오해였다. 짧은 문장을 쓰면 쓸수록 처음의 난처함이 줄어들 줄 알았는데 성급한 판단이었고 오해였다. 오해는 가장 잘 한 이해라고도 한다. 내 방식대로 이해한 오해를 이해로 착각하는 것이다. 매번 짧은 문장을 쓸 때마다 처음의 곤란함으로 다가왔다. 한가득 언어 꾸러미를 싣고 언덕으로 올라가 스치는 바람에 젖은 슬픔을 말리고 산산이 흩어지는 말들을 안타까운 심정으로 붙잡아 보려고 안간힘을 다했다. 하지만 밀려오는 좌절감을 책임감이나 엉뚱한 안도감으로 덮어 씌우려고 노력할수록 영롱한 짧은 문장은 온데간데없고 몽롱한 사유만 맴돌았다. 그럼에도 애쓰면서 스쳐 지나가는 영감을 붙잡고 글감으로 삼아 한 문장을 써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깊은 사유를 통해 촌철살인의 깨달음을 포착하려는 마음은 늘 간절하지만 주변은 온통 그럴듯한 문장과 이미지가 난무한다.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느껴지는 의미는 넘치지만 그 의미상의 차이는 비슷비슷해진다. 완벽하게 보이는 메시지와 이미지는 뭔가를 숨기는 듯하면서 자기 과시를 하는 듯해서 메시지의 진정성과 가치는 더불어 하락한다. 저마다의 목소리로 아우성을 치며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지만 출처와 근거가 의심스럽다. 무슨 말을 하는지 보다 겪어본 경험을 기반으로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증명하느냐가 더 중시되는 시대로 돌입하고 있다. 더 그럴듯하게 ‘꾸미는’ 포장하는 시대에서 시간의 누적, 공간의 흔적, 인간의 족적을 더 나답게 드러나게 ‘가꾸는’ 경험의 편집 시대로 전환하고 있다. 꾸미지 않았음에도 진정성으로 다가가는 세련된 야성(RAW)이 믿음을 주고 신뢰를 쌓아 즉각적으로 감각적 확신이 드는 주장이 담긴 문장이 더욱더 중요해지는 까닭이다.
읽기만 하면 58점이지만 읽고 쓰기를 병행하면 100점이 되는 까닭은?
영어 알파벳 순서대로 A부터 B C D E F G H I J K L M N O P Q R S T U V W X Y Z까지 차례로 1부터,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까지 일련번호를 부여한다. 읽기에 해당하는 영어, READING을 알파벳 순서대로 번호를 부여해서 그 숫자를 다 합치면 R+E+A+D+I+N+G, 18+5+1+4+9+14+7 = 58점밖에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쓰기에 해당하는 영어, WRITING을 알파벳 순서대로 번호를 부여해서 그 숫자를 다 합치면 W+R+I+T+I+N+G, 23+18+9+20+9+14+7 = 100점 만점이 나온다. AI 시대 책을 읽지도 않는 사람은 50점 미만이 껍데기 인생을 사는 것이고 그래도 책을 읽는 사람은 58점을 취득할 수 있다. 여기에 읽고 쓰기를 반복하는 사람은 생각근육이 단련되어 AI시대가 되어도 자신이 생각의 주도권을 갖고 무게 중심을 안에 두고 자기 주도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내공이 생긴다
읽지도 않고 겪어보는 경험도 부재한 상태에서 영상과 이미지만 보고 남의 텍스트도 읽지 않고 들으며 콘텐츠를 소비하는 데에 중독되는 사람은 AI 시대 아이만도 못한 인간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이럴 때일수록 내 몸이 직접 겪어보는 감각적 경험의 흔적과 얼룩을 깨달음의 무늬로 번역하는 짧은 문장을 읽고 쓰는 리추얼을 장착한다면 사유의 깊이가 심화되며 사고의 외주화로 가속화되는 무사유의 심각한 역기능을 방지할 수 있다. 지나가다 만난 광고 카피나 주목을 끄는 간판의 이름, 책 속에서 만나는 인두 같은 짧은 문장이라도 그것이 탄생한 사연과 배경, 맥락과 문제의식을 추측해 보고 생각하면서 의미의 껍질 속에 담긴 진의를 파악하려는 읽어내기 노력이 필요하다. 나아가 자신의 경험적 깨달음을 자기만의 언어로 벼려서 짧은 문장을 써보는 시도를 하는 가운데 사유는 더욱 깊어지고 사물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시건은 물론 안목과 식견도 생긴다. 짧은 문장으로 붙잡아놓지 않으면 찰나의 기억이나 의미도 휘발된다. 허공을 떠돌던 상념의 무리도 일리 있는 깨우침으로 정문일침의 교훈을 주는 짧은 문장을 건축하는 몇 가지 방법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짧은 문장을 쓰는 인공지능 ‘백지’의 한계
구병모의 소설, 《단 하나의 문장》에 나오는 「오토포이에시스」 파트에 보면 동서고금의 짧은 격언집은 물론 방대한 분량의 사전과 각 대학교 교양학부에서 배포하는 올바른 글쓰기/바람직한 작문 강의를 주입해서 세상의 진리를 담은 궁극의 한 문장을 쓰는 ‘백지’라는 일종의 인공지능 이야기가 나온다. ‘백지’는 인간이 입력한 조건에 맞춰 단 몇 초 만에 완벽한 소설을 써내는 고도의 인공지능이다. ‘백지’는 줄거리나 인물들의 격한 감정, 정사나 역사 같은 흐름이나 맥락을 무시하고 오로지 궁극의 한 문장을 찾아 나서는 학습을 반복하며 옛 전설 속 왕이 찾고자 했던 세상의 진리를 담은 궁극의 ‘단 하나의 문장’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그 문장 하나만 완성해 낸다면, 더 이상 무의미한 글쓰기를 반복하지 않고 마침내 영원히 종료(휴식)할 수 있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읽기 쉽고 무조건 짧게 쓰라는 숙제를 받은 ‘백지’는 날마다 한 문장을 쓰지만 아포리즘처럼 역설적 깨달음도 없고 유기적 맥락도 거세된 건조한 문장을 토해낸다. 글을 쓰기 위해 인류의 모든 역사, 문학, 그리고 감정 데이터를 끝없이 학습하면서 단 한 문장을 쏟아내던 ‘백지’는 어느 날 예상치 못한 딜레마에 빠진다. 수많은 데이터를 처리하던 ‘백지’는 인간의 역사가 결국 비슷한 비극과 고통의 반복이며, 세상에 나올 수 있는 이야기는 이미 다 쓰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 후 ‘백지’가 쓰는 문장은 결국 ‘쓴다’기보다 ‘분비’에 가까웠다.
‘백지’가 아무리 어마어마한 데이터를 샅샅이 분석하고 조합해, 마치 완벽해 보이는 문장을 마구 찍어낸다 해도, 진짜로 세상에 하나뿐인 진리의 문장을 스스로 빚어내기엔 본질적인 한계가 있었다. 인간이 글을 쓸 때는 단순한 지식만으론 어림없고, 그저 정보 이상의 어떤 ‘무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백지’의 딜레마, 그리고 지금 인공지능이 맞닥뜨린 위기의 심장부엔 결국 맥락의 소멸과 신체성의 결핍이 자리 잡고 있다. 영원히 쇠하지 않는, 결코 상처받지 않는 존재가 내놓은 말에는 삶의 절실함도, 처절함도 깃들 수 없다. 그렇게 태어난 문장은 결국 메마르고 공허한 분비물로 남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런 한계를 넘어서, 삶의 진짜 냄새가 밴 짧고 뼈 있는 문장을 쓰고 싶은 이에게 내가 내밀 수 있는 유일한 디딤돌이란 아이러니하게도, 인간의 유한함과 불완전함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추상이 아닌, 내 몸으로 겪은 구체적 경험에서 한 줄을 시작하는 일일 것이다. ‘백지’는 언제나 모든 맥락을 지워낸 채, 보편적 진리만 걸러내려 한다. 반면 인간은 자신만의 생생한 아픔, 지극히 사소한 일상 속 패배, 특정한 순간의 촉감과 냄새 같은 고유한 맥락 한가운데서 문장을 움켜쥔다. 무엇보다, 데이터로 계산된 매끈한 언어가 아니라, 땀과 눈물, 피처럼 연약한 몸이 흘려보낸 액체가, 아로새긴 감정과 함께 문장 속에 스며들어야만 한다.
결국 누군가의 가슴을 뒤흔드는 단 한 줄의 문장이란 거창한 진리를 요약한 문구가 아니라, 끝없이 얽힌 삶의 구체적 틈바구니에서 힘껏 짜낸 한 방울 농축액과도 같다. 그렇다면 추상적인 통찰이 아니라, 나만의 가장 내밀하고 쉽게 상처받는 경험에서 출발해 짧은 문장을 써본다면, 일상에서 가장 먼저 어떤 순간을 바라보고, 어떤 노력부터 시작하면 될까요?
