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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완 Feb 10. 2016

술이 만들어 내는 이야기

맨정신의 용기 - 홍상수 영화를 보고

나는 홍상수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일단 영화에 힘을 주지 않아서 좋고, 예상치 않은 전개가 나를 가끔씩 놀래키기 때문에 좋고, 우디앨런 연출방식과 비슷하게 배우들에게 큰 줄기만 설명하고 그대로 상황에 자유롭게 풀어주는 홍상수감독의 스타일이 좋기 때문이다. 홍상수감독의 영화는 항상 술이 등장한다. 그리고 항상 연애감정이 등장하는데 술과 연애감정은 영화안에서 정말 밀접한 관계를 맺는다. 항상 그렇다.


어제 오랫만에 영화를 봤는데 그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라는 매력적인 제목의 홍상수감독 영화였다. 늘 그렇듯이 술과 연애가 주가 되는 스토리. 그런데 나는 이 영화를 보면서 [술]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술 마시기 전 주인공 남녀의 관계와 술 마신 후 관계를 나누어서 바라보고 있자니 꽤나 답답한 마음이 들었고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더욱 심기가 불편해졌다. 왜 한국인들은 술 마시기 전과 술 마신 후가 그렇게 다를까?


 

[술 마시기 전]

술 마시기 전 남녀의 상황은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쭈뼛쭈뼛'이다. 서로 이름을 물어보지도 않고 이야기를 시작하고 유명감독이라는 타이틀이 아니었으면 과연 커피마시러 나갈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들 정도로 그들의 대화는 겉돈다. 커피 한 잔 하자는 제안, 다짜고짜 상대방 직업부터 물어보는 질문, 영화감독이라는 타이틀에 화들짝 달라지는 태도. 그 모든것들이 어색하기만 하다. 물론 일부러 어색하게 연출을 했다는것쯤은 안다. 그런데 그게 한국인들이 실제로 하는 모양새이기 때문에 나는 더 불편했다. 낯선사람을 만나서 어렵게 시작한 대화는 '유명감독'이라는 타이틀이 없다면 뻘줌한 느낌 그 자체나 다름없다. 나는 유명인도 아닌 그저 그런 평범한 사람이라면 그런 상황에서 남주인공처럼 말을 걸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본다. 상대방이 어여쁜 젊은여자라서 그럴것이다라는 제한은 두지않고 그저 낯선 공간에서 낯선 사람에게 친근하게 대화를 시작할 수 있을까? 


[술 마신 후]

이제 영화는 술을 마시러 가겠지? 라고 생각할 무렵 자연스럽게 음식점에 들어간다. 소주를 시킬거야 분명히. 이미 소주 세병을 마시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는 크게 두가지 같은상황이 등장하는데 첫번째 장면에서 나오는 두 사람의 대화나 분위기는 상당히 흥미롭다. 그들이 언제 '쭈뼛쭈뼛'했나 싶을정도로 이야기는 부드러워지고 웃음은 많아지고 부자연스럽게 오바하는 경우가 흔하다. 불과 어제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관계라고 믿기 힘들정도로 과도하게 친근하게 서로를 대하고 말한다. 분에 넘치는 농담과 억지웃음이 남발하고 남자주인공은 세상에서 가장 용맹한 기사가 되었고, 여자는 세상에서 가장 여성스러운 공주가 되었다. 그렇게 기사와 공주가 만났으니 그다음 스토리는 불보듯 뻔하다. 이제는 영화상에서 다른사건이나 다른 주변인물들이 개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그 둘을 내버려두기만 하면 어떤 재밌는 스토리도 나올 수 있게 되었다.




