쑥 / 반려종의 시선 2장. 아픔과 돌봄에 대하여
어머, 어떡해. 죽어 버렸나 봐. 베란다 창문 너머 갈색이 보였다. 지금 이 계절에는 초록색밖에 보이지 않는데 뭔 일이지 했는데 머리를 때리는 갑작스러운 깨달음. 지속되는 무더위에 화분의 수분이 적당한지 확인해야겠구나 싶었는데 며칠 동안 까먹었다. 잎의 생기가 떨어졌다고 생각하며 물을 줘야지 했는데 시간이 하루가 넘어 가자 치자나무가 쪼그라들었고, 양치식물은 새까맣게 타버렸다. 그래도 치자나무는 수종이 나무인지라 쉽사리 죽지는 않았는데 문제는 양치식물이었다. 양치식물의 고사리는 끝이 말리더니 손끝에서 부서져 버렸다.
전지 가위로 말라 버린 잎을 하나씩 잘라주고, 화분을 물 속에 통째로 넣었다. 화초의 마른 잎을 잘라 주었더니 뿌리만 간신히 남은 상태다. 도저히 살릴 수 없겠다. 그늘 자락으로 밀어 넣고, 물을 천천히 주며 상태를 확인했다. 며칠이 지난 뒤 화분을 조심스레 들여다보니 작은 싹이 보였다. 손가락으로 말라 비틀어진 가지를 쓰다듬으며 미안하다는 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방법이 더 이상 없었다.
쉬어가는 시기에 공부나 하자며 시작한 도시농업과 정원이었다. 소싯적에나 좋아했던 식물을 다시금 알아가며, 중년 이후를 준비해 볼까 다시금 시작한 과정이다. 사람과 시간에 쫓겨 관심사에서 멀찍이 떨어졌지만, 일상에서 느닷없이 식물에 대한 짧은 지식과 욕심이 나타나곤 했다. 처음 보는 식물은 항상 궁금했고, 피어나는 생명의 싹에 탄성을 질렀고, 소멸해 가는 색색깔의 잎은 한숨을 자아냈다.
작년 한 해를 마무리하며 ‘피곤’과 ‘피폐’라는 단어가 내게 들러붙었을 때, 나는 식물을 찾아 살아났다. 하얀 달을 보며 인왕산의 자락길을 걸었고, 붉은 해를 보며 집으로 되돌아왔다. 매서운 바람이 지나가며 매화를 피웠고 산수유가 뒤따라왔다. 발길에 채이던 흙바닥에서 초록의 싹이 나오고, 갈라진 나무 둥치에서 노란 싹이 나왔다. 흐르는 계절의 움직임에 맞춰 나도 산으로 갔다. 햇살과 바람을 느끼며 식물을 집으로 들여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농업 관련 자격증 시험에 합격한 핑계로 그동안 눈에 밟히던 양치식물을 들였다. 지나치다 발견한, 백색의 꽃잎 사이로 향을 풍기는 작은 치자나무도 데리고 왔다. 치자나무는 햇살 좋은 장소에서만 키우면 되는 조건이었지만, 양치식물은 적절한 그늘과 시원한 바람이 필요했다. 베란다 한 켠에 자리를 내주고 여름을 보냈다. 사나흘에 한 번씩 겉흙이 마른 것 같으면 저면관수를 해주고, 바나나 껍질을 잘게 잘라 흙에 섞여 주기도 하면서 식물들을 정성스럽게 다뤘다. 치자나무는 꽃봉오리가 피며 풍성해졌고, 양치식물은 노란 연둣빛의 새싹부터 다갈색의 포자까지 보여주었다.
정말, ‘아차’하는 순간이었다. 화훼시장에서 신중하게 선택해서 들인 식물들의 생사 여부는 내게 부여된 책임이었다. 물주는 기간과 시간을 정하면 되는데 그 간단한 일조차 해내지 못했다. 어릴 때부터 달팽이, 금붕어, 강아지 그리고 고양이를 키우자는 아이의 부탁에 난, ‘딱 하나만 키운다’고 단언했다. 아, 완벽한, 내 실수다. 엄마는 집에 가져오기만 하고, 키우는 건 다른 사람이 하네. 아이가 한 마디를 내뱉는다.