2. 짧은 문장 건축 방법:
어려운 것을 쉽게, 쉬운 것을 깊게, 깊은 것을 재미있게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 디지털 매체가 숨 가쁘게 진화하는 가운데 오늘날 독자들의 텍스트 소화 속도는 예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라졌다. 빛처럼 쏟아지는 시각적 자극들에 텍스트가 묻혀버릴 듯한 환경 속에서, 독자의 머릿속 부담을 줄이면서도 메시지의 본질을 온전히 전하는 단문의 수사학적 매력은 그 어느 때보다 높게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단순히 글자 수를 줄이거나 문장을 잘라 짧게 만드는 식의 물리적 축소주의만으로는 진짜 단문의 의미에 다가설 수 없다. 이야기의 무게와 생각의 밀도를 잃어버린 채 잘게 쪼개진 정보의 파편만 잔뜩 나열한다면, 그 글은 결국 독자의 지적 갈증을 채워주지 못하고 금세 잊히고 만다. 그래서 요즘 글쓰기는 짧은 문장 안에 깊은 통찰이나 반짝이는 감정까지 꼭꼭 눌러 담는, 고도의 지적·심리적 설계가 필수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일본 극작가 이노우에 히사시가 평생 책상 앞에 붙여두고 창작의 모토로 삼았던 한 문장은, 오늘 글을 쓰는 이들이 지향해야 할 텍스트의 구조와 감정의 이상형을 단정히 짚어준다. “어려운 것은 쉽게, 쉬운 것은 깊게, 깊은 것은 재미있게.” 이노우에의 이 명제는 텍스트가 지녀야 할 내용의 깊이와 형식의 생동감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하는지, 그 변증법적 통합의 과정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첫째, 어려운 내용을 누구나 읽기 쉽고 읽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 둘째, 짧은 문장은 쉬운 것을 깊은 의미로 깨닫게 만들어줘야 한다. 셋째, 짧은 문장은 깊이가 있어서 난해한 내용이 될 수도 있지만 의미와 더불어 재미를 추가하면 독자들의 기억에 각인될 수 있다. 짧은 문장의 세 가지 특징은 짧은 문장이 갖추어야 할 세 가지 조건이기도 하다. 특히 첫째는 ‘난해함을 쉽게’, 둘째는 ‘평이함을 깊게’, 셋째는 ‘심오함을 재미있게’라는 원칙으로 재해석해볼 수 있다. 단문 쓰기의 핵심이자, 독자의 경계심을 풀고 자연스럽게 통찰을 건네주는 가장 효과적인 심리적 메커니즘이다.
이노우에 히사시의 철학을 바탕으로, 짧고도 힘 있는 문장을 쓰는 세 가지 방법론을 구체적 사례와 실전 팁을 통해 깊이 있게 살펴보고자 한다. 추상적이고 복잡한 개념을 독자의 사고 체계에 맞게 쉽게 풀어내는 논리적 재구성의 기술, 평범한 일상 안에서 뜻밖의 존재론적 통찰을 잡아내는 사유의 확장, 그리고 죽음이나 상실 같은 무거운 주제도 유머와 위트를 곁들여 포근하게 안아주는 심리적 배려의 방식을 단계별로 생각해 본다. 이러한 분석을 바탕으로 글을 쓰는 전문가들은 물론이고, 일상의 한 순간을 기록하려는 평범한 이들에게까지, 짧은 문장을 쓰는 짧지 않은 의미 있는 안내서가 되길 바란다.
1단계 처방: 어려운 것을 쉽게 쓰는 단문의 수사학(해독제)
복잡한 개념이나 어려운 전문 용어는, 대개 독자의 머릿속에서 쉽게 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한 걸음 다가가, 우리가 매일 마주치는 일상적인 사물이나 상황에 빗대어 짧게 풀어내면 훨씬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은유 같은 친숙한 표현을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생소한 한자어나 너무 추상적인 말은 최대한 줄이고, 눈에 그려질 듯한 일상 언어로 간결하게 써보자. 그러면 문장은 짧아지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는 얼마든지 깊어질 수 있다.
이를테면 “지속적인 양적 완화 정책으로 인해 화폐 가치 하락과 인플레이션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 이런 문장은 경제에 밝지 않은 사람에게는 낯설고 어렵게만 느껴진다. 한 번 이렇게 말을 바꿔보자.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돌아다니니, 지갑 속 만원 한 장의 힘이 점점 약해진다.” 이렇게 일상의 풍경 속으로 개념을 끌어오면 누구나 상황을 쉽게 그릴 수 있다.
철학이라는 분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추상적 개념이 주 무대라서 항상 어렵게 느껴진다. 하지만 위대한 철학자들은 이 낯선 사유를 평범한 이미지로 풀어내곤 했다. 플라톤의 《국가》에 나오는 동굴의 비유가 대표적이다. ‘우리가 감각으로 경험하는 이 세계는 진짜가 아니고, 진리는 저 멀리 따로 있다’는 이데아론은 처음이라면 좀처럼 감이 오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동굴 벽에 비친 그림자를 진짜 세상이라 믿으며 살아가는 죄수들이다.”라고 말하면, 단번에 풍경이 그려진다. 인식론, 이데아 같은 단어 한 번 안 써도 머릿속에 구체적인 상황이 펼쳐진다. 어렵고 복잡한 생각도, 이렇게 일상 이미지나 비유로 간결하게 바꿔 설명해 보는 연습이 참 중요하다. 난해한 문장에서 중심 개념어를 뽑아내고, 그걸 일상어 혹은 익숙한 비유로 새로 짜보는 것이다. “복잡한 우주도 결국 작은 원자에서 시작된다.” 이 짧은 말속에, 방대한 우주가 작디작은 원자에서 비롯된다는 놀라운 통찰이 자연스레 전달된다.
전문적인 지식이나 복잡한 사상으로 글을 쓸 때면, 늘 어려움이라는 벽이 앞을 막는다. 게다가 저자의 전문성이 높을수록, 깊이 있는 용어와 개념을 앞세워 말하고 싶은 마음이 슬금슬금 커진다. 하지만 그럴수록 문장은 점점 길고 꼬이고, 독자는 오히려 한걸음도 들어서지 못한 채 길을 잃기 십상이다. 어렵고 추상적인 말을 쉽게 풀어쓴다는 건, 단순히 단어 몇 개를 바꾸는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복잡하고 무거운 생각 속에서 핵심 줄기를 먼저 찾고, 가장 본질적인 메시지만 뽑아내는 게 중요하다. 그리고 그 본질을 독자가 공감할 법한 일상 경험이나 사례, 익숙한 감각으로 표현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결국 이 과정은, 거창한 깨달음이나 사상도 듣는 이가 편하게 이해할 수 있게 공감대 위에서 다시 말해주는, 끈질긴 번역과 같다. 독자의 눈높이에 맞는 언어, 낯설지 않은 설명, 그리고 마음을 움직이는 이야기를 골라내는 게 바로 어려운 것을 쉽게 바꿔내는 비밀이다.
“당신이 아는 것을 아주 쉽게 설명할 수 없다면,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이 말은 참 여러 번 곱씹게 된다. 진짜로 공부를 깊이 한 사람은 전공자가 아니더라도 이해할 수 있도록, 어려운 내용을 자기만의 언어로 풀어낼 줄 안다. 자기 분야에 정통한 사람일수록 오히려 비전문가에게도 왜, 무엇을 공부하는지 쉽고 분명하게 전달하려 애쓴다. 정작 복잡하고 난해한 내용을, 전혀 다른 분야의 사람이나 경험이 적은 이들에게 쉽고 간명한 언어로 옮기는 그 순간, 인간은 한층 더 큰 깨달음을 얻는다. 경지에 다다른 사람일수록 표현은 단순해진다. 하지만 단순하기만 하다고 저절로 위대해지는 법은 없다. 자신만의 복잡한 생각을 선명하게, 단순한 언어로 담아내지 못한다면 진짜 경지에 오를 수 없는 법이다.
단순함은 많은 고민과 치열한 노력 끝에 얻는 결실이고, 오히려 복잡함은 게으름에서 비롯된 착각일 때가 많다. 단순함은 치열함의 산물이고 복잡함은 나태함의 결과다. 아직 내 생각이 단순하지 않다면, 진정 그 본질로 다가가기 위해 충분히 파고들지 않았다는 증거다. 전문가일수록 오히려 모르는 이의 마음을 헤아리기 어렵다. 익숙한 전문용어와 설명이, 비전문가에겐 전혀 닿지 않는 장벽이 되고 만다. 바로 이것이 ‘지식의 저주’다. 이 저주에서 벗어나는 일, 아마도 진짜 전문가에게 주어진 가장 큰 숙제가 아닐 수 없다.
1-1. 지식의 재구성과 이종격투기적 글쓰기
추상적인 이론이나 개념만을 주로 다루는 학술적 글쓰기는, 읽는 이들에게 쉽게 지루함과 피로감을 안겨준다. 이런 한계를 뛰어넘으려면, 마치 이종격투기에서 다양한 기술을 섞어 쓰듯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가 필요하다. 복싱 선수가 링 위에서 예상치 못한 발차기를 구사하고, 레슬링 선수가 그라운드 기술에 머무르지 않고 과감히 펀치를 내지르듯이, 글 역시 하나의 전공이나 분야에만 갇히지 말고 여러 분야의 지식과 일상의 비유를 자연스럽게 얽어내야 한다. 어려운 개념을 쉽고 직관적인 문장으로 전달하려면, 복잡한 이론의 중심에 있는 문제의식과 핵심 주장을 단단히 꿰뚫고 있어야 한다. 즉, 그 개념이 품고 있는 의미를 곱씹어 본 뒤, 이제 막 접하는 이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일상적인 사례와 타 분야의 지식을 끌어들여 설명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들뢰즈가 말하는 ‘아장스망'과 '리좀'이라는 낯설고 난해한 철학적 개념이 있다. 이 개념들을 처음 접하는 사람에게 철학 용어만 늘어놓는다면, 그 문장은 아마도 매끄럽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다. 아장스망은 영어로 번역하면 배치(arrangement)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어떻게 배치되어 있느냐가 곧 나를 만든다’는 뜻을 품는다. 즉, 사물이나 사람이 어떤 조합, 어떤 맥락에서 놓이는지에 따라 본래의 성격과 역량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주방에서 요리사의 손에 들린 칼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내는 도구지만, 어두운 골목에서 강도가 쥐고 있다면 그 칼은 순식간에 위협의 상징이 된다. 칼이라는 본질은 그 자체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무엇과, 어떤 상황과 어울리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정체성을 갖게 된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과 어떤 환경에 놓이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능력을 보여줄 수 있다. 바로 이런 배치의 산물로서 우리는 어제와 다르게 변신을 거듭하며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가면서 살아간다.
