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작년 이맘때에 비교적 편해진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일주 중이었다. 그 당시에는 내가 직장을 그만둔 이유와 가진돈을 모두 바칠 각오가 되어있는 이 여행의 의미와 목적에 대해서 생각했었지만 시원치않은 결론만 얻을 뿐이었다. https://brunch.co.kr/@keemjungwan/19 (그 당시에 정리해봤던 생각)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나는 다시 한국에 와있다. 날씨는 겨울이라고 할수있을만큼 제법 추워졌고 한국의 겨울을 한번이라도 시원하게 비켜나가기 위해 작년에 여행기간을 그렇게 잡았던게 생각나서 가끔 코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2년만에 맞는 한국의 지독하게 시린 겨울. 내가 그동안 느껴왔던 한국의 겨울은 감기가 걸려서 고통스러워 싫은것도 있었지만 쌀쌀한 사람들 풍경속에서 우울한 내 자신이 싫었던것도 있었다. 작년 이맘때부터 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4월까지의 5개월 반 동안의 세계여행은 내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을 주었다. 그 이야기들을 하나씩 적어나가보려고 한다.
지금 나는 투잡을 하고 있다. 그리고 무척이나 자유롭고 능동적이며 나름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 내 기억에 투잡하는 사람들은 대개 주간에는 일상업무를 하고 저녁 혹은 밤에는 대리운전을 하는 생활고를 해결해야 하는 가장이거나, 아니면 불안정하게 클라이언트잡을 하는 작업자가 부족한 수입을 메꾸기 위해서 파트타임잡을 하는 사람들이다. 내가 투잡을 선택하게 된 이유도 그렇게 보면 딱히 다르지않다. 일단 하나는 정해졌는데 여기서 나올 수 있는 수입으로는 내 생활을 유지할 수 없기때문에 다른 직업을 하나 선택하게 된 것.
그 첫번째로 정해진 직업이 경북 예천 시골에 있는 농촌유학센터 생활교사다. 나는 작년 회사를 관두고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남은 한달이라는 애매한 시간에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다가 평소에 관심이 살짝 있었던 대안교육에 대해서 검색을 하다가 우연히 '농촌유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대안교육이 말이좋지 내가 자격증도 없는데 공교육을 침범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농촌유학이란?
도시에 사는 초·중·고교 학생들이 농산어촌에서 일정기간 동안 생활하면서 학교를 다니고 시골살이를 체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유학을 농산어촌으로 오는 것으로 시골에서 학교를 다니고, 시골에서 지역 어르신들과 생활하고 시골에서 먹고 자는 것입니다. 농촌유학은 농어촌유학, 산촌유학, 농산어촌유학 등 지역실정에 맞게 용어를 달리 사용하고 있으며, 다 같은 의미입니다. <전라북도 농촌유학 홈페이지에서 발췌>
당시 내가 살던곳은 성남이었고 20살 이후로는 쭉 서울/수도권에서 벗어나본적이 없었지만 국내여행을 떠난다는 생각으로 무작정 전화를 하고 방문을 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어떤곳에서는 이력서까지 요구했었다.. 그렇게 첫번째로 방문한곳이 경북예천에 있는 <시골살이아이들>이다. 이 곳은 이력서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편하게 이 젊은 친구를 방문객으로 맞아주었는데 도착하자마자 황토집 짓는것을 도와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날 저녁에 그곳에서 생활하는 어린 친구들과 인사했고 밤에 선생님 부부와 한잔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때 통했던 교감이 나를 그곳에 머물게했다. 그렇게 2주정도 그곳에서 지내고 나는 작별인사를 하고 내 인생에서 다시오기 힘들 긴 여행을 떠났다. 좋은 인연은 결국 좋은 방향으로 흐르게 되어있던가. 여행의 막바지가 되어갈 무렵, 한국에 돌아가서 무엇을 할지 심각하게 고민을 하다가 시골살이아이들에 정식으로 취업을 하면 어떻겠냐는 메일을 보냈다. 한달에 일주일정도 지내면서 계속 이 좋은 인연을 이어나가고 싶다는 나의 의지가 강했다. 돈의 액수보다도 사람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고 다행스럽게 선생님 부부도 나를 그렇게 생각했다. 그렇게 딜! 최저생계비는 해결했다는 사실도 중요하지만 한국에 돌아가 안길 품이 있다는것. 나를 반겨주고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는것이 더 소중했다.
