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이 생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민선 / 반려종의 시선 2장. 아픔과 돌봄에 대하여

   모든 것들이 새삼스러워지는 때가 있다.

   정해진 기차 시간에 맞추어 도착하기 위해 다리를 바삐 움직여 죽음으로부터 달아날 때. ‘사람들 여기 좀 보세요. 여기 죽어가는 존재들이 안 보이시나요?’ 마음속에서 터져 나오는 외침을 꾹꾹 누른 채 외면하고 말 때.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까닭을 묻지 않은 채 옆에 놓인 죽음을 두고 꿋꿋이 앞으로 걸어 나갈 때. 그 모든 진실을 목격하고도 끝끝내 침묵할 때.


   매일 아침 집을 나서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은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가는 과정이다. 그 경계는 바로 길가에 위치한 한 횟집이다. 횟집 앞에는 수많은 물살이들을 매일 같이 꼭꼭 채워놓은 수조들이 있다. 수많은 이들이 그 길을 지나다니지만, 아무도 그 존재들을 바라보지 않는다. 물살이들이 물‘고기’가 아니라 생명이라는 사실을 모두가 거짓말처럼 잊어버린듯 하다. 그곳이 나를 삼켜버린 지, 그렇게 생과 사의 경계가 무너진 지 1년이 지났다.


   수조에 갇힌 텅 빈 동공 혹은 저주하는 눈빛의 물살이들, 그들을 바라보며 갈 곳을 잃은 채 우두커니 서 있는 나, 그리고 그 사이를 무심히도 가로지르는 사람들. 수조를 둘러싼 이들은 마치 삼각관계처럼 서로의 뒤통수만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수조 속 삶의 끝은 곧 죽음이었기에 우리의 눈맞춤은 언제나 죽음을 애도하는 마음과 다름없다. 죽음에 대한 장면은 그 무게에 비해 쉽게 허공을 가르고 서서히 희미해져 간다.


   언젠가부터 수조 속 눈들을 피하고 싶어졌다. 더 이상 눈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어떤 날은 참치의 눈이었고, 어떤 날은 숭어, 어떤 날은 광어의 눈이었다. 또 어떤 날은 내가 이름을 더 이상 알지 못하는 어느 물살이었다. ‘제철회’를 탐하는 사람들의 다채로운 입맛을 맞추기 위해 1년 내내 물살이들의 죽음이 끝없이 이어졌다. 영원히 반복되는 굴레에 갇혀버린 것만 같았다.


   어느 날 아침, 몸이 뒤집혀 배가 둥둥 떠 있던 참치를 발견하곤 고개를 휙 돌리고 말았다. 그의 시선이 너무나도 선명했다. 방금 전까지 수조 바깥을 선명히 바라보았을 눈동자. 수조를 무심히 지나치던 수많은 인간들을 보고 또 봤을 눈동자. 별 볼 일 없는 하루를 마치고 저녁이 되었다. 횟집과 거리가 점점 가까워질수록 섬뜩한 마음이 들어섰다. 이번에는 눈을 피하지 않고 그의 죽음을 온전히 마주하기로 생각했다. 시선을 수조를 향해 고정한 채 가까워졌을 무렵 아침의 그는 온데간데없고 새로운 참치가 빈자리를 메꾸고 있었다. 깰 수 없는 악몽이 반복되다 결국 현실을 잠식해 버린 게 틀림없었다.


   얼마 뒤, 나는 꿈에서 죽었다. 중력이 무한하게 팽창하는 듯 온몸이 짓눌리는 고통이 순간 찾아왔다가 모든 것에서 해방되는 듯 온몸이 가벼워졌다. 마치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물살이가 된 것만 같았다. 죽음의 감각은 중력을 거스르며 온몸에 해방감이 스며드는 그 감각과 참 닮았다고 생각했다. 끝없는 자유에 대한 동경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한 끗 차이인 것을 깨닫고야 말았다.