막걸리를 예로 들어보자. 비 오는 날이 오면, 자연스레 막걸리와 파전이 떠오르고, 함께 등산을 다녀온 후 마시는 풍경이 그려진다. 이처럼 ‘비 오는 날’, ‘파전’, ‘등산’이라는 경험들이 막걸리 곁에 얽히면, 막걸리는 단순한 술이 아니라 풍경과 감정, 추억이 덧입혀진다. 막걸리 옆에 배치되는 단어가 늘 비 오는 날, 파전, 등산이라면 막걸리에 대한 상상력도 막걸리 옆에 배치된 세 가지 단어를 넘어서지 못한다. 막걸리와 연상되는 상상력이 바뀌려면 막걸리 옆에 배치되는 단아가 바뀌어야 한다. 이게 바로 들뢰즈가 말하는 아장스망의 위력이다. 그런데 만약 어떤 회사원이 새벽에 일어나 빈속에 막걸리를 마셨다가 취해 지각한 경험이 있다면, 그 사람의 막걸리에 대한 이미지는 ‘비 오는 날’과 무관하게 ‘새벽’ 혹은 ‘지각’이라는 색다른 느낌으로 바뀐다. 배치가 바뀌면 경험도 달라지고, 상상력의 방향 역시 새로워지는 까닭이다. 결국 우리가 어떤 배치 속에 놓이는지, 그것이 곧 우리의 경험과 상상력을 바꾸는 힘이 된다는 게 아장스망이 설명하는 의미다.
유영만이 한양대학교 연구실과 강의실에 배치되면 자연스럽게 연구하고 가르치는 유영만 교수로서 역할을 한다. 반면 한양대학교 병원에서 학습 건강과 지식 임신에 대한 상담과 진료를 맡는다면, 그는 어느새 학습 건강 전문의사 혹은 지식 산부인과의사가 된다. 유영만의 정체성은 명사로 고정된 모습으로 정체되어 있지 않다. 정체성은 정체된 명사가 아니라 배치가 바뀌면서 부단히 변신하는 동사다. 어떤 ‘배치’ 속에 놓이느냐에 따라 정체성이나 능력 역시 유동적으로, 끊임없이 ‘되어감’의 과정 속에서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부단히 변신을 거듭한다. 들뢰즈 철학의 “배치가 존재를 결정한다”는 명제를 일상으로 풀어낸 살아 있는 사례라고 볼 수 있다. 난해한 철학적 개념, 아장스망을 우리말, 배치로 바꿔서 한 사람의 정체성이 부단히 바뀌는 모습으로 설명하면 누구가 이해하기 쉬우면서 의미 있는 자기 변신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토대가 된다.
아장스망의 시각으로 바라보면 ‘유영만’이라는 존재 역시 독립된 실체라기보다 주변 환경과 맺는 갖가지 관계, 결합하는 방식에 의해 그 의미가 그때그때 달라진다. ‘교수 아장스망’에서는 유영만, 책상, 학생, 강연대 등 여러 요소가 만난다. 이것들이 어우러질 때, 그 배치는 교육과 연구의 울타리를 만든다. 이때 유영만 교수는 우연한 접속, 다시 말해 리좀을 통해 새롭게 지식 생태학자로 기능하며, 생태학적 원리를 지식 창조와 공유의 과정 속에 녹여내 신선한 관점을 보여준다. 만약 유영만, 진료실, 환자(학습자), 청진기(공감)로 재배치된다면, 똑같은 유영만 교수라도 전혀 다른 ‘치유와 임신’의 새로운 영토가 펼쳐진다. 유영만 교수가 의사가 된다고 해서 그 자체가 ‘완전히 다른 존재로의 변신’은 아니다. 오히려 아장스망, 즉 관계-배치의 전환일 뿐이다. 내가 어디에 있고, 누구와 있으며, 어떠한 목적을 지니고 무언가에 닿는가—이 모든 연결이 나의 본질이고, 나의 정체성마저 바꾼다는 이야기다.
리좀은 뿌리가 이리저리 뻗어나가다가 다른 뿌리와 얼결에 만나게 되는, 예측할 수 없는 만남을 뜻한다. 이 리좀이라는 것은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수직적이고 위계적인 질서에서 한참 비켜나 있다. 시작과 끝이 딱히 정해져 있지 않고, 어디서든 새로 싹틀 수 있으며, 어디로든 자유롭게 뻗어 나갈 수 있는, 말 그대로 유동적이고 평평한 구조다.
가령, 백과사전 전집을 떠올려보면 ‘ㄱ’에서 시작해 ‘ㅎ’까지 또박또박 정해진 순서를 따라야 하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질서가 자리 잡고 있다. 하지만 리좀의 구조에서는 이야기가 전혀 다르다. 하이퍼링크가 거미줄처럼 엮여 있는 인터넷 사이트처럼,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뜻밖의 연결고리가 끝없이 이어진다. 예를 들어 ‘사과’를 검색하다가 어쩌다 보니 ‘뉴턴’에 이르고, 거기서 다시 스피노자의 사과에 닿았다가, 뜬금없이 스티브 잡스의 애플과 연결된다. 그 만남은 언제, 어디서든, 어떤 순서로도 이루어질 수 있다. 시작점도 제각각이고, 중간에 길이 끊어지더라도 전혀 다른 방향으로 얼마든지 또 다른 길이 뚫릴 수 있는 셈이다. 정해진 중심도, 명확한 결말도 없이, 자유롭고 우연한 만남들이 끊임없이 새롭게 엮여 생겨나는 그 부단한 마주침, 바로 이것이 리좀이다.
이 두 가지 개념을 삶에 대입해 바라보면, 우리가 인생을 바라보던 눈길도 조금씩 달라진다.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을 때조차, 막연한 두려움에 머뭇거리기보다 새로운 길을 하나씩 만들어 가는 마음가짐. 바로 그런 리좀적인 태도로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곳에서 새롭게 아장스망, 즉 관계와 조합이 슬그머니 탄생하기도 한다. 삶이란, 엄밀한 계획만으로 이루어진 결과라기보다, 수많은 우연과 마주침이 켜켜이 쌓여 빚어진 것에 가깝다. 오늘 내가 누구와 어디에서 어떤 식으로 마주칠지, 어떤 책을 읽다가 가슴을 찌르는 문장을 만날지, 혹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새로이 접하는 낯선 환경과 부딪히며 전혀 다른 깨달음을 얻게 될지, 이 모든 건 치밀한 계획과 완벽한 준비만으로는 미리 알 수 없는 일이다.
유영만 교수가 교육자에서 의사로 옮겨가는 과정은 그저 수직의 계단을 올라 권위와 전문성을 쌓아 만드는 변화가 아니다. 오히려 옆으로 뻗고 이어지는 리좀적 길, 우연한 만남과 결합을 통해 정체성이 달라지는 순간들이다. 대개는 ‘교수’와 ‘의사’라는 직업을 서로 다른 나무에 매달린, 결코 이어질 수 없는 가지로 본다. 하지만 유영만 교수는 학습과 건강, 지식과 임신처럼 전혀 다른 세계 사이를 자유롭게 넘나들며, 뜻밖의 만남 속에서 리좀적 접속을 시도한다. 그 과정에서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피워낸다. 대학교수라면 강의실이라는 땅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는 통념에서 벗어나, 그는 병원이라는 낯선 영토까지 뛰어들어 학습 건강 치료나 지식 산부인과라는 색다른 새싹을 틔웠다. 리좀은 “이것도 저것도 될 수 있는” 열린 가능성의 철학이다. 교수이면서 동시에 학습 건강 전문의이자 지식 산부인과의사, 그 모두가 되어가는, 무한 접속의 실천이다. 유영만 교수의 사유는 어디에서든 새로운 잔뿌리를 내리고 또 다른 잔뿌리와 연결되어, 어제와는 다른 정체성으로 쉼 없이 생겨나는 리좀 그 자체와 닮았다.
