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 한 달, 리스본 한 달
나는 남유럽 외에 다른 곳을 안가봐서 잘 모르겠지만 유럽인들이 왜 세계를 지배할 수 있었는지 대충 알 것 같았다. 이건 순전히 느낌이라 설명하기가 어렵다. 수학이나 손재주는 아시아인이 더 뛰어나고 운동신경과 체력은 아프리카인이 더 뛰어나겠지만 유럽 운전자들은 차도를 건너는 행인에게 먼저 건너가라고 손짓해준다. 아무것도 아닌것같지만 모든것은 '한 사람'에서부터 시작된다는 상식이 대부분 사람들의 DNA에 각인되어 있는 듯 하다. 좁은문에서 노인과 마주칠 때 내게 길을 먼저 열어주는걸 보면 '아, 이길수가 없다..'라고 탄식한다.
확실한 건 먼저 어른들이 귀여워져야 사회 전체가 부드러워지고 살맛나는 세상이 되는 것 같다. 애들은 원래 귀여우니까.. 일본이 살만한 세상인지는 모르겠으나, 일본노인들도 귀엽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한국의 어른들은 근엄해야 해서인지 외롭다. 낯선 젊은이들과 친구처럼 얘기하는 여기 노인들을 보면 괜히 내가 기분이 좋아진다.
그들의 속사정을 자세히 들을 수는 없지만 (교대근무일 수도 있고) 어쨌든 거리가 적적하지 않다는 장점이 있다. 관광객이 꾸준히 오는 곳이라서 더 그럴수도 있겠다. 대부분의 젊은사람들이 밤늦게까지 직장에 매여있고 관광도시가 아닌 서울과 여기는 특히 평일대낮 길거리의 풍경이 다른점이 재밌다. 햇살도 뭔가 한국과는 달라서 바깥에서 멍때리기에 여러모로 좋은 환경이다.
이번 장기간의 생계형 여행에서 원하는 목표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바로 '저성장 시대를 대처하는 자세'를 배양하기 위함도 있다. 한국은 고성장의 시대를 이미 지났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그 시대를 그리워하며 여전히 그 패러다임으로 움직이는데 여기 유럽이야말로 이미 한참전에 저성장시대로 들어왔으니. 게다가 포르투갈이라니! (다음 행선지는 역시 경제로 고통받는 아르헨티나..) 한국과 비교해서 매우 느린 생활을 하면서 분명 모르고 지나쳤을 작지만 소중한 가치들을 다시 품고싶었다. 2달뿐이었지만 이미 어느정도 성공한 듯 하고.
예절은 있지만 '높임말'이 없는 생활권의 최대 장점은, 모두가 똑같은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 높임말이 있는 한국은 아랫사람이 '안녕히 주무셨습니까?'라고 하면 윗사람이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음 그래, 잘 잤느냐?'라고 대답하는데, 높임말이 없는 생활권에서는 어린애나 노인이나 모두 똑같은 언어로 인사를 주고받는다. 지극히 당연한 사실이지만 난 이점이 상대방과 나, 사회와 나의 관계를 인식하고 규정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한다.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끼면 상대방의 동작과 비슷하게 따라하고싶어지는 심리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바꿔말하면 상대방이 나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지않는다면 서로 호감을 느끼기 어렵다는게 내 생각이다. 물론 그 호감이란 존경심이나 내리사랑같은 상하관계의 성격이 아니라 내 앞에 있는 이 인간에 대한 순수한 관심을 말한다.
카톡 음성통화로 친구가 총각김치를 씹는 소리가 들리는데 그것만으로도 속이 개운해지는 느낌이었다. 여기도 스페인과 비슷한 여러가지 요리들이 있지만 한국과 일본의 여러 발효음식같은건 없다. 마늘장아찌에 총각김치, 갓김치, 파김치에 돼지고기 넣은 김치찌개가 먹고싶다........
두 달간 일요일 빼고 매일 헬스,러닝,수영을 했다. 하루 아침을 여는 매우 신성한 의식이었고, 온돌과 전기장판이 없는 환경에서 추위를 이기기 위함이었고, 점심식사를 최대한 맛있게 먹기 위함이었다. 덕분에 하루가 활기차게 시작됐고, 매년 환절기에 걸리던 감기가 걸리지 않았고, 점심을 매우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한 도시 한 달 체류라서 계약하기도 쉬웠고 단기계약이라 10만원으로 물가에 비해서 비싼편이었는데, 헬스장은 가격이 저렴할수록 출입횟수가 줄어드는건 헬스장 다녀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 아니던가!
다른 나라에 왔으면 최소한 그 나라 언어는 '고맙습니다', '안녕하세요', '화장실이 어디에요' 최소한 다섯마디 정도는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게 그다지 어려운것도 아니고 여행하는 본인이 더욱 즐거울 수 있는 방법이다. 딱 봐도 영어를 안쓸 것 같은 시골현지인이나 노인들에게 아몰랑 영어로 끝까지 얘기하는걸 보면 어지간히 영어 컴플렉스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에서야 영어가 최고지 바깥에서는 소통하는 도구 중 하나일 뿐이다. 솔직히 영어를 잘 못해도 소통하겠다는 의지가 더 중요하다.
간판이 아예 없는곳도 있다. 알아서 오라는건가. 한국의 간판이 크기와 색깔이 천박하다는건 익히 알고있었지만 이곳은 달라도 너무 다르다. 생각해봤는데, 상인과 손님의 관계에 달려있는 것 같다. 한국은 상인과 손님과 관계를 맺지않으니 (서로 사적인 말을 하지않으니) 손님은 끌어야겠기에 간판으로 승부를 보는것이고. 이곳은 상인과 손님과의 대화가 많아 그렇게 관계가 트이고 입소문?으로 찾아오는 것 같다. 아니 그래도 소박해도 너무 소박하다.
사람이 진짜 변화를 원한다면 사는장소를 바꾸고, 쓰는시간을 바꾸고, 만나는 사람을 바꾸라고 했다. 세 가지 중에서 하나만 빠져도 힘들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start over는 내 취미. 5년주기로 크고작은 start over를 한 것 같다. 좋은말로 창조적 파괴, 경계에 서다, 나쁜말로 포기가 빠른 사람.... 새 술은 새 부대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