식물에 대해 관심을 다시 가지게 된 계기는 육아를 하면서다. 좁은 집에서 젖먹이 아이만 바라보며 지내자니 숨이 막혔다. 내가 관심을 쏟을 대상이 필요했다.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되는 다육이가 눈에 띄었다. 화분이 크지 않아도 되는 다육이를 선택했다. 가격대가 저가와 고가를 오가는 다육이를 취했다. 햇살과 바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짙푸른 초록이 아닌, 주어진 환경에 맞추어 살 수 있는 다육이를 키웠다. 주거 환경이 바뀌었는데도 다육이는 베란다의 작은 화분에 놓여 있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다육이에서 모양이 특이하거나 색이 예쁜 다육이로 늘어났다.
이번에도 그른 것인가. 뜨거운 햇살에 내놓은 다육이가 급작스럽게 시작된 폭우로 물러지고, 귀엽다고 속살 한번 만졌다고 썩어가기도 했다. 여름 햇살에 비쳐 더 진하게 보이는 고사리의 탄 잎을 보며 짧은 한숨이 나온다. 개미 똥만큼 작은 꽃양귀비 씨앗을 흩뿌려서 충분한 공간을 주고 심어야 하는데 그 많은 씨앗을 화분에 통째로 뿌렸다. 고운 색을 지닌 꽃잎에 튼실하게 여문 씨앗을 채취했다. 화분을 꽉 채워 피어난 새싹은 연두 까펫이었다. 새싹이 더 커지기 전에 빠르게 솎아 주어야 했다.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빨간 양귀비가 아닌, 연한 분홍과 보라 사이의 색을 지닌 꽃양귀비였다. 귀한 꽃은 무참하게, 죽었다.
언제나 ‘제때’가 어려웠다. 남들은 다 잘하는, 그 적당한 때를 놓치고 후회한다. 꽃 배달 서비스가 처음 나왔을 때 신박한 판매 전략에 놀랐다. 특별한 날에만 꽃다발을 구매하는 우리나라 화훼시장에 공격적 판매로 성공 여부가 궁금했다. 아니, 나의 호기심보다 요양병원에 계신 엄마에게 보내고 싶은 마음에 관심이 갔다. 무너져 가던 엄마에게 찬란한 생의 한 자락이라도 그릴 수 있게 했어야 했다. 시골에서 자란 엄마에게 그 정도의 작은 정성은 보여주어도 좋았었다. 마음이 부족했을까? 형편이 부족했을까? 돈이 썩어나가는 짓이었어도 저질렀어야 했다. 자식들 얼굴 보여주면 되겠지 라며 생각과 달리 꽃 한 송이 보내지 못한 마음은 언제나 아프다.
‘꽃을 보니 엄마 생각이 났어.’ 서울숲 어느 정원에 쓰여 있던 문장에 눈물을 왈칵 쏟아냈다. 엄마 집에는 푸른 잎만 피워 내던 맥문동과 향기를 풍기던 흰꽃나도사프란이 있었다. 특별하게 예쁜 화초가 아니었던지라, 이사를 하면서였던가, 살아가며 바빠서였던가, 그 화분들은 없어졌다. 기억에서 지워졌는데, 작은 보라꽃과 까만 열매가 줄줄이 매달린 맥문동과 난초 종류인가 싶었던 식물이 흰꽃나도사프란이라는 이름이 있는 것을 보며 얼마나 놀랬던지. 가을의 농원을 다니다가 엄마의 꽃을 들였다. 새로운 손님으로 샤프란 구근을 심었다. 구근에서 초록 싹이 나와 급하게 심었다. 화분에서 간격을 맞춰가며 추운 겨울을 잘 이겨내라고 말을 했는데, 보라색 꽃이 피었다. 겨울 준비를 하려고 확인한 화분에서 피어 있는 꽃을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내년 봄에 피어야 하는데.
식물은 내게 적절한 시기에 찾아온다. 찾아온 손님에게 적당한 관심을 보여야 하는데, 부족하거나 혹은 과도한 관심으로 제때를 맞추지 못한다. 서로의 생존을 위협하지 않는 적절한 선을 찾아야 한다. 아비스, 보스턴고사리, 블루스타 펀, 후마타, 양치식물을 또 들였다.
다시금 적당한 관심을 보여야 할 시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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쑥
원자폭탄이 떨어진 폐허 속에서 가장 먼저 돋아난 게 쑥이라고 합니다.
나아가야 한다는 조급한 마음에서 벗어나니, 이미 충분한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유 있는 삶의 태도를 가지고자 노력 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