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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 맺기의 즐거움

짱소 / 2022 소소기록 희망의숲 청년 비건의 시선

   나에게 있어서 비건 지향의 즐거움은 단연 먹는 것에 있다. 가지의 쫀득쫀득한 식감과 콩의 고소하고 담백한 맛. 그런데 이 가지와 콩, 어디에서 온 거였더라?


   비건 지향을 하면서는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았든, 대량으로 빠르게 생산하면서 누군가를 죽일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 가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그럼 올해는 내가 먹을 것을 직접 기르는 농사를 조금씩 시작해 보자. 공동으로 농사를 짓고 배우는 공동체를 찾았다. 여기는 소규모의 농사를 짓고 가능한 한 기계를 사용하지 않으며 손과 땀으로 짓는 농사를 표방한다고 하네.


   손에 흙을 묻히는 것 자체가 낯설었다. 그런 나에게 농사는, 씨앗뿐만 아니라 흙으로 연결되는, 모든 생명과 다시 이어지는 일이었다. 인간 동물, 비인간 동물, 그리고 그러한 이분법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 존재 모두와의 관계를 다시, 새롭게 쌓아나가는 일이었다.


   1) 지렁이


   땅에 삽을 깊숙이 넣고, 으쌰. 삽을 지렛대 삼아 흙을 들어 올렸다. 뒤집어진 땅에서 작은 누군가가 깜짝 놀란 듯 빠른 걸음으로 서둘러 움직인다. 깜짝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 미안해. 거기 있는 줄 몰랐어. 멀리서 바라보면 아무도 없는 것 같은 땅도 그 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저마다 분주한 발걸음이 있다. 땅을 갈면 갈수록 그 안에 얼마나 많은 생명이 저마다의 일상을 보내고 있는지 새삼 알게 되었다. 그 뒤로는 무겁고 차가운 삽으로 땅을 뒤집는 것이 영 내키지 않았다.


   드론 전쟁에서는 인간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에, 앞으로도 많은 이들이 앞다투어 전쟁에 드론을 이용할 거라고 했다. 드론 조종사가 바라보는 화면에서 인간은 아주 작은 까만 점으로, 그저 표적일 뿐이었다. 그 까만 점을 들여다보면 모두가 각자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소리를 내고 몸을 움직이고 있다. 내 배를 불리기 위해 땅을 ‘정리'하면서, 나는 조종사가 되어 날카로운 삽으로 누군가의 신체를 훼손하거나 해치는 일을 자주 마주했다. 특히 지렁이. 땅을 갈 때면 다들 입 밖으로 “으아, 미안해. 아프겠다.”라고 연신 내뱉었다. 작물을 심을 땅을 넓혀갈수록 모두를 까만 점으로 여기는 것에 무뎌지는, 이를 애써 외면하려는 스스로가 무서워졌다.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다.


   무경운. 땅을 갈지 않고 농사를 짓는 방식에 대해 배웠다. 땅 위로 자란 풀을 부추낫으로 잘라준 다음 그 풀을 다시 흙 위에 이불처럼 덮어준다. 이렇게 하면 풀의 뿌리에 살고 있는 미생물들이 땅에서 다시 순환하고, 덮인 풀은 흙을 따뜻하고 촉촉하게 만들어준다고 했다. 그러면 그 안에 다시 곤충, 두더지, 뱀이 찾아온다고. 만일 경운하기를 선택한다 하더라도, 그곳에 살고 있는 누군가가 놀라지 않도록 한켠의 땅은 뒤집지 않고 남겨두는 건 어떨까.


   2) 거미


   하루 종일 일을 같이 하다 보니 점심과 새참도 그곳에서 함께 준비하고 먹었다. 반찬은 각자 집에서 조금씩 가져오는데, 한식 기반의 반찬들은 대부분 비건으로 먹을 수 있어 어려움이 없었다. 함께 먹을 국은 채수로 끓이거나, 그렇지 않은 날은 (나를 포함한 일부 사람들을 위해) 채수로 만든 2~3인분의 국을 따로 끓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비건 지향을 한다고 얘기한 사람은 나뿐이라서, 아마도 국을 따로 끓이는 걸 꽤나 번거롭게 여겼던 한 사람이 말했다.


