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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쓰지 않는 존재함을 위하여

민선 / 2022 소소기록 희망의숲 청년 비건의 시선

   미지의 영역이었던 바다, 나는 오랫동안 그곳을 동경해왔다. 그 감정은 부끄럽게도 바다의 외적인 아름다움을 탐한 것이었을 뿐, 바다에서 살아가는 존재들과 그 내면에 대한 관심은 아니었다. 그러나 바닷속 쓰레기를 수거하는 수중청소 활동에 함께하기 위해 스쿠버다이빙을 시작한 이후로, 나는 새로운 세상을 마주하게 되었다.


   바닷속에는 무한히 펼쳐진 공간을 한계 없이 누비는 존재들이 있었다. 자본으로 점령당한 영역이 없었고, 모든 존재들이 서로의 자리를 넘나들며 공존하고 있었다. 서로를 가로막는 울타리도, 경계도, 제재도 없었다. 그곳을 방문한 인간 동물인 나 또한 그저 한 명의 살아있는 존재로서, 고요한 적막이 맴도는 바닷속에서 물살이들과 시선과 감각을 주고받을 뿐이었다. 이로써 하나의 지구라는 생태계 안에서 인간 언어의 무용함을 깨달았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들이 살랑거렸다. 물살에 따라 춤을 추며 어떤 이의 움직임이 나에게로, 나의 움직임은 누군가에게로 끊임없이 전해지곤 했다. 바닷속에 존재하는 모든 이들은 물을 통해 서로가 맞닿아 있었고, 그 오묘하고도 신비한 감각만으로 서로의 살아있음을 흐릿하게나마 느낄 수 있었다. 바닷속에서 물살이들과 맞닿아있던 이 경험은 그 무엇보다 나를 압도했다. 바다 바깥에서 바라본 거대한 파도보다도.


   내가 처음으로 바다에서 만난 존재는 어느 한 쥐노래미였다. 그의 등에는 어두운 색깔의 기하학적인 체크무늬가 펼쳐져 있었다. 나에게 큰 관심이 없어 보이는 대부분의 물살이들 사이에서 나와 눈을 마주친 그는 나를 의식하는 듯 거리를 좁혔다 멀어졌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서로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의 커다란 눈은 마음 깊이 새겨져 그가 사라진 후에도 잊혀지지 않았다.



   나는 내가 조우한 그 존재가 누구였는지 알고 싶었다. 그의 이름 ‘쥐노래미’를 인터넷 검색창에 입력했다. 하지만 고작 인터넷에서 나는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검색 결과를 보자마자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인터넷에는 낚시로 잡았다며 자랑하거나, 횟집에서 홍보하기 위해 올린 사진들이 가득했다. 전부 죽어있는 쥐노래미의 모습들. 심지어 많은 이들이 블로그를 통해 쥐노래미에 대한 정보를 공유했는데, ‘잡어’지만 맛은 있다며 요리 방법을 소개하고 있었다. 그의 살아있음을 전제로 하는 글과 사진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 이후에 만난 여러 물살이들 모두 그러했다. 화려한 노란색의 점이 등에 흩뿌려진 용치놀래기를 검색했을 때도, 모래바닥에 납작 엎드려 몸을 숨겨 다니는 광어를 검색했을 때도, 바닷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물살이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물살이’가 아닌 ‘물고기’의 모습만을 소비했다. 우리와 함께 지구의 어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 인간을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사용해도 되는 도구처럼 여겨질 뿐이었다.


   바다의 찰랑거리는 물결을 닮은 어느 바다민달팽이의 모습에 온통 정신을 빼앗겼던 그날도 바다의 아름다움에 취해있었다. 그러던 찰나, 머릿속으로만 알고 있던 그것을 마주했다. 바로 ‘물살이’를 ‘물고기’로 만드는 ‘통발’이었다. 물살이들이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촘촘하게 그물을 엮어 통으로 만든 도구로, 바닷속까지 침범한 인간의 탐욕을 증명했다. 자유로운 바다에서는 통발을 경계로 죽음과 삶이 나누어졌다. 그 통발에도 쥐노래미 한 명(命)이 갇혀있었다.


