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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꺼풀이 없었다

하바나 / 2023 소소기록 희망의숲 시민사회 활동가들의 교차하는 시선들

   화산이 분출했다. 시뻘건 용암이 흘러내리고 화산재가 하늘을 덮었다. 내 마음속에 일어난 일이다. 그냥 시간이 지나 흘러내린 용암이 식을 때까지 기다리고 있다.


   나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갈등이 생길만한 상황은 될 수 있는 한 만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갈등이 발생하면 말을 하지 않거나 화를 내다가도 내 탓으로 돌리고 끝낼 때가 많았다. 상대방이 실수해서 사과를 해도 ‘아니야 괜찮아.’라고 말하고 지나갔다. 속으로 하나도 괜찮지 않았지만 내 감정을 애써 감추었다. 갈등을 회피하는 태도를 가지게 된 것은 내 존재가 끊임없이 부정당한 경험 때문일 것이다.


   나는 경상남도 산골에서 5녀 2남 중에서 여섯째로 태어났다. 바로 위의 오빠와 5살 차이였다. 오빠 위의 언니는 할아버지가 남동생을 보라고 남자 이름을 지어주었다. 우리 동네는 문가 집성촌으로 유교적 문화가 뿌리 깊은 곳이었다. 할아버지는 외아들로 당신밖에 모르는 분이셨다. 할아버지가 기거하던 사랑채 마당에는 종종 작은엄마들이 몇 시간씩 무릎을 꿇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엄마는 맏며느리였다.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이 되어 귀국하기 전까지 히로시마에 살았다. 엄마에게 오빠가 둘 있었는데 두 분은 원폭 피해자였고, 6.25 전쟁에 참전해서 전사하셨다. 엄마는 우리말을 전혀 모른 채 나이 많은 아버지와 결혼을 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귀국 후 생활고를 겪다가 엄마가 결혼한 뒤 얼마 되지 않아 돌아가셨다. 


   엄마는 할머니, 할아버지를 모시면서 어린 남동생과 여동생을 데리고 살아야 했기에 몸 고생과 마음 고생을 많이 하셨다. 그 와중에 막내 외삼촌은 집을 나가 소식이 끊어졌다. 아버지는 농촌에 살았지만, 양반이라는 이유로 노동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양반의 아내였던 엄마는 아버지가 하지 않는 노동의 공백까지 다 메꿔야 했기 때문에 농번기에는 잠자는 시간도 부족했다.


   어릴 때 내가 자주 들었던 말이 있다. 큰언니와 작은언니는 집에 다니러 오면 번갈아 가며 말했다.


   “엄마가 너거들 때문에 고생을 하는데 말 잘들어야지!”


   엄마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오기 전까지 수시로 말했다.


   “아이고, 니가 아들로 태어나시모 조아실낀데.”


   특히 리어카를 끌거나 힘을 써야 하는 일을 하고 나면 몰아쉬는 숨 끝에 고명처럼 덧붙였다. 오빠는 아들이라고 일을 시키지 않았다. 나는 거름지게도 졌고, 돼지우리도 치웠지만 내 기억에 오빠는 벼를 베어 본 적도 없었다. 엄마는 나와 동생은 낳고 싶지 않았지만, 혹시나 아들을 낳으면 아버지의 폭언을 덜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낳았다는 말을 자주 했다. 그런 말을 듣고 자란 동생은 엄마가 시킨 일을 하고 나면 ‘엄마 내 낳기 잘했제?’라고 확인을 했다. 엄마는 동생을 낳고 나서 죽으라고 젖을 물리지 않고 며칠 동안 방 윗목에 밀어 놓았다. 나를 낳았을 때도 아버지는 딸을 낳았다고 삼칠일도 지나지 않은 엄마에게 비 오는 날 우리를 뛰쳐나온 돼지를 잡아넣으라고 닦달해서 맨발로 뛰어다녔다고 했다.


   나는 고집이 셌다. 엄마는 종종 매를 들고 난 뒤에도 답답해하셨다.


   “너는 응구티가 너무 세서 매를 번다 벌어!”


   우리 가족 모두 쌍꺼풀이 있었지만 어릴 때 나는 쌍꺼풀이 없었다. 언니들은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놀렸다. 오빠는 진짜로 다리 밑에서 주워 온 것이 아니라 내가 미워서 그런 말을 하는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나는 아직도 오빠가 그 말을 해 주었던 장소와 오빠의 목소리를 기억한다. 언니들은 못생겨서 ‘하마’라고 부르는 큰고모와 닮았다고 놀리기도 했고, 못난이라고도 놀렸다. 그 당시에 못난이라는 인형이 유행이었고, 큰고모는 못생겨서 남편에게 소박을 맞고 혼자 아들을 키우며 살고 있었다. 서울에서 학교에 다니던 언니들이 방학 때 오면서 사 온 못난이 삼형제 인형을 선반에 올려놓고 나를 못난이라고 놀렸다. 언니들에게 덤벼들었지만 엄마에게 혼만 났다. 부모님에게 덤벼든 것보다 더 많이 혼이 났다. 집 뒷란에는 대나무밭이 있었다. 엄마는 나를 때릴 때, 대나무 가지로 때렸다. 맞을 때마다 바람 소리가 났다. 집에서 말을 줄였다. 말을 하지 않으니까 혼나는 횟수도 줄어들었다. 그 경험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대로 적용되어 갈등 상황이 생기면 말을 하지 않는 것으로 싸움을 대신했다.


   화산재가 까맣게 덮여있어 숨도 쉬기 어렵고, 흘러내린 용암으로 인해 입은 피해도 심각하다. 이번에는 그런 피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화를 제대로 내고 싶었다. 몇 날 며칠을 생각해도 어떻게 화를 내야 잘 내는지 알 수가 없다. 마음속에서는 ‘그냥 지고 들어가 그럼 다 편안해지잖아. 너는 잘못한 것 없어? 네가 모르고 잘못한 것도 많겠지. 그러니까 이런 일이 일어났겠지. 네가 잘못했어.’라고 말을 건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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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바나


내 욕망을 사랑하고 존중하면서 하루하루를 잘 마무리하고 싶다.

지금 운영하고 있는 단톡방이 지역의 환경 문제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네트워크로 발전해서

자발적으로 운영될 수 있도록 밑거름이 되기를 희망하고 있다.

현재 가지고 있는 유일한 버킷리스트는 전국의 전통 마을숲 기록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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