   미련하게 수조를 바라보던 현실은 나의 꿈이 되었고, 꿈과 현실의 경계는 흐려져 간다. 죽음으로써만 경험 가능한 생명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갔다. 눈을 감으면 보이는 장면들이 있다. 그것이 괴로워 눈을 끝내 감지 못하는 날들이 이어졌다.


   나, 광어는 넓적한 물살이.

   나, 광어의 몸은 겹겹이 쌓여 수조 속을 차곡차곡 채운다.

   나, 광어는 또 다른 광어에 의해 짓눌린다.

   나, 광어의 눈은 또 다른 광어에 의해 가리워진다.

   나, 광어는 본래 바닷속 가장 밑바닥에서 모든 진실을 지켜보는 존재.

   나, 광어가 세상의 끝에서 목격한 진실은 내 위에 모든 존재들이 자꾸만 사라진다는 것.

   나, 광어는 질긴 밧줄들에 숨통이 조여오고.

   나, 광어에게는 더 이상 파고들 수 없는 모래만이 미련하게 남아있다는 것.


   기차를 타고 가다 노량진수산시장 간판에 적혀 있던 문구를 발견했다. 노량진수산시장은 살아 숨쉬는 바다입니다. 허무함을 참을 수 없어 나의 숨을 참았다. 몸을 가득 채운 답답한 숨을 후우- 내뱉었다. ‘숨쉬는’ 나의 폐가 팽창했다 줄어드는 것을 느낀다. ‘살아’있음을 깨닫게 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숨 막히는 순간이다. 나의 몸이 기억하는 ‘바다’를 떠올린다. 모든 것이 물결에 따라 살랑거리는 곳. 바다에서는 인간으로서 결코 자신의 숨을 쉴 수 없다. ‘바다’에서 ‘살아 숨쉬는’ 이는 인간도 그 누구도 아닌 오로지 물살이들뿐이다. ‘노량진수산시장’에서 ‘살아 숨쉬는’ 것은 바다도, 물살이도 아닌, 미련한 인간들뿐이다.


   어쩌면 오늘 이후로 다시 만날 리 없는 귀한 내 친구들아 동시에 다 죽어버리자

   그 시간이 찾아오기 전에 먼저 선수 쳐버리자

   내 시간이 지나가네 그 시간이 가는 것처럼 이 세대도 지나가네

   모든 것이 지난 후에 그제서야 넌 화를 내겠니

   모든 것이 지난 후에 그제서야 넌 슬피 울겠니¹


   나는 나의 죽음을 자주 곱씹었다. 숨을 쉬는 것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날이 늘었다. 횟집을 지나치는 모든 순간에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나의 죽음을 떠올렸다. 죽음을 입에 머금는다는 것은 버거운 생을 포기하는 것인 동시에 하나뿐인 생에 대한 처절한 열망이기도 했다. 생과 죽음 그 사이에서 그들 옆에, 아니 우리로서 나란히 서야만 했다. 인간인 나의 양심을 채우기 위한 알량한 욕심일지라도 생에 대한 갈망을 감각해야만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을 피하기 위해서는 영영 떠나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주어진 생을 감당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존재를 짓누르는 죽음의 무게를 견디는 것과 다름없다. 도처에 널린 죽음을 또렷이 응시해 본다. 살아남은 이들의 생경한 눈동자를 마주해 본다. 우리 같이 죽음에 대해 노래하자고, 그렇게 우리 함께 생으로 나아가자고 말을 건다. 기억할 모든 죽음과 넋들에게 – 자신의 것을 포함해 – 초를 밝힌다. 우리의 생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²


-

민선


생과 사의 경계에서 위태로운 이들 옆에, 우리로서 나란히 선다.

생에 대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흔들리며 버티는 순간들을 쓴다.

죽고 싶지 않아서, 살아있음을 감각하고 싶어서, 바다에 간다.




1 이랑, <환란의 세대>

2 한강, <흰>

작가의 이전글 적당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