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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농부가 된 진짜 이유

파슬리 / 2022 소소기록 희망의숲 청년 농부의 시선

   2021년 3월 어느 날, 나는 교통사고를 당했다. 자전거를 타고 퇴근하다 차에 치인 것이다. 차에 부딪혀 몸이 아스팔트 땅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사고 자체는 크지 않았다. 하지만 제때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해 다시 일어서기까지 힘든 시간을 겪어야 했다. 채 10분을 제대로 앉지도 서지도 못하는 날들이 계속됐다. 더딘 회복에 이대로 삶이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침대에 누워 따뜻해진 창가를 바라보고 있던 날이었다. 문득 저 창가에 식물이 있었으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다. 무엇을 키우면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마침 직장 동료들 사이에서 바질을 키우는 것이 유행하던 참이었다. 핸드폰을 들어 망설임 없이 바질 키우기 세트를 주문했다. 아마 절망과 우울에 휩싸인 나에게 살아있는 무언의 존재가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봄꽃이 만개했다. 5월이 되었다. 통증에 고통스럽던 날들도 조금씩 지나가고 있었다. 왕복 두 시간 거리에 있는 병원으로 재활치료를 받으러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몸이 나아졌다. 이 역시도 쉽지 않았지만, 다시 제대로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나의 회복과 함께 바질도 어느새 싹을 틔우고, 잎을 키워가고 있었다. 집에서 매일같이 바질을 관찰했다. 물을 주고, 햇빛을 보여 주고, 바람을 쐴 수 있게 창문을 열어 줬다. 하루가 다르게 키를 키워가는 바질을 보며 나는 강한 생명력을 느꼈다. 그렇게 나도 버티고, 바질도 버텼다. 온몸으로 흙을 뚫고 나와 새싹을 내미는 그 모습. 물이 부족해 시들시들하다가도 어느새 다시 활짝 잎을 펼치는 그 강인한 생명력! 누구의 어떤 이야기도 위로가 되지 못했던 힘든 순간, 바질은 내게 유일한 위로가 되어 주었다.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계절이 되었다. 나의 눈물나는 재활기는 계속되었고 그동안 바질은 나에게 몇 번이나 신선한 샐러드가 되어 주었다. 찬 바람이 불 때까지 바질은 계속 성장했다. 나의 몸도 함께 성장을 거듭했다. 때론 바질이 시들면 나도 시드는 것 같았다. 바질이 다시 활짝 피면 나에게도 기쁨이 넘쳤다.


   나는 그때 결심했다. 작은 농부가 되고 싶다는 결심. 비록 도시 한복판에 살고, 땅도 하나 없지만 무언가를 키우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느꼈다. 어쩌면 이것이 이기적인 마음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행복과 기쁨을 위해 농부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것 말이다. 내가 만날 식물들에게 과연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 줄 수 있을 것인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만은 분명했다. 심장이 뛰었다. 간절히 농부가 되고 싶었다. 그럼 내 몸도 더 건강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농부가 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그래, 우선 농부가 될 수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자!’ 처음 든 생각이었다.


   매서운 바람이 불던 그해 겨울, 나는 어느 2층 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집 밖에 화분을 키울 수 있는 공간이 있는 곳이었다. 이 곳에서라면 화분 텃밭을 마음껏 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따뜻한 봄을 기다리며 공부를 시작했다. 화분 텃밭을 가꾸는 방법, 필요한 도구들, 어떤 작물을 함께 심으면 좋을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이미 마음만은 작은 텃밭의 늠름한 농부였다.


   마침내 기다리던 봄이 왔다. 겨울 내내 마음 속에 그려 온 텃밭을 펼칠 시간이 왔다. 우선 인터넷으로 모종을 주문했다. 오이와 대파, 방울토마토와 고수, 고추와 바질. 내가 지어준 텃밭의 짝꿍들이었다. 비록 글로 배운 농사이지만, 함께 심으면 서로의 생장에 도움을 준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2층 계단을 큰 화분과 흙 포대를 들고 몇 번을 왔다갔다했다. 텃밭의 탄생을 축하해 줄 친구들을 초대해 함께 모종을 하나하나 심고 물을 뿌려 주었다. 유난히 바람이 많이 불던 어느 봄날, 나는 마침내 작은 농부가 되었다.


   폭염과 폭우가 반복되던 여름, 걱정과는 달리 텃밭의 작물들을 엄청난 성장을 거듭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창문을 열고 화분 텃밭을 관찰했다. 어제 보다 더 자란 줄기와, 새로이 달린 꽃, 열매를 보며 벅찬 마음을 느꼈다. 매일매일이 기대되는 여름날이었다. 빨갛게 익은 탐스러운 방울토마토를 한 바구니 넘게 수확할 수 있었고, 오이도 개수는 몇 개 안 되지만 제 모습을 갖춰 주었다. 고수는 하얗게 피운 작은 꽃에서 진항 향기를 풍겼다. 고추는 먹기 버거울 만큼 풍성하게 달렸고, 그 옆의 바질도 고추와 나란히 키를 키워 주었다.


   다시 쌀쌀한 바람이 불어왔다. 텃밭을 정리하며 지난 시간을 되돌아 봤다. 나에게 찾아 온 작은 바질 씨앗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고통에 지쳐있던 나의 지난 날들도 떠올랐다. 새삼 그 작은 씨앗이 보여 준 엄청난 생명력과 희망에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위로 받았고, 희망을 얻었고, 그래서 힘든 시간을 이겨낼 수 있었다. 작은 농부가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작은 농부가 된다는 것은 매일매일이 기다려지는 삶이었다. 삶의 원동력, 그리고 할 수 있다는 용기. 어쩌면 이것이 내가 농부가 된 진짜 이유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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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슬리


농사는 모르지만 농부가 되고 싶은 욕심쟁이예요.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먹거리의 관계, 그리고 건강한 요리에 관심이 많아요.

정성껏 차린 한 그릇의 음식을 소중한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삶을 꿈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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