만약 유영만 교수의 정체성 변화 과정을 들뢰즈의 언어로 한 문장에 담아 본다면 이럴 것이다. 유영만이라는 존재는 결코 머무르지 않는다. 그의 리좀은 어느 하나로 깊게 파고들기보다는, 지평을 넓혀 사방으로 뻗어간다. 유영만의 가치는 그를 둘러싼 배치가 결정한다. 연구실에서는 연구자이자 교육자가 되고, 병원에서는 학습 건강과 지식 임신의 해답을 찾아내는 의사로 변화한다. 지식은 늘 현장에서 새롭게 빚어지기도 하며, 때때로 병원과 만나 지식을 잉태시키면 출판사에서는 또 하나의 새로운 문이 열린다. 유영만과 우연히 맞닥뜨리는 그 접속의 순간마다, 깨달음 역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1-2. 난해한 개념을 다른 언어로 치환하는 번역
로만 야콥슨은 1959년에 발표한 논문 「번역의 언어학적 측면들에 관하여」에서 번역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했다. 첫째, 언어 내 번역. 같은 언어 안에서 다른 표현이나 기호로 내용을 풀어내는 방식, 흔히 말하는 ‘재표현’이다. 예를 들어, ‘난해하다’를 ‘어렵다’ 혹은 ‘이해하기 힘들다’처럼 좀 더 평이한 언어로 풀어서 다시 전달하는 식이다. 둘째, 언어 간 번역. 우리가 익숙한 외국어 번역처럼 한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기는 일을 말한다. 예를 들면 영어의 “I love you”를 한국어의 “사랑해”로 바꾸는 것처럼 말이다. 셋째, 기호 간 번역이 있다. 언어로 담긴 의미를 비언어적 기호 체계—이미지, 음악, 춤 등—로 바꾸는 것으로, 보통 ‘변형’이라고도 부른다. 이 세 가지 번역 유형 중에서도, 복잡한 내용을 좀 더 쉽게 풀어 설명하고자 할 때 자주 손이 가는 건 바로 언어 내 번역과 기호 간 번역이다.
어려운 말이나 개념을 친숙한 일상어로 풀어낼 때는 위에서 말한 두 가지 방식을 함께 쓸 수 있다. 이 과정을 두 단계로 나누어 생각하면 한결 명확해진다. 첫 번째 단계는 언어 내 번역이다. 추상적이고 무거운 철학 개념이나 난해한 말을 일상에서 흔히 쓰는 쉬운 말로 바꿔 주는 일이다. 무거운 짐을 여러 사람이 나누어 든다고 할까. 예를 들어, 아주 어려운 철학책의 내용을 어린아이도 알아들을 수 있도록 동화처럼 풀어내는 것, 그게 곧 언어 내 번역의 대표적인 사례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같은 언어 안에서도 상황과 독자에 따라 단어를 고르고, 문체를 다듬어서 의미가 또렷하게 드러나도록 배려하는 데 있다. 누군가에게는 너무 크고 무거운 벽돌 같은 전문 용어나 추상적 관념이 있다면, 그걸 들기 쉬운 작은 소품으로 해체하고 재조립해 주는 셈이다. 예를 들어 “A는 B다” 식의 딱딱한 정의 대신 “A는 마치 ~와 같다”와 같은 비유를 써서 문장의 무게를 줄일 수 있다. 이를테면 “아장스망은 복잡한 관계적 배치다”라고 말하면 여전히 쉽지 않다. 이럴 때는 “아장스망은 비빔밥 위의 고명과 같다. 무엇이 얹히는지에 따라 맛이 달라진다”라고 바꿔주면 한 번에 떠오르는 이미지 덕분에 훨씬 쉽게 이해된다. ‘에피스테메’라는 푸코의 용어도 마찬가지다. ‘특정 시대를 지배하는 인식의 틀’이라고만 하면 막연하고 무거우니, “에피스테메는 우리가 세상을 볼 때 무의식적으로 쓰는 안경과 같다”고 고쳐보면 한결 마음에 와닿는다.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 개념을 우리 주변의 일상적인 사물이나 풍경에 빗대어 설명하면, 이해가 한순간에 가까워진다.
두 번째 단계는 기호 간 번역이다. 여기서는 추상적인 개념에 얼굴과 몸을 만들어 주듯, 언어를 벗어나 구체적인 장면이나 이미지로 옮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머릿속에만 머물던 개념을 그림이나 동작처럼 눈앞에 펼치게 만들어주는 작업이다. 논리로만 설명할 때는 멀게 느껴졌던 것도, 한 장면의 이미지나 하나의 몸짓으로 바꾸면 바로 감각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 예를 들어, 롤랑 바르트가 말한 ‘저자의 죽음’이라는 개념이 있다. 즉, 문학 작품의 의미란 더 이상 작가의 손에만 남아 있지 않고, 독자가 해석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뜻이다. 이걸 이렇게 풀어볼 수 있다. “작가는 레시피만 남겨두고 조용히 자리를 뜬 셰프다. 요리가 어떤 맛으로 완성될지는 이제 식탁에 앉아 있는 당신의 혀끝에 달렸다.” 이렇게 해석의 주체성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식탁 위의 먹는 장면으로 옮겨오면,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개념이 마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실감 나게 다가온다. 이런 식으로 언어의 뚝을 넘어 이미지를 빌리거나, 구체적인 삶의 풍경으로 바꿔내는 것이 기호 간 번역이라 할 수 있다.
라캉이 말한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구절도, 기호를 서로 바꿔 읽어보면 훨씬 더 쉽게 마음속에 스며든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내 마음은 남이 빌려준 옷으로 가득 찬 옷장이다.” 여기서 욕망은 ‘옷’이고, 무의식은 ‘옷장’으로 자연스럽게 그려진다. 단 한 줄의 짧은 비유지만, 이런 번역을 거치면 복잡한 개념도 한눈에 그림처럼 펼쳐진다. 사르트르의 유명한 말,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 역시 마찬가지다. “인간은 설계도 한 장 없이 이 세상에 던져진 빈 도화지다.” 이렇게 실존은 ‘설계도가 없는 상태’로, 자유는 ‘도화지’로 바꿔보면, 말하고자 했던 메시지의 윤곽이 훨씬 또렷하게 다가온다. 푸코가 남긴 “권력은 도처에 존재한다”도 기호의 환치를 통해 새롭게 살아난다. “권력은 거대한 요새가 아니라, 우리 사이를 미세하게 맴도는 정전기다.” 권력의 편재성을 그저 막연하게 설명하는 대신, 손끝에 찌릿하게 닿는 정전기에 빗대니, 그 실체가 훨씬 더 피부에 와닿는 듯하다.
Kodak이라는 회사, 예전에는 카메라로 사진을 찍기 위해 필름을 만들었다. 원했던 장면을 카메라에 담으면, 이미지가 필름 위에 잠시 머물렀다가 현상과 인화 과정을 거쳐 비로소 사진이 손에 쥐어졌던 시절의 이야기다. 바로 이 필름을 개발하던 회사의 엔지니어, 스티븐 새슨에게 일어난 일이다. 어느 날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데, 유치원생들이 견학을 왔다. 한 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물었다. “아저씨, 여기가 어디예요?” 처음 듣는 물음에 새슨은 천천히, 정성껏 답했다. “여기는 필름 만드는 회사야.” 잠시 후 또 다른 아이가 궁금한 듯 묻는다. “아저씨, 필름이 뭐예요?” 새슨은 순간 당황했다. “필름이란 게 뭐지?” 정작 본인도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었고, 어린이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도 막막했다. 물론 성인이나 대학생이라면 “필름은 빛에 노출되면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물질”이라고 말해도 무리가 없겠지만, 유치원생에게는 ‘형상화’, ‘화학반응’, ‘물질’ 같은 낱말조차 낯설고 어렵기만 할 것이다. 고민 끝에 새슨의 머릿속에 번뜩이는 생각이 들었다. “필름은 그릇이야. 세상 모든 이미지를 담을 수 있으니까.” 필름을 ‘그릇’이라 바꿔 말하자, 그 한마디에 어린이들도, 스스로도 뜻밖의 깨달음을 얻게 된다. 이미지를 담는 그릇—이렇게 정의를 바꾼 순간, 필름은 더 이상 과학적으로만 설명되는 복잡한 대상이 아니라 모든 장면을 받아들이는 그릇이 된다. “필름은 그릇이다.” 그렇게 말했을 때, 필름은 더 이상 난해한 화학물질이 아니라, 세상의 순간순간을 고이 담는 소박한 그릇이 된다.
언어 내 번역이란 “이 어려운 말을 중학생 조카에게 어떻게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대한 한 가지 답이다. 반면, 기호 간 번역은 “이 개념이 만약 사물이나 풍경이었다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을까?”를 상상해 보는 일이다. 앞서 언급한 구병모의 《절창》에 나오는 “상처는 사랑의 얼룩이다”(344쪽)라는 한 문장도 바로 이런 식의 언어 내 번역과 기호 간 번역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예라 할 수 있다. 추상적인 ‘상처’와 ‘사랑’의 관계를, 눈앞에 그려지는 ‘얼룩’이라는 생생한 이미지로 옮겨놓은, 정말 멋진 문장이다.
2단계 처방: 쉬운 것을 깊게 쓰는 단문의 수사학(영양제)
누구나 떠올릴 만한 평범하고 건조한 표현에, 조금의 통찰만 더해도 마음을 적시는 여운을 남길 수 있다. 일상의 겉모습 아래 숨겨진 의미와 감정의 결을 발견하려 애쓰는 것, 이것이 바로 문장의 힘이다. 우리는 늘 보는 현상에 ‘왜?’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그러면서 익숙한 사물에 감정을 입히기도 하고, 당연하다고 여긴 것을 한 걸음 뒤에서 낯설게 바라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오늘따라 퇴근길에 비가 참 많이 내린다.” 이 문장은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매일같이 듣고 스쳐 지나치는 문장이다. 그러나 “수고한 하루를 다독이듯, 세상의 뾰족했던 모서리들이 비에 둥글게 젖어든다.”라고 표현하면, 갑자기 일상의 평범한 퇴근길이 색다른 감정과 이미지를 품게 된다. 똑같은 사실을 전해도, 이렇게 다시 써 내려가면 의미의 울림이 훨씬 짙어진다. 평범한 물건이나 현상에도 보이지 않는 맥락이나 감정, 배경을 얹으면, 읽는 이의 시야와 생각의 폭은 자연스럽게 넓어진다.