   “멸치 들어간 국 정도는 그냥 먹었으면 좋겠는데. 어차피 맛 구분 못할 거 아니야.”


   논둑 보수를 하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던 참이었는지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도 채식과 비인간 동물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다 작년에 이 공동체에 거미집을 훼손하지 않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마도 그 시기가 거미의 산란기라고 했던 것도 같다. 그 이야기를 듣다가 누군가 피식, 나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OO 씨, 꼭 누구랑 닮은 것 같지 않아요? 사람이 많이 모이면 별의별 사람들이 다 모인다니까.”


   이른 오전 시간에 밭에 나가면 물방울이 맺혀있는 거미집이 반짝거린다. 집이 비어 있네. 외출한 걸까? ‘도시’에 살고 있는 나에게 거미집은 자주 만나기 힘들뿐더러, ‘낡고’, ‘제거해야만 하는’ 이미지였다. 논둑에서 나눴던 이야기를 곱씹으며 생각했다. 아, 그렇지. 거미집은 누군가의 ‘집’이다.


   그날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거미를 마주쳤다. 새하얀 열차 벽면 위에 서 있는 거미를 마주하니 이상하게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뭐야. 방금까지도 밭에서 거미를 만나고 왔으면서. 내가 처한 환경과 머무르는 공간을 인식하는 방식에 따라, 그 환경과 공간에서 마주치는 누군가에 대한 나의 인식이 이렇게나 달라지는 것이 묘했다.


   ‘내가 사는 도시라는 공간은 굉장히 표백된 곳이구나. 깨끗하게 정돈된 이곳에 허락되지 않는 무언가 들어오면 그건 불순물로 여겨지는구나. 그렇지만 오히려 거미가 살고 있는 집에 갑작스럽게 방문해서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이 아닌가?’


   다시 오늘 낮에 나눴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그곳에서 내가 불순물로 여겨지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께름칙했다. ‘별의별 사람’들이 더, 더 많아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3) 닭


   논에 난 피를 뽑아내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잠시 땀을 식히면서 수다를 떨고 있는데, 저 멀리서 들리는 소의 울음소리를 듣고 누군가 말했다.


   “농사를 지을 때 ‘가축’의 도움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해.”

   “어째서?”

   “퇴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는 비인간 동물의 똥이 중요하거든.”


   옛날부터 인간-비인간 동물은 일종의 동료 관계였다고 했던 글을 어디선가 읽은 것도 같다. 글쎄. 한쪽이 ‘축사’라는 작은 공간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시간을 보내야 하는 관계를 동료 관계라고 볼 수 있을까.


   날씨가 더워지기 전에 이곳에서는 중요하게 결정해야 할 일이 있었다. 닭을 데려올 것인가 말 것인가. 여러 차례 토론이 진행되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쉬운 문제를’ 서로 간의 토의를 통해 결정해야 한다는 걸 이해하기 어렵다며 웃었다. 생명을 끝까지 책임질 수 있다는 확신이 없으면 섣불리 결정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꽤나 완강했다. 팽팽한 토론이 이어졌다.


   “달걀은 좋은 수입원이니까 데려와야지.”

   “우리는 내년에 여기서 머무르지 않는데 앞으로의 닭의 거처도 생각해 봐야죠.”

   “뭘 고민해요. 먹으면 되지. 닭 잡아서 나누어 먹는 게 옛날부터 마을의 큰 행사예요.”


   그 분위기 속에서 내 의견을 말하는 게 무서웠다. 가뜩이나 여기서 동물 애호가 정도의 취급을 받는 것 같은데. 비인간 동물을 전시용, 가축용 등으로 분류하는 것이 상식으로 통하는 대화 속에서,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중요하게 받아들여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들자 위축되었다. 닭이라는 존재를 애완용, 가축용이라는 용도와 쓰임새로 규정하지 않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동료로서 지낼 수 있을까? 그런 관계라면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이런 기대감이 있는 한편, 그러려면 이 공동체 안에서 지난한 논의와 합의가 필요할 텐데, 그 험난한 과정을 지나갈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무서웠다.


