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산과 소비는 구분된다.
일을 하는 회사에서는 돈을 벌지만 그다지 즐겁지 않고, 퇴근길에 하는 쇼핑과 맛집에 들러 친구들을 만나며 돈을 쓰는건 즐겁다. 시간도 구분되고 공간도, 그 행위를 하는 기분마저도 구분된다. 생산을 하는 일은 주로 의무감으로 애써 하는 편이며, 내 현재의 커리어를 지키기 위해서 또는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서 묵묵히 참고 하루하루 버텨낸다. 반면 소비는 쉽다. 내 기분을 풀어주고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 소비한다. 하기 싫어도 했던 일을 하며 벌었던 돈을 하고싶었던 것을 하는 데 쓴다. 생산을 하느라 들였던 수고로움을 소비로서 보상받는 듯 하지만 조금 비틀어보자면 소비하기 위해서 생산하는 셈이나 마찬가지다.
뭔가를 만들어내는 것은 멋지다. 어떤 가치를 생산하는 일, 그것을 잘 해내기 위해서 사람들은 학교에서 오랫동안 공부하고 시험을 치른다. 학교에서는 소비하는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소비는 너무 쉽고 생산은 너무 어렵기때문에 그런걸까? 아니면 소비하기 위해서는 생산이 선행되어야(돈이 있어야) 하기때문에 그럴까?
생산과 소비는 구분된다. 과연 괜찮은걸까?
5년전에 회사를 관두고 내가 살아가고 싶은 삶의 방식을 온전히 찾은 나는 생산과 소비가 구분되지 않는다. 하루종일 일을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루종일 소꿉장난을 하는 것 같기도 하다. 소비하는 순간을 고대하며 생산의 시간을 감내하지 않는다. 내가 사는 곳은 백화점도 대형마트도 없고 퇴근길은 짧고 친구들도 없어서 저녁 술자리같은 것도 없다. 소비할 시간과 공간도 딱히 없는데다가 그런걸 바라지도 않는다. 일을 감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일 하는것이 즐겁기때문에, 생산하는 시간을 온전히 즐길 수 있게 되었기때문에 소비를 해서 그 수고로움을 보상받을 필요가 없게되었다. 거의 모든 소비는 실리적 필요에 의해서만 인터넷을 통해 재빠르게 이루어진다. 소비를 통해 숨통이 트인다던가 대리만족을 느낀다거나 하는 즐거움은 거의 없다. 오로지 생산에 필요한 도구들이 제 시간에 제대로 된 모델이 왔는지 면밀히 체크할 뿐이다. 오로지 생산, 생산, 생산이다. 생산하기 위해서 소비하고, 소비할 시간을 줄여 생산한다.
그렇게 살면 너무 숨막히지 않느냐고 할 수 있다. 좀 쓰면서 살아야지, 어떻게 계속 일만 하면서 사느냐. 과로는 몸에 해롭다고 걱정할 수 있다. 나도 이런적은 생전 처음이라 조금 얼떨떨하지만, 놀랍게도 전혀 과로하지 않고있고, 오히려 몸이 더 좋고 정신건강에도 훨씬 낫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내가 놀 줄 모른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6개월동안 혼자서 세계여행도 다녀왔고, 20대 때는 홍대앞에서 살면서 핫한 클럽과 술집도 가봤고 해남에서 강원도 통일전망대까지 걸어서 무전여행도 해봤다. 보통 성인들이 신나게 놀고싶다는건 술집에서 편한 친구들과 왁자지껄 떠들면서 술과 음식을 왕창 먹어치우는걸 말한다. 그게 아니면 집에서 소파에 누워서 간식을 먹으며 좋아하는 영상물을 보는걸 말한다. 나도 그런걸 좋아하긴 하지만 그런것만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놀이는 내게 너무 도시적이다. 그리고 뻔하다.
논다는 건 색다른 즐거움이다. 아무리 즐거운 놀이도 계속하면 재미가 없어지는 것처럼 내게는 술집에서 먹는 삼겹살과 소주, 치킨과 맥주가 이제는 그다지 매력이 없다. 소파에서 보는 넷플릭스도 두시간 정도는 괜찮을지 몰라도 그 이상은 너무 지루하다. 내게는 너무 수동적이다. 20년전 동창들을 만나서 예전에 있었던 일들을 줄구장창 반복해서 이야기하는게 나는 더이상 재미가 없다. 나에게 그건 노는 것이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소비가 즐겁지 않다. 노는 것은 재밌을 수 있는데 돈이나 시간, 에너지를 그야말로 '써버리는' 일은 달갑지 않다. 그런걸 일컬어 탕진하는 즐거움이라고 해서 '탕진잼'이라는 단어도 있다. 뭔가가 쏵 빠져나가는 것보다 귀엽고 좋은것들이 조금씩 차올라 점점 많아지는 것이 뿌듯하고 즐겁지 않은가? 옆 테이블의 사람들과 함께 담소를 나눌것도 아니지만 텅 빈 식당보다는 이왕이면 사람들이 적당히 들어찬 북적북적한 분위기의 식당이 더 기분좋지 않은가?
생산이 감내해야하는 대상이 아니라 즐거움일 수 있다면, 따분한 술자리와 백화점 쇼핑이 설 자리는 점점 줄어들게 된다. 술자리와 쇼핑을 나쁘다고 하는게 아니다. 문제는 그런걸로 생산하느라 지쳐버린 자신을 위로하는 방식이다. 생산의 스트레스가 크면 클수록, 소비의 쾌락 또한 커질것이다. 이 둘은 절대 만나지 못하는 견우와 직녀처럼 평행선을 긋게 된다.
즐거움은 놀이를 통해 얻을 수 있고
놀이는 오로지 소비를 통해야 가능하다
하지만 생산의 현장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면 이야기는 완전히 달라진다.
일하면서 즐거울 수 있다면
계속해서 즐거움을 조금씩 늘려간다
생산은 소비를 위해 해야만 하는 의무가 아니라
생산은 곧 놀이가 되고, 다채롭게 확장된다
어떻게하면 일하는 것이 즐거울 수 있을까요? 이것이 문제다. 학교에서는 죽은 지식을 가르칠것이 아니라 이런 문제에 대해서 다루고 함께 고민해봐야 한다. 교장을 비롯해 선생들도 모르는 이 문제를 학생들과 함께 탐구해봐야 한다. 단서는 있다. 자기자신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학교는 일방적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발견하고 어떤 생산을 했을 때 즐겁고 지속가능할 수 있을지 알아보게 해야한다. 일하는 것이, 공부하는 것이, 생산하는 것이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학생들에게 보여줘야 한다. 소비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생산과 소비, 그 둘을 이어지지 못하게 구분하는 것이 문제다. 애초에 착하고 나쁜것이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