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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갯빛 농민

이완 / 2022 소소기록 희망의숲 청년 농부의 시선

   올해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에서 주관한 ‘2022년 주요 농업 관련 교육기관 성평등 모니터링 사업’에 조사자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마침 한창 바쁜 농사철이었습니다. 보랏빛으로 익어가는 붉은 어금니동부콩을 수시로 따주고, 주먹찰옥수수대를 눕혀 마늘밭을 준비하는 등 줄지어 기다리는 밭일로 마음이 분주했지만, 시간을 내어 하반기에 몰린 농업 교육을 찾아 진득하게 엉덩이를 붙이고 수업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농업 교육에 성인지적 감수성이 어느 정도 녹아들었는지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비록 밭에선 수확이 늦어졌지만, 모니터링을 하며 농사와 관련된 정보와 배우는 재미를 덤으로 얻었습니다.


   ‘성인지 감수성’이란 말은 들어보셨나요? 일상에서의 성차별 및 성역할에 따른 불평등과 불합리함을 감지하는 민감성을 말합니다. 특히 가부장제 농촌에서 인권 사각지대에 있는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단단히 키워야 할 능력입니다.


   눈여겨봐야 할 성평등 모니터링 체크리스트에 있는 항목은 이렇습니다. 농촌의 남성 중심적 문화를 당연시하는가? 여성다움과 남성다움에 대한 고정관념을 표현하는가? 일하는 농업인의 이미지가 남성이고 여성은 돌봄 담당자로 표현하는가? 작목반, 마을 대표성의 남성성을 당연시하는가? 4인 가족을 전형적인 가족 유형으로 삼는가? 등입니다. 물론 여전한 농촌의 현실이기도 하지만 교육이라 한다면 응당 짚고 가야 할 지점입니다.


   가령 교육 자료에 나온 예시에 여성 이미지는 분홍색, 남성 이미지는 파란색으로 표현했다면 고정관념이 담겨있다고 봅니다. 또한, 공익직불제 교육 자료로 ‘직불리 어벤져스’ 영상을 3편 시청했는데, 농업인의 이미지를 남성화하고 마을에서 활동하는 남성이 대표성을 띠는 문화를 재생산하고 있었습니다. 하물며 여성농업인은 보조자의 역할로도 거의 나오지 않았죠. 이렇듯 여성농민이 배제되고 성인지적 감수성이 결여된 자료가 배포되고 있다는 점이 유감이었습니다.


   모름지기 교육생이 한 걸음 나아가도록 진취적이어야 할 수업이 여전히 성별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과거에 묶여 있었습니다. 누구든 단지 인간으로서 개개인의 역할을 존중받고 삶의 다양성을 인정받아야 한다는 인권이라는 것이 농촌에서는 과연 언제까지 머나먼 이야기처럼 들리게 될까요?


   하지만 어쩌면 그리 멀지 않은 것도 같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저 스스로를 봐도 무지갯빛 인생인걸요. 처음에 퀴어로서 비혼 공동체를 이루며 정착을 시작해서, 지금은 아이 셋을 낳은 엄마로 정체성을 탈바꿈하기도 하고요. 지역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생태농사 수업을 진행하고, 토종 유전 자원을 지키는 여성농민 활동도 주체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밭에서 땅을 일구어 작물을 보살피는 일 자체가 저에게는 다양성을 가장 잘 인정하는 일이 아닌가 싶어요.


   논밭은 만물의 집이에요. 인간에게 이로운 풀과 열매가 이렇게 많다니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작은 씨앗의 싹을 틔워 연약했던 줄기가 우뚝 서도록 돌보아 거두고 음식으로 입에 넣어 똥으로 내놓아 다시 포슬한 흙이 되기까지의 자연스러운 여정에 성별에 따른 위계가 어디 있을까요. 아마 제가 십수 년간 귀농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이어온 데에는 마을에 앞서 지역 생태계에 소속감을 느꼈기 때문일 겁니다. 산과 밭에서 계절마다 나오는 여러 약초를 채취하고 손질하여 누군가에게 전달하는 매개자로, 오롯이 존재하겠다는 초심이 제 곁에 있었습니다.


   또한, 농민의 삶이 멀리서 보면 비슷비슷해 보여도, 가까이에서 보면 제각각 다릅니다. 사는 집의 모양새도 규격화되지 않아 다를뿐더러 농민마다 저마다의 농법이 있으며 재배하는 작물 생리에 맞춘 노동 시간, 노지인지 비닐인지 스마트 팜인지, 생태농·자연농·유기농·무농약·관행농 등의 차이, 농지 규모의 차이, 1인인지, 2인 이상의 공동체인지, 후계농이나 가족농인지, 법인인지, 품을 팔며 사는지 등등.


   한편 세대나 사고방식에 따라 조선 시대 유교적 가부장제에 사는 듯한 사람부터 대안적인 삶을 찾아 농촌으로 온 MZ 세대 젊은이도 있습니다. 특히 여성농민은 전업농인지, 연고가 있는지, 자녀가 있는지에 따라 지역에서 관계 맺는 삶의 구성도 달라집니다. 하지만 이러한 삶의 폭넓은 스펙트럼이 농촌에서 잘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까닭은 없어서가 아니라 소외되었기 때문일 가능성이 큽니다.


   다름을 받아들이는 열린 마음은 스스로 깨어나가지 않으면 굳어버리기 십상입니다. 저 역시 작은 동네에서 익숙한 일과 사람만 반복적으로 마주하다 보면, 새로운 것에 마음의 문이 열리는 속도가 더뎌지는 경험을 합니다. 그러니 한편으로 기성 세대의 태도가 이해는 되지만, 텃세를 부리는 꼰대는 우물 안 개구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나지막한 목소리를 애써 들어보려는 일상적인 노력이 더욱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성인지 감수성을 기르기 위해 마을 모임에서 영상이나 책을 보고 이야기를 나누는 건 어떨까요. 사람들과 모이는 것이 부담스러우면 나름의 생각을 SNS에 공유하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받아들일 마음으로요.


   앞으로 농업 정책과 교육에 있어서도 성평등을 기초로 농촌의 다양성을 적극 반영한다면, 시골 공동체의 무지갯빛 건강함이 빛날 것입니다. 다채로운 무늬의 그림에서 나오는 역동성과 창의성이 농촌 생태계의 가장 큰 힘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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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박효정)


농사, 글, 밥 짓는 농부입니다.

어릴 때부터 뒷산을 오르며 자연과 교감하는 기운으로 살았어요.

죽을 때도 밭에서 일하다 흙으로 돌아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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