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 / 2023 소소기록 희망의숲 시민사회 활동가들의 교차하는 시선들
차오르는 말을 내뱉지 못하고 삼켰다. 삼킨 말은 더 깊이 내려앉아 깊은 한숨일지 복식호흡일지 모르는 들숨 날숨으로 격하게 일렁이면서도 침잠한다. 숨 한 번으로 휘발되면 좋을 묵은 감정들은 몸, 마음속 어딘가에 화석이 되어가고 있음을 느낀다.
글을 쓰다가 몇 번을 엎었다. 이 글이 특정인을 지칭하거나 특정 단체를 지목하게 될까 걱정하며 차오르는 말과 숨을 덮고 덮었다. 아니 숨고 싶고 회피하고 싶었다. 굳이 드러내서 나아질 것 없는 관계, 일, 조직이라는 체념이 무겁게 짓누르고 있다. 갑을병정… 저 너머의 넓은 비정규직 스펙트럼 조직망 어딘가에 좌표를 찍고 있는 내 위치.
나는 왜 활동가를 하고 싶어졌을까?
나는 왜 아직 활동가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을까?
얼마 전 태백 철암리에 갔었다. ‘쇠바우’라는 우리말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한자표기로 정착했다고 했다. 초록 바람이 살랑살랑 거리는 산 중턱엔 듬성듬성 땜빵 자국처럼도 보이고 삭발한 듯 시원하게 밀린 회색빛 상흔이 보인다. 질척질척한 검은 흙 사이로 생경하게 보이는 노란 들꽃과 풀들. 맑은 물이 흐르다가도 시커먼 물줄기를 만나게 되는 곳. 태백의 정체성을 알 있게 해 주는 키워드들이다.
탄광 마을. 태백. 상처인지 영광인지 긴 시간의 흔적들. 그리고 다시 복원되는 숲.
탄광 마을 산자락을 보며 자기 속을 비워내고 상처를 복원하며 다른 생명을 살려낸 많은 존재들이 떠올랐다. 탄광 마을에서 나온 석탄으로 많은 이들이 따뜻하게 겨울을 보냈고 공장을 돌렸다. 열차는 부지런히 전국으로 산허리를 뚝뚝 끊어가며 어둠에서 캐낸 온기를 실어 날랐다. 빼가기만 하고 득 본 적 없었던 태백 깊은 산속 약탈의 현장. 죽음, 생명, 살림의 현장. 석탄을 대체하는 연료가 빠르게 보급되며 광부들의 갱도의 숨은 잦아들고 그 자리에 초록 생명이 비집고 들어선다. 쉼이 주는 복원력에 감탄하다가 문득, 그러다 문득 내가 겹쳐졌다. 울컥거렸다. 어쩌다 문득. 그렇게 문득.
“지금 그걸 신경 쓰고 있을 때가 아닌데 왜 자꾸 그걸 비중 있게 진행하는 건지 모르겠네.”
“아니, 그렇게 처리하면 내 입장은 뭐가 되는 겁니까? 그냥 이건 제가 처리한 대로 하세요.”
의미 있고, 가치 있어서, 내가 아니면 안 될 듯하다는 믿음에 계약서도 없이 시작했다. 좋은 게 좋은 것이고 우리 마음은 서로 통할 것이라며 정당한 보수도 사양하고 스스로 노예계약 굴레 속에 저벅저벅 들어서던 기억들이 중첩된다. 처음에는 그저 일을 해주는 것이 고마우니 칭찬 일색이었다. 칭찬은 부담스러운 당근이었다. 알아서 더 열심히 하라는 또 다른 압박. 그러나 칭찬 아닌가?! 칭찬의 달콤함에 내 눈과 귀를 잘 달래가며 알아서 폄하한 내 노동력 가치. 다른 사람들 노동 권리 이슈는 발끈하며 연대하고 목소리 높이고 정의를 실현시키는데 나는 왜 그리 갑을병정… 저 너머의 위치에서 알아서 기었을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일이니 함께하고자 한 발버둥들 우렁각시처럼 속을 비워내며 단체를 키워내는 뿌듯함 주입한 착각 마취제.
독박 노동을 방관하며 결과가 늦어지니 질책의 쓴소리를 우아하게 돌려 깎기 한 시선과 목소리가 웅웅거린다. 가슴이 턱 막히고 숨이 가빠진다.
까마득히 오래된 고생대 식물들이 지압과 지열을 받아들이며
압축된 시간이 만들어 낸 새로운 공간과 물질의 탄생. 석탄.
석탄 채굴의 시간이 끝났다. 쉼과 복원. 녹색의 시간이다. 새로움이다.
이제 나는 쉽게 내 시간, 공간, 값싸게 요청받는 노동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나를 푸르고 울창하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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틈 space
일상의 틈, 공간의 틈.
틈나면 놀고 싶고 틈나는 대로 꼼지락거리는 것을 좋아합니다.
틈이 주는 여유와 곁이 좋습니다.
Space. 우주적인 시공간의 순간을 일상에서 짓고 맺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