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 나간 하루의 끝에
밤톨을 깼을 때, 벌레는 이미 죽어 있었다.
아이는 신기해하다가 아주 잠깐 멈췄다.
“죽었어?”
묻는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순간 아이가 무엇을 기대했는지, 무엇이 조금 어긋났는지는 다 알 것 같으면서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다만 아이의 시선이 낮아졌고, 말의 속도가 느려졌다는 것만 분명했다.
우리는 밤톨을 그 자리에 그대로 두었다. 가져오지도 않고, 덮어주지도 않았다. 그냥 ‘원래 있던 곳’에 놓아두었다. 아이는 한 번 더 고개를 숙여 들여다보고는 일어났다. 그 장면으로 끝난 줄 알았다.
그런데 밤이 되자 아이가 다시 그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 그 밤톨, 다시 가볼까?”
낮의 호기심은 이미 끝났다고 생각했던 내가, 그 제안 앞에서 조용히 따라나섰다.
어두운 길은 낮보다 조심스러웠다. 아이는 기억을 더듬어 그 자리를 찾았다. 그리고 낮에 했던 것처럼 몸을 낮추고, 손가락으로 밤톨을 가리켰다. 아이는 한참 들여다보고 “그대로네”라고 말했다.
그 말에는 실망도, 안도도 아닌 무언가가 섞여 있었다. 나는 그 짧은 문장이 아이가 하루를 마감하는 방식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에게는 ‘확인’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어떤 일은 그냥 지나가지만, 어떤 일은 다시 한 번 보고 나서야 자기 안으로 들어간다. 어른의 말로 정리해주는 것보다, 아이가 직접 확인하고 끝내는 편이 오래 남는 장면도 있다.
그날 밤 아이를 따라 걸으며, 섬세함이란 감수성이 아니라 걸음일지도 모르겠다고 느꼈다.
보고, 멈추고, 다시 보고, 자기 방식으로 정리하는 과정이다.
아이는 자기 마음이 납득할 때까지 같은 자리를 한 번 더 찾아간다.
나는 그 확인을 ‘유난’이라고 부르지 않으려 한다. 아이가 끝내는 방식은, 어른이 끝내는 방식과 다를 수 있다. 오늘 밤의 걸음은 산책이 아니라, 아이가 자기 하루를 마감하는 절차였다.
아이의 확인은, 하루를 끝내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