   일종의 절충안으로서 나름의 생각과 제안을 정리해 보기도 했다. 개별성을 부여하려는 시도로 존재들의 이름을 짓기. 하루 한 번은 닭장 문을 열어서 그들이 밭에서 원하는 대로 먹고 원하는 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기. 매일 문을 여닫는, 어쩌면 조금은 수고로운 일을 함께 시도하고 노력해 보기. 그러면서도, ‘닭의 본디 수명이 얼마나 되는지나 알고 하는 이야기냐. 그들의 눈과 비명을 듣고 죽음의 냄새를 맡을 자신이 있느냐.’ 하고 소리 지르고 싶기도 했다. 끝내 그 생각과 제안은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다. 동물권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했고, 이 공동체를 설득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죄책감도 들었다.


   그러다 누군가 말했다.


   “우리가 닭을 애완용으로 데려오는 게 아니잖아요? 그렇게 닭 몸 상태 체크하는 것까지 신경 쓰고, 잡아먹히는 게 불쌍하다고 생각할 거면 애완용 닭을 데려와야지.”


   그러자 사람들이 수긍하는 듯,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거나 ‘음~’ 하는 작은 소리를 냈다. 닭이라는 비인간 동물의 역할이란 응당 가축으로서 알을 제공하고 다 자란 후에는 잡아먹히는 정도라는 것을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인 듯했다. 그럼 일단 데려오고 보자. 그렇게 토론(?)은 마무리되었다.


   밭의 한쪽에 마련된 ‘닭의 보금자리’는 인간들은 허리를 숙여 들어가야 할 만큼 천장이 낮았다. 작고 느린 보폭으로 네 발자국 걸어갈 수 있을 정도의 공간. 사방은 나무판자와 구멍 뚫린 철조망으로 덧대어져 있었다. 청색 털을 가진 5명의 병아리가 처음 왔다. 그들은 그 작은 닭장에서 저 넓은 풀밭으로 나아갈 수 있는 작은 구멍을 어떻게든 찾으려고 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러다 누군가 큰 소리로 말했는데, 2명의 병아리가 닭장에 없다는 거였다. 다들 병아리의 흔적을 찾으려 뛰어다닐 때, 누군가가 안타까움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어떡해. 쟤네 정말 나가고 싶어 하는 것 같아.”


   그러자 다시 누군가 당연한 말을 한다는 듯 나무랐다.


   “당연하죠. 쟤들도 얼마나 나가고 싶겠어.”


   이상한 대화였다. 우리는 그걸 알면서도 알을 얻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들을 꼭 데려와야 했나? 그렇게 닭을 가까이에서 마주한 건 거의 처음이었다. 아, 이렇게 말하고 있었구나. 이렇게 몸부림치고 있었구나. 들으려 하지 않은 건 우리였구나.


   4) 개구리


   낫 대신 예초기를 쓰면 빠르고 편하게 웃자란 풀들을 정리할 수 있다. 커다란 소리를 내는 그 기계를 등에 메고, 기계가 스치기만 해도 숭덩 잘려 나가는 풀을 보면… 휴, 더운 여름의 일거리가 조금은 줄어드는 것 같아 든든하기도 하다.


   그런데 예초기를 만능 기계 정도로 생각하면 곤란하다. 예초기 끝에는 날카로운 쇠 날이 달려있다. 풀이 무성하면 길이 어떻게 났는지 앞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저 눈앞에 있는 풀을 팡팡 쳐내면 날이 뱅뱅 돌아가면서 풀을 베는 거다. 탕탕 날이 돌에 찍히면서 깨진 돌과 날이 사방으로 날아가기도 하고, 개구리 다리가 튀어 오르는 모습도 적지 않게 본다고 했다. 빠르게 돌아가는 쇠 날은 개구리뿐만 아니라 풀 안에 있는 많은 생명을 죽일뿐더러 예초기를 사용하는 이들에게도 상당히 위험하다.


   예초기로 논둑 풀베기를 하기로 한 그날, 그곳에서 함께 위령제를 지냈다. 나무 상에 배와 보리 과자, 막걸리를 올리고 혼을 위로하는 시를 읽었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밀려왔다. 부디 편안하기를, 마음으로 되뇌고 되뇌었다.


