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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장 난 블랙박스를 쓰다듬으며 웃을 것이다

섬세한펭귄/2023 소소기록 희망의숲 시민사회 활동가들의 교차하는 시선들

   나는 모든 기억을 적는 중이다. 술 냄새가 진동하는 작은 방에서 링거를 꽂고 헛소리하던 아버지, 유치원에서 돌아온 손녀 둘을 다정하게 맞아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할머니, 어둠이 내리는 밤이면 고성을 내뱉던 부모님, 때로는 그 모든 두려움을 반항으로 표현하며 울부짖던 언니를 기억한다.

   내 마음에 남아있는 상처는 고장 난 블랙박스처럼 느껴졌다. 때로는 술에 취해있던 아버지의 냄새가, 때로는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할머니의 거친 손이, 때로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주고받던 큰 목소리가, 때로는 울부짖으며 아버지의 거친 손길을 피하던 언니의 작은 등을 느꼈다. 고장이 난 블랙박스의 기록이 언제 사라질지 몰라서 두려운 마음에 적기 시작했다.

   나는 고장이 난 기억을 쓰면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술에 취해있던 아버지의 냄새는 97년쯤부터 술을 마시며 무너지던 가장의 이미지로,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할머니의 거친 손보다는 이 세상 누구보다 손녀를 사랑하던 미소를, 부모님의 거친 목소리보다는 우리를 다정히 부르던 그 입술을, 울부짖던 언니보다는 같이 취미를 즐기던 또래의 발랄한 여자아이로 기억하기로 했다.


   글을 쓰기 전, 과거의 나는 어린아이와 같다. 무력했던 나를 일으키고, 다독이고, 삐죽이는 입술이 곧 울음으로 터지지 않도록 달래주었다. 나는 용감했다. 씩씩하게 병원에 가고, 약을 털어 넣는다. 나는 살아남았다. 그래서 오늘도 글쓰기를 이어간다. 끈질기게 사유하고 해석한다. 나를 돌아보는 과정은 사유가 되었고, 뒤처진 과거의 어린아이를 일으키는 과정은 나의 과거를 재해석하게 했다.

   못난 나, 어리석은 나, 어리고 무력한 나의 과거는 이제 어린아이의 모습에서 성장할 것이다. 내가 그 아이에게 글쓰기를 통해 자유를 줄 것이다. 아이는 새까만 어둠 속으로 숨어버렸지만, 나는 끝까지 아이를 찾아다닌다. 아이를 붙잡을 때마다 나는 허옇게 튀어나온 발을 쓰다듬으며 말한다.


   “이제 신발을 찾는 것은 포기해. 대신 이렇게 서로의 발에 묻은 흙을 털어주고, 상처를 어루만져 주어야 할 거야.”


   비슷한 가정폭력의 경험을 지닌 동료가 나의 글에 댓글을 달았다.


   “언젠가 우리 그 아이를 함께 찾으러 가자.”

   나에게 상처를 준 그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 분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울지 않을 수 있을까?


   나는 단호하게 말한다.


   “가해자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할 겁니다. 그래도 웃을 수 있나요?”


   나는 이제 웃는다.


   “하여간 가, 족 같단 말이야.”


   울면서도 웃고, 울다가도 웃는다.


-

섬세한펭귄


‘섬세한 펭귄’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날지 못하는 펭귄은 땅에서는 뒤뚱거리지만, 바다에서는 누구보다 빠릅니다.

그만큼 사람들도 저마다의 날개를 이미 갖고 있고, 아직 그 쓰임과 쓸모를 찾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나의 질환을 예민하기보다는 섬세한 특성으로 바라봐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섬세한’을 가져왔습니다.

현재는 정신질환 청년의 자립을 실험하는 비영리단체를 설립하기 위해

당사자들과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중입니다.

누구보다 뒤뚱거리는 펭귄들의 섬세한 날갯짓을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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