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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는 새의 먹이지만
말모이는 사람이 배우는 사전이다

영화 〈말모이〉를 보고 나서

'모이'는 새가 먹는 먹이지만

'말모이'는 사람이 배우는 사전이다.


영화 말모이를 보고 나서  

   


‘모이’는 닭이나 날짐승의 먹이를 뜻하고,

‘말모이’는 주시경과 그의 제자들이 

1910년대 한국 최초로 편찬한 우리말 사전을 말한다.    

 

‘말모이’는 사전을 뜻하는 순 우리말이자,

조선어학회가 사전을 만들기 위해 

일제의 감시를 피해 전국의 우리말을 모았던

비밀 작전의 이름이기도 하다.     


우리말 사용이 금지된 1940년대 

글을 읽지 못하는 김판수(유해진)가 

아들 학비 때문에 가방을 훔치다 실패하고 나서

면접 보러 간 조선어학회 대표 류정환(윤계상)이 

바로 그 가방의 주인공일 줄을 누가 예상했을까.     



운명적인 만남으로 시작된 

영화 〈말모이〉는 당연하게 쓰고 있는 우리말을 

누가 어떻게 지켜냈을까를 역사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작지만 큰 선택,

전국의 사투리를 모으고

그 속에서 표준어를 선택하는 공청회를 열어

우리말 사전을 만들어나가는 감동적인 실화다.     


소쉬르가 창시한 랑그(Langue, 언어)와 

파롤(Parole, 말)의 기호학이

이 영화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랑그는 공통된 문법이나 낱말들에 존재하는 

서로 간의 규칙으로 고정적인 원칙을 말하고

파롤은 같은 내용의 언어가 사람마다 달라지는 것을 뜻한다.     


예를 들면 같은 엉덩이와 궁둥이(랑그)라도

전국에서 같은 의미로 사용하는 사투리(파롤)는 천차만별이다.

영화에서 조선어학회가 같은 말이라도 

전국의 파롤(사투리)을 모아 공청회를 통해

랑그(표준어)를 만들려고 노력했던 것도 

소쉬르의 언어학적 구조를 보여주는 증표라고 볼 수 있다.     

    


일본말을 지키기 위해 18년 동안 

사전을 만들면서 벌어지는 일상사를 다룬

〈행복한 사전〉이라는 영화도 

이 영화를 보면서 연상되었다.     



말을 모은다는 의미는

말에 담긴 뜻을 모은 다는 이야기고,

뜻을 모은다는 이야기는 

그 뜻을 모으는 사람들의 마음을 모아

민족의 얼과 혼이 담긴 사전을 만드는 작업이라는 의미다.    

 


사전을 만들기 위해 비밀리에 

전국 각지에서 사용되는 지역 사투리를 모으고

그 사투리에 담긴 뜻과 마음까지 모으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 〈말모이〉를 보면서 

몇 가지 느낀 점을 정리해본다.      



첫째, 까막눈 판수(유해진역)가 우리말에 눈뜨고

조선어학회 대표 정환(윤계상역)이 

‘우리’의 소중함에 눈뜨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우리라는 말은 우리말의 대표적인 특징이기도 하다.

서양 사람들이 위기에 처했을 때

"나를 도와 달라(Help me)"고 하지만

한국 사람은 ‘사람 살려’라고 말한다.     


자신의 집사람도 우리 집사람이라고 하고

자신의 아들과 딸도 우리 아들과 딸이라고 한다.

‘우리’라는 단어는 우리말의 특징을 드러내는

전형적인 말이다.     



김판수처럼 까막눈도 ‘나’보다 ‘우리’의 소중함을 깨닫고 

함께 교도소 생활을 했던 친구들을 동원해 

전국의 사투리를 모으는 장면은 인상적이었다.     


 


이 영화의 명대사 중의 하나, 

“한 사람의 열 걸음보다 열 사람의 한 걸음이 더 크다”를 

가장 잘 보여준 장면이 아닐 수 없다.     


둘째, 한 나라의 말을 살리는 일은 언어학자를 비롯해서

소수의 지식인이나 꼭 많이 배운 사람들만의 몫이 

아니라는 점을 영화는 힘써 말하고 있다.     


한글 잡지에 나온 광고를 보고

전국에서 사용하는 사투리를 보내주는 놀라운 성의와 열정이

우리말을 살리는 사전을 만들어가는 원동력이 된 셈이다.   

  

익숙하게 사용하고 있지만 그 의미를 정의해보라면 

못하는 평범한 말들이 너무 많다.

깊이 생각하지 않는 우리말이 많아지기 시작했고

의외로 소리 없이 사라진 말들도 많다.   

  

영화 〈행복한 사전〉에서는 

‘오른쪽’을 정의 내려 보라고 한다.     

흔히 오른쪽은 왼쪽의 반대라고 생각하지만

다시 왼쪽은 오른쪽의 반대라고 생각한다.

끝없이 이어지는 동어 반복적 정의는

우리말을 이해하는데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한다.  

   

셋째, 영화 말모이에는 어원에 관한

새로운 통찰력을 주는 말이 나온다.

예를 들면 호떡과 민들레의 어원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호떡의 어원은 오랑캐(호)들이 들어와 만든 떡이고

민들레는 ‘문들레’란 말이 어원으로 

사립문 둘레에서 자주 볼 수 있는 꽃이란 뜻이다.     


그밖에도 판수가 설명하는 

후려치기와 휘갈기기,

의자에 앉았을 때 

바닥이 닿지 않는 엉덩이와 

바닥에 닿는 궁둥이의 미묘한 차이는

우리말의 묘미를 깨닫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넷째, 말과 글, 언어와 정신의 공동체가 

만들어가는 관계의 소중함을 깨닫게 해 준 영화였다. 

왜 우리가 우리말을 살려내야 하는지,

말과 글이 한 민족의 정신을 어떻게 통일시키고

연대망을 만들어나가는지를 보여준 수작이었다.    

 

“말은 민족의 정신이요, 글은 민족은 생명입니다.”

말이 없어지면 정신이 없어지는 것이고

그것은 곧 죽음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창씨개명을 통해서 우리는 역사적 아픔을 경험하지 않았던가.     


"사람이 모이는 곳에 말이 있다.

말이 모인 곳에 뜻이 있으며

곧 독립의 길이 있다.”

같은 말을 쓰는 집단을 의미하는 언중(言衆)은 

같은 언어를 쓰면서 동질감과 공동체 의식을 가질 수 있다.     



“글자가 모이면 단어가 되고

단어가 모이면 말이 되며

말이 모이면 정신이 된다.“

조선을 영구히 지배하기 위해

정신을 뿌리 뽑으려고 자행했던 일본이

우리말을 못 쓰게 막은 것도

“말이 곧 정신”이기 때문이다.  

   


목숨 걸고 지켜낸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글, 

한글의 묘미와 위력을 살려내야 한다.

일상에서 쓰고 있는 단어의 의미도 모른 채

늘 사용하던 개념조차도 그 의미를 왜곡해서 

사용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피가 부족하면 빈혈증(貧血症) 치료제를 먹어야 하지만

언어가 부족한 빈어증(貧語症)은 

책을 읽고 개념을 습득해야 치유된다.     

하지만 책을 읽지 않으니 

개념은 더욱 부실해지고

개념이 없으니 책은 더 안 읽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다.     


빈어증을 치료하기 위해

지금 쓰고 있는 언어와 사고와 창의성 관련 책을 

더 집중에서 빨리 완성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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