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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단상 10

소비

by 기영

2025년 4월 15일


나는 돈 관리를 잘 못한다. 서울 물가를 핑계로 생활비를 아끼지 않는다. 알뜰하지도 못해서 가성비 있는 구매를 하거나 할인 같은걸 잘 챙기지도 못한다. 과소비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절약이 안되니 취미 생활이나 쇼핑, 식비로 쓸데없는 소비가 많다. 주식이나 부동산 등 돈을 불리는 재주도 없다. 그래서 오죽하면 매년 새해 다짐이 절약+저금.


나는 대인관계 능력도 조금 부족한 편이다. (참 많은 게 부족한 사람이다)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을 꺼려하고, 깊게 친해지거나 사사로이 얽히는 것을 기피한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하는 '사람 챙기기'의 필요성도, 노력도 없었다.


위 두 가지가 합쳐서 나온 것이 대인관계의 최악의 습관 중 하나인 사람한테 돈 아끼기. 먼저 나서서 밥 먹자는 말 안 하기, 생일 선물은 3만 원 이하로 고정, 목적 없는 지출은 피하기, 기브 앤 테이크가 안 되는 축의금 아까워하기 등등.


그런데 저런 세상 참 역지사지라고. 살다 보면 나보다 조금 더 매정하거나 조금 더 돈을 아끼는 사람을 만나면 내심 서운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도 누군가에겐 짠돌이이고 냉혈한이었을 텐데.


그래서 어느 날 갑작스럽게 다짐했다. 사람한테 돈 아끼지 말자. 안 그래도 사람을 깐깐하게 사귀는 편이기도 하고, 곁에 두는 사람은 내 딴엔 참 잘 맞고 소중한 사람들만 남겨두는 편인데. 내가 이기적인 기준을 내세워 거르고 걸러 남겨둔 엄선한 인맥과 사람들에게조차 내가 돈을 아끼면 그거야말로 정말 이기적이고 구린 사람이지 싶어졌다.


그 생각이 든 날, 친구랑 저녁을 먹기로 했던 날이었다. 멘탈이 말랑말랑하다 못해 흐느적거린다고 맨날 내가 잔소리를 퍼붓던 친구. 지하철역 꽃집이 보였다. 백해무익한 잔소리 대신에, 바라보면 조금이라도 마음이 힐링이 되는 화분이 낫겠지 싶었다. 그리고 별 이유 없이 푸른 식물이나 좀 보면서 살라고 줬다. 금방 말라죽일거 같다고 또 잔소리하긴 했다. 그래도 그냥 별 이유 없이 뭘 주는 것도 꽤 나쁘지 않다 싶었다.


그날 이후로 타인에 대한 소비를 늘렸다. 밥 약속은 굳이 더치페이 안 하고 내가 쏘고, 생일선물도 4-5만 원짜리로 줘보고, 어디 놀러 가도 술 한잔쯤은 내가 더 사고 등등. 어차피 통장은 늘 텅장인지라 그 소비 조금 늘렸다고 해서 생활비가 부족해지지 않았다. 그냥 오히려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더 해줄 수 있다는 생각에 감사함이 늘었다고나 할까..? 조금 더 열심히 일해서 조금 더 벌고, 돈을 아끼지 않고 타인에게 잘 쓸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백수를 꿈꾸는 백수단상의 취지에 반하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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