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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단상 1

예민보스

by 기영

2024년 9월 3일


백수가 된 지 2달이 다 돼 간다. 소모적이고 계획 없는 걸 정말 싫어하지만, 앞으로는 이런 기회가 없을 것 같아서 이번 휴식만큼은 특별한 계획이나 목표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다. 회사나 일에 집중할 필요가 없어지니 자연스럽게 혼자 생각하고 고뇌할 시간도 많아졌다.


난 20대 중반까지 항상 굉장히 예민했다.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판단기준이나 잣대도 너무 높다 보니 항상 생각이 비판적이었다(너무 과하게 티 내거나 표현하지 않으려고 노력은 했지만). 심지어 완벽주의에 통제적인 성향까지 강해서 정말 제멋대로 꽉 막힌 사람이었다. 스스로의 예민함이 불러오는 스트레스도 어마어마했다.


그런 20대 중반을 뒤로하고 20대 후반에는 회사를 다니고, 연애를 하고, 이직을 하고, 이별을 하고,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는 과정에서 내 예민함은 서서히 약해졌다. 서서히 시들다 사라져 버린 것 같았다. 최근 3년 동안 나 스스로가 많이 유해졌다고 느껴졌다. 이걸 작년 여름에 자각했을 때 스스로가 굉장히 어색하고 낯설었다. 칼날이 녹이 슬고 무뎌진 기분도 들었다. 하지만 과한 예민함이 없어졌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좋은 변화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예민함이 스멀스멀 다시 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2-3년 사이에 많이 무뎌졌다 생각했는데 왜 요즘 들어서 갑자기 이럴까 생각해 봤다. 20대 후반에 일/연애에 치였던 나는 예민할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었다. 그래서 내가 생각하는 나의 가장 큰 정체성이자 강점이자 단점인 예민함조차 그냥 묻어버리고 지냈던 것이다. 나 스스로가 쉼이 필요했던 것처럼 예민함도 조금은 쉴 필요가 있었나 보다.


잃어버린 나 자신을 다시 조금씩 찾는 기분이라 뭔가 묘하다. 그렇다고 다시 예전처럼 예민보스로 지낼 것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닐 것 같다. 이젠 30대로서 마음가짐을 어른스럽게/너그럽게/융통성 있게 가져야 할 필요도 있고, 예민함이 과하면 단점이 되고 스트레스가 된다는 것은 이제 잘 아니까. 그리고 과민하지 않는 게 마음이 얼마나 편한 지도 알게 된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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