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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일이 죄가 되지 않도록

양지 / 2022 소소기록 희망의숲 청년 비건의 시선

   ‘부부의 세계’라고 한때 굉장히 유명했던 드라마가 있다. 장기간의 외도와 다른 사람과의 임신이 모두 들통난 상황에서 남편 태오는 아내 선우에게 이렇게 말한다. “사랑에 빠진 게 죄는 아니잖아~!” 스스로의 무책임을 회피하기 위한 태오의 항변에 쓴웃음을 지었던 기억이 난다.


   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무언가를 사랑하고, 어느 순간 마음을 빼앗겨 쉽사리 헤어 나오지 못한다. 모든 사랑이 인정받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사랑은 사랑이라는 이유만으로 많은 판단을 보류하게 한다. 흐린 시야로 멍청한 짓을 벌이기 전에, 내 사랑을 점검해 보고 싶다. 지금이 딱 그 타이밍이다!


   최근에 나는 실과 바늘로 무언가를 만드는 일에 빠져있다. 집 한편에 마련한 조그마한 작업실에 앉아 무엇을 만들지 상상한 후, 두껍고 누르스름한 크라프트지 위에 연필과 자를 이용해 물건의 본을 뜬다. 날이 잘 드는 재단용 가위를 쥐고 사각사각 원단을 자른 뒤, 리드미컬한 재봉틀 소리에 맞춰 한 땀 한 땀 바느질을 해주면 어느새 새로운 기능을 가진 물건이 탄생한다! 쓸모를 만들었다는 만족감은 나를 더 안정적으로 만든다.


   처음엔 단순한 취미로 바느질을 시작했다. 마침 집 근처에 쏘잉 클래스가 열렸고, 아무 생각 없이 등록했다. 그때는 수업이라고 할 것도 없이, 그저 강사님의 지시에 따라 재봉틀을 돌리면 무언가가 만들어졌다. 참 신기했다. 그러다 진지하게 직종 전환을 고민했고, 지금은 매주 30년 경력의 괴짜 같은 선생님에게 의류 패턴 수업을 받고 있다.


   자주 내용이 변하지만, 벌써 이 일에 대한 몇십 년의 계획이 머릿속에 있다. 마치 데이트 몇 번에 결혼 계획도 세우고, 아이는 몇 명 낳을지 상상해보는 그런 상황이랄까? 존재할지 모르는 미래의 수강생들을 위해 커리큘럼을 구상해 보거나, 유튜브 촬영 콘셉트와 썸네일을 기획해 본다. 먼 훗날 세울 아카데미 공간을 미리 그려보거나, 혹시나 남편이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홀로 제3세계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며 생을 마감하리라는 상상도 해본다.


   이렇게 글을 쓰다 보니, 생각보다 나는 이 일에 진심인 것 같다. 그렇기에 더욱 이 사랑을 점검해야 한다. 아주 오래도록 이 일과 함께 하고 싶고, 쉽게 지치지 않고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이 내겐 필요하다. 점검의 기준은 몇 달 전에 시작한 비건 지향 생활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삶의 다양한 데이터가 쌓여 임계점을 건드렸고, 결국 나는 비건 지향을 선택했다. 이후 나를 둘러싼 세계와 인간사에 배신감을 많이 느꼈다. 세상이 지옥으로 보였다. 가끔은 비건 지향이라는 게 악순환을 어떻게든 희석시키려는 미약한 버둥거림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이 일은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는 일이고, 자긍심을 가져야 하는 일이라고 믿는다. 사랑함에 있어서도, 비건 지향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이 일은 우리 삶에 교묘히 공존하는 거대한 폭력에 맞서는 행위이며, 폭력이 감춰진 사랑은 그 가치가 크게 훼손되기 때문이다.



   내가 오랫동안 몸담게 될 의류업계의 가치가 얼마나 크게 훼손되었는지 먼저 이야기해야겠다. 위 사진은 서아프리카에 위치한 가나의 오다우강 근처의 모습이다. 물자가 풍부한 나라에서 기부라는 명목 하에 버려진 옷들은, 흘러 흘러 이곳에 쌓이게 된다. 이곳에 사는 소들은 싱싱한 풀이 아닌 축축한 옷을 뜯으며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옆으로 오염된 오다우강이 흐르고, 사람들은 그 물을 사용하며 살고 있다.


   옷은 원단으로 만들어진다. 원단은 가느다란 실을 수만 번 교차하여 직조되고, 실은 식물의 줄기와 껍질, 동물의 털, 석유에서 추출한 고분자 화합물 등의 섬유로 만들어진다. 섬유 - 실 - 원단 - 옷 순이다. 이 과정은 거꾸로 진행되기 힘들다. 많은 에너지와 비용이 들뿐 아니라 애초에 섬유로 되돌릴 수 없는 지점도 있기 때문이다.