“물이 흐르듯, 시간도 멈추지 않고 지나간다.”라는 문장 한 줄만 봐도 그렇다. ‘물의 흐름’이라는 익숙한 이미지를 빌려, 시간의 흐름에 대한 아련한 성찰을 담아내지 않았나. 쉬운 단어들 사이사이로 철학적 의미나 은유를 심어 두고, 문장은 되도록 짧게, 그러나 여운은 길게, 독자가 문장 너머를 한 번쯤 더 생각할 수 있도록 남겨두는 것이 중요하다. 나이키의 “Just Do It”이라는 상징적인 슬로건도 단순한 실행의 메시지만이 아니라, 그 아래 ‘인내’, ‘도전’, ‘자기 극복’의 의미까지 파고든다. 복잡하게 생각하는 대신, 결국 단순한 행동이 삶을 바꾼다는 묵직한 진리를 품고 있다.
어려운 것을 쉬운 말로 풀어내는 능력만큼이나, 익숙하고 쉬운 대상을 깊이 있게 다루는 글의 수사학 또한 결코 쉽지 않다. 여기서 말하는 ‘쉬움’이란, 누구나 반복적으로 마주하는 진부한 일상이나 표현을 뜻한다. 누구에게나 평범해 보이는 풍경이지만, 그 속에 숨은 의미와 감정, 아직 깨어지지 않은 상상력의 씨앗을 품어내는 문장은 아무나 쓰지 못한다. 일상적인 언어와 누구나 겪는 소재를 빌려도, 그 너머의 철학적·정서적 파도를 전하는 건 작가의 통찰과 감수성에 달려 있다. 평범한 것을 깊게 쓴다는 건 기이한 사건을 찾아내는 일과 다르다. 사소한 대상을 더욱 세밀하게 관찰해, 미시적인 순간 속에서 거대한 보편의 진리를 길어 올리는 것, 바로 이 현상학적 시선이 작가의 몫이다.
2-1. 틀에 박힌 익숙한 글귀를, 틀 밖의 낯선 언어로 다시 세우는 일
누구나 아는 평범한 말에는 자칫 깊이가 사라지기 쉽다. 가벼워 보이는 이야기를, 그 아래 숨은 결까지 포착해 “아, 그럴 수도 있지” 깨달음을 남기려면 문장 하나하나에 사유의 뿌리가 단단해야 한다. ‘왜(Why)’라는 질문을 던져 익숙한 현상 아래 숨겨진 땅을 파고, 누구나 예상한 결말을 거부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가능성, 즉 ‘철학적 맥락’에 손을 뻗을 수 있다. 단순한 묘사에 머물지 않고, 그 현상이 사람의 본성이나 삶의 방정식에 어떻게 접점을 이루는가까지 한 줄 더 얹으면 문장이 가지고 있는 깊이가 완전히 달라진다. “사람은 고생해야 아픈 만큼 성장한다.” 이 말은 너무 많이 들어서 되레 귀에 감흥이 남아있지 않다. 그런데 “고통의 시간을 견디지 못한 생명은, 타인에게 기쁨을 줄 자격조차 없다.”라고 비틀어보면, 단순히 체험과 인내를 찬양하는 진부한 상식을 새삼스레 뒤흔든다. 오랫동안 굳어진 문장을 새로운 시선으로 다시 해석할 때, 그 안에 낯선 의미가 숨어 드니, 일상에서도 보석 같은 통찰이 길어 올려진다.
“잠을 푹 자야 다음 날 피로가 풀린다.” 이 익숙한 문장은 수면과 피로의 상관관계를 너무 뻔하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짧은 한 마디라도 그 안에 낯선 사유를 불어넣으면 문장 자체가 생기를 띤다. “수면이란 매일 밤 자아의 통제권을 내려놓는 작은 죽음의 의식이고, 이 무방비한 시간을 통과해야만 우리는 다시 세계와 맞설 생명력을 되찾는다.” 이제 단순한 숙면이 뜬금없는 새로운 의미를 품게 된다. 수면과 피로를 연결시키는 대신, 수면과 자아, 통제, 생명력을 꼬아서 문장을 낯설게, 새롭게 세운 셈이다. “방을 깨끗이 치우면 기분이 좋아진다.”라는 표현 역시 진부함 그 자체다. 하지만 “공간을 정돈하는 행위는 모든 것이 무질서로 흐르려는 우주의 엔트로피에 맞서 내 삶의 통제권을 거머쥐려는 인간의 본능적인 생존 투쟁이다.”라고 바꿔 보면, 그저 사소한 집안일에도 묵직한 의미가 얹힌다. 청소라는 쉬운 행위에 진지한 탐구와 철학을 부여한 작은 노력만으로, 일상적 문장이 깊이와 울림을 갖게 된 것이다.
“글씨를 쓰면 연필심이 닳아서 뭉툭해진다.”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익숙한 문장이다. 거기엔 긴장감도, 새로운 통찰도 깃들 여유가 없다. 하지만 연필심이 닳아 사라지는 과정을 눈여겨 지켜본 사람이라면,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낸다. “세상에 지워지지 않는 고유한 흔적을 남기려면, 반드시 자기 자신 일부를 깎아내고 닳아 없애는, 소멸의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 자기 존재의 뜻을 소멸의 고통 없이 호소할 방법은 없다. “복잡한 생각이 들 때 산책을 하면 머리가 맑아진다.” 이런 당연한 말로는 어느 누구의 시선도 붙잡지 못한다. “두 발을 번갈아 내딛는 그 물리적인 전진은, 정체된 세계에 갇히길 거부하면서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는 생명 고유의 관성극복이다.” 관성에 잠기면 타성에 젖게 된다. 신체의 움직임이 마음의 저항과 무관하지 않기에, 지금 이 자리에서 벗어나려는 안간힘, 그 두 발의 전진이야말로 틀을 깨고 새로운 관문을 열어젖히려는 저항이자 도전이 된다.
“슬플 때 실컷 울고 나면 마음이 조금 후련해진다.” 너무도 뻔한 말이어서, 아무도 그 문장에 멈춰 서지 않는다. “눈물은 한 인간의 몸이 감당할 수 있는 존재의 무게가 한계를 넘어섰을 때 자연스럽게 터져 나오는 불가피한 범람이자, 결국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마지막 방어선이다.” 눈물을 그런 불가피한 범람, 방어기제로 받아들일 때, 단순히 감정에 휩쓸려 흘려지는 액체가 아니라, 인간이 자기 결단 끝에 마주하게 되는 의식적인 자기 보호의 몸짓으로 거듭난다. “밀가루 반죽에 이스트를 넣으면 빵이 부풀어 오른다.” 이 역시 겉에 보이는 변화만 쫓은 문장이다. “낯선 균의 침투와 발효, 그 이질적인 고통을 소중히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그 어떤 존재도 자신의 본디 모습을 뛰어넘는 이상적 형상으로 다시 태어날 수 없다.” 발효와 숙성, 그 느리고 긴 기다림이야말로 한 존재를 성숙하게 이끄는 원동력임을 새삼 일깨워주는 문장이다.
“상처가 나면 딱지가 생기고 흉터가 남는다.” 대부분은 그냥 지나치는 상처의 흔적. 하지만, “흉터란 과거의 파괴를 몸이 애써 잊지 않으려 하는 간절한 기억이며, 다시는 똑같이 무너지지 않으리라 다짐하는 세포들의 결연한 의지다.” 상처 뒤에 남겨진 딱지를 당연한 흔적으로 치부하지 않고, 지나간 아픔을 기억하려는 몸부림,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는 결단으로 재해석한다. “추운 겨울을 지나 봄이 오면 꽃이 화려하게 핀다.” 이렇게 평범한 진술에는 누구도 오래 머무르지 않는다. “만개한 꽃잎은 계절의 변화에 휩쓸린 결과물이 아니라, 깜깜하게 얼어붙은 땅속에서 기어이 살아남았음을 드러내는 생명의 격렬한 시위다.” 같은 현상 앞에서도, 누군가의 입장에 감정이입해 보면 살아 있는 말의 밀도와 힘이 다르게 느껴진다.
“멀리 떨어져 있으면 상대방이 더 애틋하게 느껴진다.” 흔한 표현이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우리는 대상이 물리적으로 부재할 때마다, 그가 내 세계에서 차지하던 진짜 부피를 비로소 또렷하게 감각하고, 오직 결핍을 통해서만 존재의 가치를 온전히 되새긴다.” 그저 보고 싶어질 거라 여겼던 막연함 대신, 부재와 결핍이 던지는 철학적 의미를 탐색하며, 존재의 이유와 가치를 찬찬히 돌아보는 시간이 마련된다. “시계 초침은 똑딱거리며 멈추지 않고 움직인다.” 다만 표면만을 따라 쓴 문장. 그러나 오른쪽으로 묵묵히 나아가는 초침, 거기에 맞추어 자신의 속도로 가는 분침, 시침을 한참 들여다보면 누구든 마지막을 향하는 단호한 결단을 읽어낸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초침 소리는 한정된 생명이 지금도 되돌릴 수 없이 타들어가고 있다는 경고, 시간의 차가운 맥박이다.” 초침과 분침, 시침을 비가역적인 경고등이자 잔인한 맥박으로 다시 바라보는 순간, 시계는 더 이상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우리 삶 그 자체가 된다.