   문득 매일 아침마다 지나치던 물살이들이 떠올랐다. 나는 집에서 나와 지하철역까지 약 5분 거리를 걸어간다. 짧은 경로 내에 지나치는 어느 한 횟집은 식당 앞 거리에 자랑스럽게 4개의 수조를 내어놓았고, 그 수조들은 어느 때나 물살이들을 빼곡하게 가두고 있었다. 가늠할 수도 없이 많은 온 세상의 수조를 채우기 위해 얼마나 많은 통발들이 바닷속에 던져졌을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나는 언제부턴가 항상 지나쳐왔던 그 수조 안의 존재들을 의식하게 되었다. 참치는 자신의 몸에 딱 맞는 수조에서 움직이지도 못한 채로 바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고, 모래 속에 자신의 몸을 숨겨 지내는 광어들은 서로의 몸에 겹겹이 쌓여 움직이지 못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을 바라보면 마음이 울컥해져서 눈길을 길게 두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살아간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어떠한 의미일지 상상하면 할수록 눈을 질끈 감게 되었다. 그러다가도 그들의 얼굴을 기억하고 애도하고 싶어 바깥을 빤히 바라보는 눈을 마주할 때면 그 눈맞춤이 너무나도 생생해 오래도록 잔상이 남았다.


   바닷속에서는 애쓰지 않아도 존재하고 있다는 감각이 당연하게 느껴진다. 부력을 잘 조절하면 마치 우주처럼 중력이 없는 듯 몸이 둥둥 뜨기 때문이다. 몸의 힘을 뺀 채로 물살을 가르며 헤엄칠 때면, 마냥 영원을 바다에서 존재해온 것처럼 느껴졌다. 통발과 그물은 이 모든 것을 앗아가는 아픔이었다. 춥고 어두컴컴한 수심 30m 바닷속에서 다이버들이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길어봤자 20분. 짧은 시간 동안 어떤 이는 통발에 틈을 만들어 물살이를 풀어주고, 어떤 이는 얽혀있는 통발들을 끊어 수면 위로 올려 보내고, 어떤 이는 남아있는 통발들을 찾아 나선다. 고작 통발 5-6개를 건져내기 위해 다이버 열댓 명이 온 하루를 바쳐 애쓰기도 했다.


   비건을 지향하며 나는 종종 의심과 괴로움에 사로잡히곤 했다. ‘내가 고기를 먹지 않음으로써 진정 해방을 실현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 ‘당장 내가 고기를 먹지 않아도, 어느 곳에서는 통발에 갇혀 물살이들이 죽고 있겠구나.’하는 절망. 도처에 널린 횟집과 수조를 보며 느끼는 지긋지긋한 자책. 통발을 건져내는 수중청소는 이러한 나에게 한 줄기 빛이 되었다.


   바닷속 쓰레기를 수거하는 수중청소 활동은 단순히 쓰레기를 건져내는 행위가 아니었다. 바다의 자유로움을 되찾기 위한 해방운동이자, 거대한 인류의 폭력에 대항하는 불복종 행동이었던 것이다. 배 한 척이 통발을 수십, 수백 개 던져 수많은 물살이들을 휩쓸어갈 때, 그렇게 인간의 끝없는 욕심 아래 수조를 그들의 몸으로 채워나갈 때, 버려진 통발들에서 물살이들을 풀어주고 그것을 세상에 꺼내놓는 행위. 이는 무구한 인간의 착취 역사에 맞서 오롯이 바다와 물살이들 옆에 서겠다는 선언이었다.


   어디서 길을 걷든 수조에 갇힌 물살이들을 마주하곤 한다. 당장 오늘 아침에도 마주한 수조 안 물살이들과의 눈맞춤이 생생하다. 통발과 그물로부터 물살이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시간이 너무나도 애절하게 기다려진다. 그럼에도 버려진 통발이 아닌 경우 그 통발을 찢어 물살이를 구조할 수 없는 답답한 현실이다. 불법이란다. 이제 시작된 나의 수중청소, 여기서 비롯한 선언이 어디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머릿속에는 이런 상상들이 가득하다. 바닷속 모든 통발과 그물을 찢어버리고선 바다 밖으로 나와 횟집 앞 수조들의 물살이들을 바다에 풀어주는 상상. 물살이들이 끝없는 바다를 향해 영원히 헤엄쳐갈 수 있도록. 애쓰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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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선


살아있는 것들을 사랑하고, 사라지는 것들을 붙잡고 싶은 한 인간.

아름다운 바다와 생명들, 다정한 글과 음악을 애정합니다.

나의 연약함이 모두의 용기가 될 수 있다고 믿기에,

아픔과 분노를 온 마음으로 드러내는 활동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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