두번째로 얻게된 직업 역시 갑작스럽게 내게 다가왔다. 내게는 대학교에서 만난 은사님이 한분 계시는데 졸업후에도 1년에 한두번씩 홍어집에서 삼합과 소주와 함께 인생의 즐거운 순간들과 디자이너의 삶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곤 했었다. 그러다 작년 회사를 관둘 무렵에 내게 하신 말씀중, 이제 곧 파주 출판단지 새로운 사옥으로 20년 넘게 운영해온 디자인 스튜디오를 옮기게 되었는데 본인도 앞으로 디자이너로서 제 2의 도약이라고 생각하고 뭔가를 벌여보려고 한다는 자기고백 겸 다짐같은 얘기를 듣게되었다. 우리는 이 전에도 그래왔지만 당장 닥친 큰 변화 앞에서 서로를 응원하고 격려하며 그렇게 헤어지고 난 긴 여행에서 돌아와 인사를 할 겸 파주로 선생님을 찾아갔는데 내가 돌아오길 기다렸노라며 무척 반겨주셨다. 무슨일인가 얘기를 들어보니 그 동안 새로운 프로젝트를 가동시키기 위해서 적임자를 찾고 있었는데 여러가지 이유때문에 쉽지 않았다는 것과, 올해는 수익활동 보다는 내년에 정식 오픈을 대비해서 실험 위주로 진행하고자 하는 것. 근무시간도 자율적이고 하게 될 일의 성격도 모호하고 보수도 넉넉치는 않지만 나는 동참하고 싶어졌고 현실적으로 농촌유학 생활교사만 해서는 생활이 도저히 유지가 안된다는 이유도 있었다. 무엇보다 선생님이 가지고 있는 새로운 프로젝트에 대한 열망과 의지에 대해서 공감했고 사람들의 니즈가 분명히 있을거라고 생각했고 같이 이 프로젝트를 꾸려나갈 사람들도 마음에 들었다.
그 새로운 프로젝트는 우리끼리 <자작자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로 했다. 자작나무가 불에 잘 타서 이름이 그렇게 붙여진 것처럼, 술을 건배하지 않고 혼자 마시는걸 '자작'한다고 부르는것처럼 이 '자작자작'이라는 말의 뜻은 '스스로 북돋아 삶을 훤히 밝힌다'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하면 나를 북돋아 밝힐 수 있을까? 뜻깊고 의미있는 저녁식사 자리를 통해 우리는 충분히 행복해 질 수 있고 옆사람과의 따뜻한 교감을 통해 그럴 수 있다는게 선생님의 생각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밥먹는 자리가 뜻깊고 의미있게 될까? 우리는 재미있는 고전 이야기를 저녁식사와 결합시켜 보기로 해서 2016년 8월에 <시나리오가 있는 소셜다이닝> 실험무대를 두 번 가졌다. 아주 무더운 여름이었기 때문에 여름밤과 어울리는 환상적인 이야기,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을 가지고 각색하여 다이닝에 녹였고 그에 앞서 몸풀기로 5월에는 선생님의 지인들을 초청해 리마인드웨딩 자리를 마련했다. 결혼한지 20년 이상 된 다섯쌍의 커플을 초청해 레드카펫을 밟게하고 서로에게 의미가 되는 글귀를 읽어주는 작은 예식을 하게 된 것. 12월말에는 안데르센의 <눈의여왕> 이야기를 가지고 다시한번 시나리오가 있는 다이닝을 열기로 했다. 이번에는 <다이닝 스테이지 Dining Stage>라는 부제와 함께.
통장잔고가 0인채로 한국에 돌아와 비교적 짧은 시간안에 이 원거리 투잡을 얻을 수 있었던 건 좋은관계가 가져온 선물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여기서 말하는 좋은관계란 내게 이득이 되는 결과를 바라기 위해서 특정 사람과 전략적으로 친해지는걸 의미하진 않는다. 만약 그렇게 해서 이득을 봤다고 한다면 나는 그 사람에게 빚을 진거나 다름없기 때문에 그 사람의 눈치를 보게 될 것이고 그 사람 비위를 맞추려고 할 것이다. 나는 지금 그 누구에도 빚을 지지 않았고 누구를 억지로 기분좋게 해야할 필요가 없으며 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일에 임하고 있다. 나는 지금 파주와 예천 두 곳에서 고용주에게 고용된 신분이지만 수직적이라는 느낌이 전혀 없다. 우리는 수평적으로 일하고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있고 이 농촌유학이, 이 다이닝스테이지가 잘 되길 희망하는 같은 팀일 뿐.
그렇게 나는 좋은 사람들과 일 두가지를 얻었고 자유를 맘껏 누리며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