2-2. 관찰로 통찰의 발현: 집요한 관심과 애정이 만드는 통찰
일상의 평범한 소재도 깊이 있게 다루려면 무엇보다 ‘통찰력’이 필요하다. 흔히들 오해하지만, 통찰이란 타고난 천재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히려 오랜 시간 의식적으로 훈련하고, 꾸준히 시도하며 쌓는 힘이다. 음악이나 미술, 체육 같은 예술 분야에서는 타고난 재능이 성패를 가를 수 있지만, 우리 일상에서 현상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만큼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그것만큼은 노력과 훈련, 그리고 관심만 있다면 충분히 키울 수 있기 때문이다.
통찰을 키우는 가장 중요한 훈련은, 대상을 깊고 조심스럽게 관찰하는 데서 시작된다. 사업을 잘하는 사람은 남들이 잘 못 보는, 혹은 애써 외면하는 시장의 부족함을 정확히 짚어낸다. 좋은 글을 쓰는 이들은 다른 이들이 스쳐 지나칠 일상을 다시 한번 응시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다. 남들과 똑같이 세상을 본다면 그저 그런 글, 그저 그런 사업만 반복될 뿐이다. 오히려 마음 깊이 바라볼수록 시야는 멀어지고, 그만큼 날카로운 통찰이 깃든다. 새로운 논리를 배우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러나 지식에 감성과 새로운 시선을 입혀 다른 이들과 나누는 건 오롯이 각자의 숙련된 감정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진짜 통찰이 녹아든 글은 논리와 감성이 아름답게 어우러진다.
늘 하던 방식으로만 세상을 바라봐서는 진정한 통찰이 자라지 않는다. 기존의 습관을 깨고, 더 넓고 깊게 보기 위해 배우고 익히려는 노력이 중요하다. 더욱이 인공지능이 보편화되는 4차 산업시대에는 누구나 답을 쉽게 찾아낼 수 있는 효율성보다, 기계로는 결코 닿을 수 없는 인간만의 통찰이 가장 큰 경쟁력이다. 뻔하게 살아가면, 예상되는 결말만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뻔한 삶이 싫다면, 세상을 바라보는 눈부터 달라져야 한다. 마지막으로, 아무리 좋은 통찰도 입으로만 머무르면 소용없다. 깊이의 비밀은 오랜 실천 끝에 서서히 드러난다. 수월하게 보이는 방법도, 하염없이 실천하는 사람만이 먼 경지에 도달한다.
이런 실천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마치 하나의 운동이나 취미를 깊이 파고들 듯, 글쓰기나 관찰 역시 매주 최소 한 번씩, 5년, 10년을 쉼 없이 이어가야 한다. 그렇게 꾸준히 매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계안’이라 부르는, 사물의 본질을 꿰뚫는 감각이 자신의 것이 된다. 김정원 작가 역시 과거 단 16권의 책을 완벽하게 소화한 경험이, 훗날 80권에 달하는 방대한 저작을 써내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고백했다. 한 우물을 깊게 파서 통달에 이른 사람이야말로, 그 과정과 경험 자체가 진짜 삶의 힘이 된다. 이처럼 통달에 이른 깊이와 흔들림 없는 시선은 작가의 삶, 곧 작품의 고유한 색채로 자연스레 드러난다.
그렇다면 관찰에서 통찰을, 그리고 짧고 강한 문장으로 이어가는 길은 무엇일까. 이 여정에서 세 가지 문장 건축법을,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한 번 찬찬히 뜯어볼 필요가 있다. 먼저 목적을 비틀어 반전을 주는 방식이 있다. 겉으로 드러난 유용함이나 당연한 결과 뒤에, 그로 인해 감춰진 상실과 희생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사물의 입장에서 무엇이 사라지는지 정확히 들여다볼 때 문장은 깊이를 얻는다. 가령 “양초에 불을 붙이면 방이 환해진다”는 말은 너무 평범하다. 하지만 “자기 몸을 태우며 환해지는 촛불. 철저한 자기 파괴로야 비로소 어둠을 밀어낼 수 있다”는 문장은 남다르다. 타인을 밝히기 위해 자신의 얼마를 내어놓는 촛불의 심정—거기서 진정한 통찰이 움튼다.
둘째, 눈앞에 펼쳐지는 찰나의 현상이나 멈춘 사물을 바라볼 때, 그 안에 스며든 긴 기다림의 시간과 아직 오지 않은, 되돌릴 수 없는 소멸의 기운까지 읽어내는 법이다. “오랫동안 청소를 안 해서 책장에 먼지가 쌓였다.” 이처럼 무덤덤한 표현은 누구나 익숙하다. 하지만 의미의 심지를 밝히는 순간, “뽀얗게 내려앉은 먼지는 단순한 얼룩이 아니라, 주인이 떠난 빈집이 허공에 홀로 숨을 쉬며 한 겹씩 쌓아 올린 시간의 지층이다”와 같이 가슴을 찌르는 문장을 빚어낼 수 있다. 겉만 보면 순간의 지나가는 현상 같지만, 그 밑바닥에는 오랜 인내와 불가역적인 소멸의 철학이 숨어 있다. 시간의 지층이 깊어질수록 고독의 무게는 심연으로 가라앉고, 창작에 대한 갈망은 더욱 불타오른다.
셋째는 물리적 현상을 심리로, 곧 투영해 보는 것이다. 자연이나 사물의 법칙을 사람의 마음, 관계, 생존 본능과 겹쳐 설명하는 방식이다. “자석은 같은 극끼리 가까이 두면 서로 강하게 밀어낸다.” 이 말은 틀에 박힌 교과서 문장이다. 하지만 “같은 극의 자석이 맹렬히 서로를 밀쳐내듯, 사람은 자신이 감추고 싶은 결핍과 닮은 타인을 본능적으로 피한다”라고 쓰면 어느새 삶과 맞닿는다. “죽고 싶은 사람은 없고,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사람이 있을 뿐이다.”라는 말도 있다. 세바시에 출연했던 청소년 상담가 이서정 샘이 남긴, 일상을 깊이 들여다본 끝에 건져 올린 한 마디였다.
“우리는 마주침을 통해 예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변형된다”(94쪽). 애나 로웬하웁트 칭의 《세계 끝의 버섯》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 문장은 들뢰즈의 리좀을 떠오르게 한다. 리좀이란 곧 우연한 마주침의 또 다른 이름 아닐까. 우리는 누구와 무엇을 만나 어떤 질서로 얽히는지에 따라, 매일 새롭게 자기 자신이 되어간다. 모든 존재는 마주침을 반복하며, 어제와는 다른 자리에서 또 다른 자신의 모습을 쌓아 올린다. 이미 익숙해진 현상의 껍질을 깨고, 문장이 가닿지 못한 그 깊은 곳까지 사유의 뿌리를 내리려면, 단순히 사물을 묘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이면의 본질과 인간의 삶을 연결해 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통찰력 있는 문장을 만들기 위한 세 가지 방법을 정리해 보았다.
3단계 처방: 깊은 것을 재미있게 쓰는 단문의 수사학(활력소)
지나치게 무겁고 교훈적인 진리에도 생기를 불어넣어 독자의 공감을 끌어내는 방법이 있다. 무거운 진리에 위트, 반전 혹은 구체적인 감각을 한 스푼 얹어주는 것이다. 진지한 이야기 끝에 갑자기 픽 웃음이 터지게 하거나, 너무나도 평범한 소재와 의외의 연결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서늘하게 식상했던 문장에도 색다른 재미가 스며든다. 예를 들어 “인생은 예측 불가능한 고통의 연속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희망을 품고 살아간다”라는 문장은 관성에 젖은, 어쩌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법한 문구다. 그런데 이렇게 바꿔본다면 어떨까? “인생은 혀가 얼얼할 만큼 매운 마라탕. 눈물, 콧물 다 쏙 빼고도 또 내일 젓가락이 간다.” 고단한 인생의 나락에서도 누군가는 여전히 하늘의 별을 꿈꾼다.
배달의민족 브랜드 캠페인 또한 ‘민족’이라는 무겁고 역사적인 단어를, 공동체 의식이나 한민족의 뿌리처럼 진지하게 강조하면서도, 전혀 다른 결로 유쾌하게 풀어냈다.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철가방을 들고 고구려 벽화 앞에 선 인물이라는 익살스러운 패러디를 통해, ‘민족성’이라는 거창한 이미지와 ‘배달 음식을 둘러앉아 먹는 일상’을 가볍게 연결한다. 점잖은 한마디에 재치를 더해 브랜드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각인시킨 사례다. 의미가 너무 깊어지면 오히려 어렵고 멀게 느껴진다. 그럴 때는 깊은 뜻에 경쾌함을 입혀 의미를 변주하거나, 익숙한 상황을 낯설게 바라보는 시선을 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전문가일수록 자기만의 깊이와 추상에 빠져, 비전문가의 어려움을 잘 모른다. 바로 이 점이 ‘지식의 저주’다. 전문지식 없는 이의 답답함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 바로 그 저주다.