술 없이도 스토리를 만들어낼 수 있을까


영화이야기에서 다시 일상생활로 돌아와보자. 스무살 때 기억을 떠올려보면 생각나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대학동기였는데 그 여자애는 평소에는 무척 숫기가 없어 정말 조용하게 지내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술자리에서는 엄청나게 다른 사람이 되었다. 술자리 초반보다는 후반에 만취한 상태에서 그녀는 선배들과 스스럼없이 어깨동무를 하고 애정을 표현하고 한잔 더하고 가자고 길거리에서 몸개그를 펼치는 그런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다음날 맨정신으로 돌아온 학교에서는 다시 조용하고 부끄러움 많은 학생이 되었고 어젯밤에 벌어졌던 일을 친구들이 웃으며 얘기해주면 화들짝 놀라며 미소짓는 그런 사람이었다. 나는 솔직히 그녀를 보며 위화감을 느꼈다. 그녀의 원래 모습은 무엇일까? 그녀는 재미있는 사람일까? 아닐까? 어쨌거나 나는 결국 그녀와 친해지지 않았는데 그건 내가 취할때 밤거리에서 그런 객기를 부리지 않아서였을지도 모른다. 


홍상수의 영화를 보며, 술이 만들어내는 이야기를 보며 과연 술이 없이도 저런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궁금했다. 감히 추측해보건데 무척 힘들다. 적어도 영화에 등장하는 남녀주인공의 성격으로는 말이다. 술을 마시러 스시집에 들어가기 전에 있었던 한옥에서의 대화, 그림작업실에서의 대화와 분위기를 보면 알 수 있다. 물론 술을 마시는게 비겁하다고 몰아부치고 싶진 않다. 하지만 술 마시기 전과 술 마신 후 차이(GAP)가 너무 크게 벌어져있다는건 내게 무척 불편하고 비겁하게 느껴진다. 마치 스무살때 만취하기만 하면 용감해지는 그 여자애가 떠오른다. 나는 그녀를 어떻게보면 약간 비겁하게 바라봤던 것 같다. 그녀는 많은 사람들과 친해지고 싶었을것이다. 그런데 너무 부끄럽고 자신감이 없어서 용기를 내지 못하다가 술취한 상태의 가면을 쓰고 힘을 냈을 것이다. 물론 그녀의 욕구는 너무 순수했고 선했지만 나는 그녀가 택한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뿐이다. 영화에서도 남녀주인공이 너무나 거리감이 느껴지는, 차라리 대화를 아예 하지 않았으면 더 좋았을 그런 어색한 대화를 하다가 술이 몇잔 들어가면서 180도 달라지는 인격을 보며 나는 변화가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술 마신 후 취한 상태에서 하는 말이나 행동이 가짜라고 몰아부치고 싶진 않다. 어떻게보면 더 진실에 가까울때도 많으니까 (그만큼 기분에 취해서 과장하는 경우도 많다) 술이 조금 서먹한 관계를 부드럽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한다. 나도 좋아하는 사람과 마시는 술이 너무 좋고, 조금 어색한 사람과는 맨정신에서보다는 술마신상태가 더 편하다. 하지만 내가 불편함을 느끼는 부분은 그 차이(GAP)이다. 만약 어떤사람이 나와 불편한 관계인데 평소 맨정신에 나와 거들떠보지도 않는 그야말로 노관심의 사이었는데, 회식자리에서 만취한 상태로 과도하게 친근함을 표시한다면, 나는 서로에 대한 관심이 이제 생겨났다고 생각되기 보다는 이건 순전히 술에 의지한 객기라고 판단할 것이다. 서로 관심이 별로 없는데 술자리라고 해서 굳이 없는 친근함을 만들어내서 오바할 필요는 없다. 만약 관심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맨정신에서 몇마디 농담을 주고받고 진작에 안부를 궁금해했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술과 취한정신이 윤활유가 되어 도움이 되는거지 황량한 사막과 같은 건조한 관계에서 내가 술을 마셨다는 이유하나만으로 그 관계를 열대우림과 같이 촉촉히 적셔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착각이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술이 깬 다음날 낮에도 상대방에게 어제와 비슷한 친근함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술자리 전후의 큰 차이는 그 사람 개인 인격이 단절된 느낌이 있어 나는 신뢰하기 어렵다. 술마시면 재밌어지는 사람을 싸잡아 말하는것이 절대 아니다. 다만, 술마시면 개그맨이 되는 사람이라면 맨 정신에서도 어느정도 웃기는 사람이어야 자연스럽다는 말이다.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은 나는 맨정신의 용기가 부족하다고 본다. 술 용기는 쉽다. 그래서 비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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