   5) 개와 고양이


   그곳에서 나는 ‘채식하는’, ‘막내’, ‘막둥이’ 등의 수식어로 불렸다. 제일 많이 들었던 말 중의 하나는 이거다.


   “어린 나이에 어떻게 여기에.”


   말에서 분명 애정과 배려가 묻어나긴 했지만, 자꾸만 취약하고 통제해야 마땅한 미성숙한 존재로 읽히는 것 같아 힘들었다. 많이 먹으라고, 우리 막내 챙겨줘야 한다며, 입 바로 앞에 먹을 것을 들이밀 때면 동물성 식품은 먹지 않는다고 수차례 거절해야 하는 상황이 부담스러웠다.


   농사일을 할 때 몸을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보니 성별과 각자의 신체적 조건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하게 됐다. 차이에 대한 인식이 곧 위계의 형성으로 흘러가 버릴까 봐 전전긍긍할 때도 많았다. 나이와 성별에 따라 앎과 통찰에도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판단. 모두가 저마다의 지식과 기술, 통찰을 가지고 있는 주체로 만나면 좋겠는데. 근데, 참 쉽지 않다.


   그날도 어김없이 논에서 일을 하다 새참을 먹던 중이었다. 우리 채식하는 막내를 위한 거니까 다른 사람들은 먹지 말라! 오로지 나를 위해 준비된 비건 빵이 내 앞으로 대령되었다. 비건 빵이 담긴 접시를 향해 뻗는 손들을 찰싹, 채식하는 막내가 아닌 사람은 먹지 말라 엄포가 떨어졌다. 이건 지금 다시 생각해 봐도 웃기다. 감사한데 당혹스럽다.


   그러던 중 우리 옆으로 고양이가 다가왔다. ‘귀엽다’고 사진을 찍고 머리와 꼬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문득, 나 역시도 ‘취약하고 귀엽고 보호해야 하는 대상’이라는 이유로 비인간 동물과의 관계에서 내가 우위를 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멋대로 사진첩에 사진을 저장하고 동의 없이 몸을 쓰다듬는 나 역시도. 내가 안고 싶고 뽀뽀하고 싶을 때 껴안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슬플 때 위로해 주어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귀여운’ 고양이 사진이나 ‘댕청해 보이는’ 강아지 사진을 전시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다른 관계를 고민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6) 관계 맺기의 즐거움


   비건을 지향하면서 가장 어려운 게 뭐냐는 질문을 꽤나 듣는다. 먹는 거? 화장품? 아니, 제일 어려운 건 관계다. 기존의 인간 동물, 비인간 동물, 모든 존재와의 관계를 새롭게 바라보려는 시도 자체가 익숙하지 않으니까. 통상적이고 일상적이고 상식으로 통용되는 기존 관계를 인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러한 인식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과정 자체가 힘든 거다. 기존 상식이라는 게 워낙 견고해 보이니까. 한편으로 새로운 관계를 상상하는 일은 퍽 즐겁다. 왜냐? 상상은 자유니까! 우리 관계를 아주 다른 방식으로 마음껏 그려볼 수 있는 거다.


   매 순간 나의 태도를 ‘비건’으로 삼겠다는 건 단순히 먹는 음식의 종류를 바꾸는 것이 아니다. 내 주변의 익숙한 관계부터 다시 돌아보고 질문하겠다는 다짐이다. 지렁이, 거미, 닭, 쥐, 개구리, 개와 고양이. 일련의 경험들을 통해 기존 관계에 대해 고민해 보기 시작했다면, 나는 이제 새로운 관계를 그려보고 싶다. 아, 이런 질문도 좀 해주라! 비건을 지향하면서 가장 즐거운 게 뭐냐? 이 글의 첫 문장에 이렇게 덧붙여서 말해본다. 나에게 있어서 비건 지향의 즐거움은 단연 먹는 것과, 그리고… 관계 맺기에 있다!



짱소


먹거리 문화를 주제로 이것저것 예술 프로젝트를 기획한다.

개, 사람, 그 외에도 수많은 존재들과 한집에서 함께 사는 중.

2019년 채식을 시작으로 현재는 비건을 지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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