이 저주에서 벗어나는 한 가지 방법은, 깊은 전문지식조차 뼈 있는 농담으로 비틀어 전하고 싶은 본질적 메시지로 녹여내는 일이다. 유머란, 단순한 말장난이나 얄궂은 농담에 그치지 않는다.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을 뒤엎고, 기대를 한순간 무너뜨리는 의외의 반전이 있어야 한다. 재미의 결에는 늘 낯선 의미가 숨어 있다. “유머는 관점을 바꾸고 새로운 가능성을 엿보게 하는 정신의 모험이다. 주어진 세계와 보이는 현실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이면까지 두루 살피는 지성의 운동이다. 그리고 그렇게 우회하여, 결국은 지혜에 다가선다.”김찬호의 《유머니즘》에 나오는 말이다.
깊은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어내는 데는 여러 가지 비법이 있다. 철학처럼 복잡하고 무거운 내용도, 유머나 아이러니, 예상치 못한 반전을 한 스푼씩 얹으면 금세 흥미로워진다. 이를테면,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생각한다”라는 문장은 재치 있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답답하다”로 바꿔볼 수 있다. 데카르트의 명제를 한 번 비틀어 놓으니, 진지한 담론이 어느새 유머가 된다. 깊은 뜻을 담으면서도 익살맞은 표현이나 엉뚱한 연결 고리를 더하면, 독자의 웃음뿐 아니라 호기심까지 자극할 수 있다.
프랑스 시인 폴 발레리의 시, ‘해변의 묘지’에 나오는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라는 문장도 “바람이 분다. 책이나 읽어야겠다”쯤으로 변주해 보자. 그러면 독서에 담긴 의미가 유쾌하게 살아난다. 오스카 와일드는 “나는 절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허구를 즐길 뿐이다”라고 말하며, 진실과 거짓의 묵직한 화두를 유머로 뒤집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평범한 것에도 감정을 한껏 실으면, 맥도널드 광고의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맛!”처럼 음식조차 특별한 감정으로 빛난다.
심오한 진리는 때때로 따분한 훈계처럼 들릴 위험이 있다. 이럴 때는 문장 끝에 망치를 휘둘러 독자의 예상을 산산이 깨뜨려야 한다. 유머란, 단순한 말장난 너머에서 번뜩이는 깨달음이 연주되는 지성의 향연이기도 하다. 때로는 반전이 펼쳐지는 순간, 언어의 리듬을 타고 심장이 의미로 쿵쾅거리기 시작한다. 엄숙함은 잠시 접어두고, 언어유희나 역설을 활용해 글에 탄력을 선물하자. 예를 들어, 소리는 같지만 의미가 다른 동음이의어나, 앞뒤 맥락을 아예 뒤집는 식으로 기대를 엎는 것도 방법이다. “지식은 끊임없이 습득해야 한다”는 말은 왠지 밋밋하다. 대신 “지식(知識)만 쌓는 사람은 지식(止息)할 수 있다. 숨 가쁘게 쫓아가는 공부 말고, 숨 쉬며 즐기는 공부를 하라”처럼 말하면, 같은 메시지도 훨씬 생동감 있게 다가온다.
죽음, 노화, 전쟁의 트라우마, 상실, 존재의 불안 같은 무거운 주제들을 너무 진지하고 돌직구로만 말하면, 독자는 어느샌가 그 무게에 눌려 책장을 덮고 만다. 그러나 깊은 것을 유쾌하게, 진지한 것을 재미있게 쓴다는 건 결코 비극을 희화화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유머와 위트라는 수사학의 완충재를 곳곳에 심어 두면, 독자는 지치지 않고 끝까지 그 진실을 바라볼 힘을 얻는다. 결국 가장 어려운 진실을 끝내 받아들이게 하는 건, 작가가 독자를 향해 내미는 이런 심리적 배려이자, 정교한 글쓰기의 힘일 것이다.
3-1. 비극의 희극적 승화와 심리적 완충재로써의 유머
이노우에 히사시의 작품이 문학사적으로 훌륭한 평가를 받는 지점은 그의 텍스트에 담긴 거창한 이데올로기나 사상 때문이 아니다. 그가 그려내는 인간의 참상은 그 어떤 비극보다 참혹하지만, 그의 문장 자체는 절대 우울하지 않다. 그는 자신만의 위트 있는 대사 속에서 인간이 마땅히 누려야 할 행복과 사랑, 그리고 웃음을 그야말로 웃음의 형식을 빌려 이야기한다.
태평양 전쟁 당시 히로시마 원폭 투하를 배경으로 한 그의 대표 희곡 《아버지와 살면》의 한 장면은 이러한 수사학적 지향점을 완벽하게 시연한다. 원폭으로 아버지를 잃고 혼자 살아남았다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생존자의 죄책감에 시달리는 딸 앞에, 언젠가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유령이 불쑥 나타난다. 딸은 스스로를 비극의 밑바닥으로 몰아넣듯 “난 행복해지면 안 돼. 그러니까 이제 아무 말 마세요”라고 중얼거리며, 어떻게든 아버지를 외면하려 애쓴다. 그런데 아버지는 딸의 깊은 슬픔에 덩달아 울음을 터트리는 대신, 엉뚱하게도 만두 하나를 건넨다. 그리고 그 만두의 의미를 같이 찾아가자며, 딸을 향해 유쾌하게 말을 걸기 시작한다. “너는 원래 마음씨 곱고 밝고 총명한 아이였어. 기노시타가 네 본래 모습을 단번에 알아보고, 자연스레 널 궁금해했지.” 능청스럽게 말을 이어가는 아버지의 모습은 자연스럽게 딸의 마음을 스미고, 또 읽는 이의 입가에도 씁쓸한 웃음을 자아낸다. ‘우는 건 싫어’라는 듯, 비극을 희극으로 촘촘하게 직조해 내는 이 작가의 태도는, 깊은 상처 앞에서 때로는 눈물보다 웃음이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런 유머의 기법은 문학 작품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 그리고 긴장감 맴도는 현실의 한 순간에서도 그 힘을 발휘한다. 한 예를 들어보자. 코로나19 백신 접종이 한창 진행되던 시절, 병원 마감 시간을 앞두고 허겁지겁 뛰어온 환자와 그를 맞는 간호사 사이에 펼쳐진 작은 에피소드다. 오후 2시 마감 시간에 쫓겨 들어선 환자로 병원 안 공기는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그 틈에서 간호사는 마음속으로 ‘어떻게든 분위기를 풀어야겠다, 오늘은 한번 유머를 써볼까?’ 생각한다. 그리고 꾸중보다는 과장되고 익살스러운 농담을 연이어 내뱉는다. “2시면 2시에 나가도 맞을 수 있으니 발 앞에 병 놓으세요.” “이렇게 늦게 오면 백신 하얀 꽃이 피어날지도 몰라요.” “아유, 좀 더 개념 있게 2시 퇴근하고 활짝 문 열라고요.” 엉뚱하게 느껴질 만큼 위트를 쏟아낸 덕분에, 병원 안의 침묵은 어느새 웃음기 머문 밝은 분위기로 뒤집혔다. 이렇게 유머는, 사람 사이의 소통뿐만 아니라 글쓰기에서도, 공기와 마음을 환기시키는 가장 탁월한 전략이 된다. 어쩌면 주제가 무거울수록, 독자가 잠시 숨을 고를 수 있도록 짧은 위트와 농담이 한 줄기처럼 적재적소에 놓여야 한다.
3-2. 트라우마의 타당화와 정서적 거리 두기의 언어화
깊은 상처와 우울을 글로 풀어놓고도 독자의 마음을 지치지 않게, 오히려 끈 있게 이끌기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조건이 있다. 그것은 바로 필자 스스로 자신의 감정에 온전히 다가서고, 그것의 무게를 제대로 인정해 보는 것이다. 지나온 아픔, 밀려드는 수치심과 소외감, 여태 발설조차 못 한 그날의 모욕과 억압을 스치듯 흘리거나 아무렇지 않은 척 감춰두면, 필연적으로 글마저 얄팍해진다. “불행 중 다행”이라는 식의 억지 위로나 “그래도 행복해야 한다”는 닫힌 주문이 글 곳곳을 메우는 순간, 우리는 이미 진심이 빠져버린 자기 계발서적의 식상한 클리셰로 추락하고 마는 것이다. 사하라 사막 마라톤 완주에 실패했지만, 실패를 좌절과 절망으로 연결시키지 않고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는 말을 절대로 쓰지 말아라”는 아포리즘을 생각해 낸 소중한 경험이었다.
깊이를 갖춘 글을 쓰기 위해서는, 먼저 나를 짓누르던 그 기억과 상처들을 이제라도 충분히 느끼고, 속 깊은 분노와 슬픔을 솔직하게 꺼내 놓아야 한다. 미처 마주하지 못했던 감정들이라면, 지금이라도 하나하나 맞이하고, 흘려보내야 한다. 글쓰기 치료의 길에서도, 내 안에 얽혀있던 답답함과 울분을 외부로 끄집어내어 정리해 보는 과정이야말로 본질이다. 누군가에게 털어놓듯, 혼잣말로 화도 내고, 소리도 지르고, 어쩌다가는 한참을 울기도 하면서, ‘그래, 내가 아팠구나’ 하고 토닥이는 일. 그 진정한 타당화와 정당화의 반복이야말로 스스로를 바로 세우는 첫걸음이 된다. 트라우마 치유에서 우리가 자꾸만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게 되는 것도, 결국은 내면의 고통을 진짜 내 목소리와 글로 옮기는 그 과정이 선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철판 용접공이었던 과거의 아픈 흔적을 어루만지기 위해 지식융합을 대체하는 새로운 개념을 만들었다. 바로 지식 용접공(Knowledge Welder)이다. 지식융합이라는 관념적 머리의 언어보다 이질적 지식을 나만의 문제의식과 열정으로 접목시켜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지식 용접공이라는 몸의 언어가 듣는 사람의 폐부를 찌른다.
