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먼저 알아챈 길
글램핑에 도착하자마자 짐을 정리하고 산책을 시작했다. 아이는 걷는 속도가 빠르지 않다. 예쁜 돌이 보이면 멈추고, 손에 올려보고, 잠깐 생각하다 주머니에 넣는다. 돌을 줍는 동안 아이의 눈은 땅을 보지만, 귀는 늘 다른 곳을 향해 있는 것 같다.
길이 살짝 꺾이는 지점에서 산에서 내려오는 물소리가 들리자 아이가 먼저 고개를 들었다. 소리가 나는 쪽을 찾더니, 물길 가까이로 다가가 몸을 낮추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귀를 그 소리에 갖다댔다. 소리를 ‘듣는다’기보다, 소리의 결을 확인하는 자세였다.
나는 그 모습이 예쁘다고 느꼈다. 예쁘다는 말이 단순히 사랑스럽다는 뜻만은 아니다. 아이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섬세하고, 그 섬세함이 과장되지 않은 채로 몸에 붙어 있다는 뜻에 가깝다.
아이는 혼자 듣고 끝내지 않았다. “엄마, 아빠도 같이 들어봐.” 하고 우리를 불러 세웠다. 그리고 덧붙였다. “명상할 때 이런 소리 들으면 좋겠다.” 아이의 말은 귀엽지만 동시에 조금 놀랍다. ‘좋다’가 아니라 ‘언제 좋다’로 말하는 아이의 방식이, 짧은 산책을 더 길게 만든다.
나는 그 자리에서 잠깐 멈춰 서서, 아이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귀를 기울인다. 물은 얇게 흘러내리고, 그 얇음이 오히려 끊기지 않는 느낌을 만든다. 바람 소리와 섞여서 어딘가에서 계속 이어지는 것 같다.
아이는 우리가 듣고 있는지 확인하듯 한 번 더 고개를 돌린다. 그 눈빛에는 “어때?”라는 질문과 “같이 들었지?”라는 확인이 함께 들어 있다. 그 짧은 확인이 나에게는 이상하게 큰 의미로 다가온다. 아이는 자기 즐거움을 혼자 품기보다, 관계 안으로 가져왔다.
그런데 내가 가진 감정은 예쁨 하나로 닫히지 않는다.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온다. 이 섬세함이 자라면서도 잘 남아 있을까. ‘잘 남아 있게’ 한다는 말도 조금 커 보인다. 사실 하고 싶은 일은 거창한 교육이 아니다. 아이가 이런 소리를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을, 시간이 지나도 부끄러워하지 않게 해주는 일이다.
바쁘다는 이유로 대화를 줄이고, 편하다는 이유로 화면을 늘리고, 불안하다는 이유로 결과를 먼저 묻는 생활 속에서 아이의 감각은 쉽게 구석으로 밀릴 수 있다. 그때 나는 어떤 부모가 될까. 아이의 섬세함을 칭찬으로만 소비하는 사람일까, 아니면 그 섬세함이 살아나는 시간을 지키려는 사람일까.
대치동에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퇴근하는 날들이 이어지다 보면, 자꾸 ‘효율’의 언어로 생각하게 된다. 무엇을 하면 얼마만큼 좋아지고, 어디를 가면 무엇이 해결된다는 식이다. 그런데 지금 내 앞의 장면은 효율과 반대 방향에 있다.
물소리는 당장 아무 결과를 만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아이는 그 소리에 귀를 대고, 가족을 불러 함께 듣자고 한다. 나는 그 장면이 오래 남았으면 한다. 그래서 오늘의 결론은 크지 않다. 지금은 지켜보자는 말밖에 없다.
정확히는 ‘지켜본다’는 말이 무심히 방치하겠다는 뜻이 아니라, 아이의 감각을 밀어내지 않겠다는 약속에 가까웠으면 한다.
아이의 귀가 소리를 향해 기울던 그 자세를, 나는 오래 잊지 않고 싶다.
아이의 감각을 ‘성과’로 번역하지 않기로 한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