   매년 생산되는 옷은 1,000억 개, 같은 해 버려지는 옷은 330억 개다. 이와 같은 숫자는 다뤄본 적이 없어 가늠하기 어렵다. 버려지는 옷은 가나와 같이 힘없는 나라로 흘러간다. 가나 인구는 3,000만 명, 매주 수입되는 헌 옷은 약 1,500만 개다. 워낙 많은 수가 버려지다 보니 그 옷들은 자연으로 돌아갈 시간도 없고, 나일론 같은 화학 섬유들은 플라스틱과 마찬가지여서 잘 썩지도 않는다.


   원단에는 크루얼티(Cruelty)가 만연하다. 실크는 누에고치로 만드는데, 사람들은 누에가 나방이 되길 기다리지 않는다. 바깥 사정을 모르는 누에는 나방이 될 준비를 하며 고치 안에 잠들어 있다 봉변을 당한다. 고치와 함께 뜨거운 물에 데쳐지는 것이다. 그래야만 손상되지 않은 고치를 얻을 수 있고, 더 많은 양의 실과 고품질의 실크를 생산해 낼 수 있다. 이제는 실크도 옛말이다. 아주 값싼 나일론이 실크의 역할을 대신한다. 실크는 사양산업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대신 다수의 사람들이 싼값에 옷을 입고, 쉽고 빠르게 소비된 옷은 가나에 버려진다. 악순환의 순환이다.


   의류 산업의 가치는 폭락하다 못해 휴지조각에 가깝다. 이렇게 나열하다 보니 입안이 씁쓸하다. 어쨌든 이 휴지조각 같은 세상에서 옷을 만들고 있는 내가, 조금이라도 제대로 살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지 지금부터 적어보고자 한다.


   옷을 배우면 가봉이라는 개념을 익히게 된다. 가봉은 옷을 완성하기 전에, 광목이라 불리는 얇은 면직물로 형태를 만들어 핏을 살펴보는 일이다. 가봉으로 만들어진 옷은 만든 이가 고이 간직할 수도 있지만, 완벽한 핏을 위한 과정의 산물에 가까워서 역할을 다하면 대부분이 버려진다. 이 업계 사람들에게 가봉은 거의 필수다. 나는 광목 가봉에 심각한 죄책감을 느꼈다. 방법을 강구한 끝에, 선거철마다 버려지는 몇 천 톤의 현수막이 생각났다. 구청에 전화를 걸어 현수막을 얻었고, 나는 폐현수막으로 가봉을 시작했다.


   또 다른 노력은 중고 의류에서 원단을 잘라 쓰는 일이다. 그런데 이 방법은 쉽지 않다. 선별된 옷을 판매하는 빈티지 샵이 아닌 이상, 마음에 드는 원단을 지닌 의류를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고, 한 번은 관리가 안된 의류를 사는 바람에 여러 번 세탁하는데 애를 먹기도 했다. 그리고 주변분들 중에 중고 의류에 대한 거부감을 나타내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상품을 팔아야 하는 입장에서 굉장히 신경 쓰이는 지점이 아닐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가족들에게 받아온 중고 의류에서 나는 한 가닥 희망을 발견했다. 우선 관리가 잘 된 상태였고, 그다지 오래된 옷도 아니라서 원단도 꽤나 마음에 들었다. 가족들에게 답례로 가방이나 모자를 만들어주자 신기해하고 행복해했다. 본인의 옷이었기에 중고 의류에 대한 거부감도 전혀 없었다.


   가장 최근의 노력은 유기농 소재의 원단을 찾는 일이다. 안타깝게도 유기농 원단 집은 극히 드물고, 그나마도 도매상 위주로 돌아간다. 지금은 간신히 찾은 유기농 원단으로 여러 실험 중에 있다. 원단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 천연염색을 해보거나 아플리케 작업을 해보곤 한다.


   아직 자신은 없지만, 앞으로의 계획은 내 사랑을 열심히 키워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직물을 고쳐 쓰거나, 직물로 새로운 물건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을 누군가에게 줄 수 있다면, 그것 또한 나름 선방한 인생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스스로 가치를 만들고 지켜나갈 수 있는 사람은 소비 말고 다른 것에 더 집중하지 않을까?


   내가 즐겨 듣는 노래 중에 검정치마의 안티프리즈라는 곡이 있다. 창작가의 의도는 잘 모르겠으나, 기후 위기를 걱정하며 살아가는 청년 비건에게 아주 찰떡같은 가사인 것 같다. 우리는 얼어 죽는 게 아니라 타 죽는 거겠지만. 그때까지 이 노래의 가사말처럼 춤을 추며 절망이랑 싸울 테고, 변하지 않을 그런 사랑은 없겠지만, 그 사랑을 기다려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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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지


비건 지향 6개월 차, 갓 태어난 따끈따끈한 베이비 비건이다.

삶에 큰 변화를 맞이했고, 달라질 앞으로의 시간들을 은근히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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