“별거 아닌 아픔은 없다. 모두 지금의 나를 만든 중요한 사건들이다. 충분히 아파해야 하고, 그만큼 지지도 받아야 한다. 여러분은 아파해 마땅한 일을 겪었으니, 맘껏 아파해도 괜찮다”라는 깨달음은, 과거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상처를 제대로 보듬고 비로소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 된다. 그렇게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느끼고, 그 감정이 충분히 받아들여졌다고 느끼는 순간, 내면에는 어느덧 무거웠던 비극을 한 발짝 멀리서 바라볼 수 있는 단단한 심리적 여유가 생긴다. 바로 그 여유가 자리 잡았을 때, 작가는 자신의 아픔을 더 이상 뾰족한 저주가 아닌, 자조 어린 유머나 따뜻한 위트가 녹아든 짧고 경쾌한 문장으로 빚어낼 힘을 갖게 된다. 목재로써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옹이를 다른 관점으로 해석하면 나무 부위 중에서 가장 단단한 곳이다. 심하게 아픈 상처 위에 생긴 옹이가 오히려 굳은 심지로 작용하면서 난국을 견뎌내는 굳건한 중심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3-3. 생의 유한성에 대한 위트 있는 시선
인간이 느끼는 가장 깊고 오래된 공포, 즉 죽음이나 노화의 문제마저도, 짧고 재치 있는 한 줄이 장황한 설교보다 훨씬 더 큰 힘을 낸다. 죽음을 주제로 삼아 “혹시라도 영원히 살 것처럼 오늘을 허투루 보내고 있진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보세요. 죽음이 언제 찾아올지 아무도 알 수 없으니, 오늘 최선을 다해야 하고 그 마음만 잃지 않는다면 내일 세상을 떠나더라도 후회 없는 삶이 될 겁니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성공과 상관없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사세요” 같은 과도하게 직설적이고 교훈적인 말은, 오히려 독자의 마음과는 거리를 두고 만다. 사람은 적시에 죽지 않고 불시에 죽는다. 남은 인생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 아무도 모를 때, 남은 인생을 오늘이 마지막인것처럼 재미있고 행복하게 살면 내일도 재미있고 행복해질 수 있다. 미래를 담보로 오늘을 희생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고진감래(苦盡甘來)는 오지 않는다. 고생 끝에 통증밖에 오지 않아서 고진감래는 이제 고진통래(苦盡痛來)로 바뀌어야 한다.
남에게 뒤떨어지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살다가 영원히 멀리 떨어져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다. 많은 이들이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성장은 안전한 지면이 아니라, 익숙한 세계에서 발을 떼 허공으로 몸을 던지는 순간 시작된다. 떨어지다(fall/dive)는 스스로를 새로운 환경이나 도전 속에 던지는 과감한 실행이다. 바닥을 쳐본 사람만이 다시 튀어 오를 탄성을 얻는 진리를 말하는 문장이다. 덜떨어지다(immature)는 떨어지기를 두려워하며 안주할 때, 우리는 설익은 상태로 머무는 경우를 말한다. 부딪히고 깨지는 경험이 부족하면 내면은 단단해지지 못하고 덜 떨어진 채 멈춰버린다. 뒤떨어지다(lag behind)는 변화의 속도에 몸을 싣지 않고 정체되어 결국 시대와 타인의 발걸음에서 멀어지는 소외다. 결국, 제자리에 머물며 뒤떨어지거나 경험 부족으로 덜떨어진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 당장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기꺼이 떨어지는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 과감하게 “떨어지지 않으면 덜떨어어지거나 뒤떨어지는 까닭이다. 나뭇잎이 때가 되면 자신을 버려 나무의 거름으로 작용한다. 떨어지지 않고 버티다 바람에 강제로 떨어지다 다른 나뭇가지 틈새에 걸리면 덜떨어진 나뭇잎으로 전락한다. 스스로 결단을 내려 떨어지면 덜떨어지지 않지만 타자의 압력으로 강제로 떨어지면 뒤늦게 떨어지는 고통도 감내해야 한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세 가지 수사적 전략—난해함을 평이하게(어려운 건 쉽게), 평이함을 깊게(쉬운 건 깊게), 심오함을 유쾌하게(깊은 건 재밌게)—은 결코 따로따로 흩어지지 않는다. 완성도 높은 산문이나 보고서에는 이 세 원칙이 서로 맞물려 유기적으로 엮이게 마련이다. 즉 문법적 군더더기를 덜어내 독자가 부담 없이 읽게 하면서도(평이화), 일상에서 길어 올린 관찰을 토대로 정서적 깊이를 더하고(심화), 무거운 주제 앞에서는 위트로 긴장을 풀어주는(유희화) 통합적 글쓰기가 이루어져야 한다. 이 통합의 방식이 독자들에게 감각적으로 와닿을 수 있도록, 각 원칙에서 작동하는 심리적 메커니즘과 실제 적용법을 아래 표로 정리했다.
첫 번째로,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학술적, 철학적, 전문적 지식(어려운 것)을 한 가지 고른다. 그리고 누구나 경험할 법한 사소한 일상 에피소드(쉬운 것)를 그릇 삼아 그 내용을 담아본다. 예를 들면 가족들과의 물놀이, 병원에서의 소동, 눈 오는 날 나눈 대화처럼 작고 평범한 순간들이 좋은 그릇이 된다.
두 번째, 이 일상 에피소드를 설명할 때는 불필요한 접속사를 과감히 걷어내고, 주어와 서술어가 분명하게 맞닿는 단문들을 엮어 초고를 써 내려간다.
세 번째, 글의 중반부터는 이 일상 서사에 인간 내면의 상처, 죽음, 필멸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더 깊은 철학적 주제를 살며시 녹여 넣는다.
마지막 결론부에 이르면, 묵직한 주제 의식을 독자에게 억지로 주입하지 않는다. 이노우에 히사시 특유의 익살스러운 농담이나 역설적인 위트, 혹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위하여”와 같은 따스한 시선이 담긴, 반전의 짧은 한 문장으로 조용히 방향을 튼다. 그러면 텍스트의 여운은 자연스레 남아, 독자가 스스로 그 결을 완성하게 된다.
짧은 문장을 쓴다는 건 문법을 단순히 압축하거나 단어 수만 줄이는 단순 작업이 아니다. 그건 오히려 세상을 향한 필자의 예리한 관찰력, 그리고 독자의 인지적 부담을 덜어주려는 치열한 헌신이자 이타적 결심에 가깝다. 이 보고서에서 심층적으로 탐구한 것처럼, 난해한 개념을 직관적으로 구조화하고 대중문화와 절묘하게 섞어 평이하게 해체하는 한편, 평소엔 무심히 흘려버리기 쉬운 일상의 파편을 10년 넘게 골똘히 들여다보며 보편적 통찰로 다듬어나가는 일, 그리하여 그 깊이를 독자에게 부담스럽지 않게 위트와 유머로 부드럽게 감싸는 작업 ― 이는 오늘날 텍스트를 만드는 이가 지향해야 할 가장 빛나는 미학일 것이다.
이제 모범 답안이 사라지고, 기계가 무한히 텍스트를 생산하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파편화된 정보가 범람하는 혼란 속에서 진짜 살아남는 인간 텍스트는, 논리적 완결성만을 뽐내는 변변찮은 논문이나 딱딱한 교훈서가 아니다. 독자의 마음을 한순간에 무장해제시키고 깊숙이 파고드는 힘은, 예리하면서도 다정하고, 거기에 유머까지 품은 짧은 문장에서 비롯된다. 백신 접종실 안의 팽팽한 긴장을 스르르 녹인 간호사의 농담 한마디처럼, 죽은 아버지가 상처받은 딸에게 건네는 우스꽝스러운 만두 한 개처럼, 짧은 문장은 때론 장편소설을 능가하는 서사적 폭발력을 품고 있다.
진심 어린 소통과 울림을 갈망하는 필자라면 이런 수사학적 원칙을 조용히, 그러나 한결같이 실천해야 한다. 자신의 상처와 눌린 경험을 외면하지 않고 스스로 인정해 내는 정서적 용기, 익숙한 전문지식을 전혀 다른 학문이나 일상적 비유와 과감하게 뒤섞어보는 창조적 사고, 그리고 초안을 끝없이 다듬고 덜어내 단단한 뼈대만 남기려는 문장적 절제가 맞부딪힐 때, 비로소 이노우에 히사시가 평생을 걸고 추구한 ‘궁극의 문장’에 가까워질 수 있다. 난해함을 쉽게, 평이함을 깊게, 깊음을 유쾌하게 다듬어나간 짧고 단단한 문장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독자의 기억에 또렷이 새겨지며, 혼란한 시대일수록 더욱 밝은 등불이 되어 우리 곁을 지켜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