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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emondo Oct 30. 2022

내가 먹을 저녁에 정성을 다한다는 것

장을 보러 마트로 향하는 오늘의 발걸음은 유난히 비장하고 당당했다. 뜻밖에 생긴 상품권 덕분에 호사스런 장을 보겠다 결심한 터였다. 평소에 지나쳤던 유명한 소스도 장바구니에 슬쩍 담고, 궁금했던 와인도 슬쩍. 마트의 동쪽부터 서쪽까지 그 어느 때보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구경을 하다, 며칠 전 바닥을 드러낸 파스타면을 사러 면 코너로 향했다. 이번엔 페투치니 면을 사볼까 눈동자를 굴리고 있던 그때, 내 시선을 사로잡은 한 넓적한 면. 바로 라자냐면이었다.


라자냐라니. 라자냐면을 마트에서 팔고 있었다니!


내 비록 34년간 라자냐를 먹어본 적은 없지만 좋아하는 미드에 자주 등장해 꼭 먹어봐야지 생각만 하던 메뉴. 상품권이 아니었다면 다음을 기약했을 테지만 오늘의 나는 늘어난 돈만큼 자신감도 늘어난 상태였고, 이렇게 된 거 그냥 내가 먼저 만들어 보겠다며 호기롭게 라자냐면을 장바구니에 담았다.


그날 저녁, 다음날 회사 점심으로 라자냐를 만들어 가져가기로 다짐하고 최고의 레시피를 검색한 후, 새벽 일찍 일어나 불을 올리기 시작했다. 작은 직사각형의 라자냐면을 보면서, 2명이서 먹으려면 한 명 당 5층 정도는 쌓아야겠다며 총 10장을 꺼내 끓는 물에 넣었다.


여기서 잠깐 질문의 시간.

혹시 당신은 라자냐면에 대해 알고 있는가?

이 면은 끓는 물 속에서 미역처럼 몸체가 불어난다는 사실을.


파스타면을 익힐 동안 출근 준비를 해야 했으므로, 머리를 말리고 스킨 로션을 바른 후 부엌으로 돌아온 나는 목격하였다. 작고 소중한 나의 냄비를 점령한 라자냐 군단을. 좁은 냄비 속 치열한 자리 싸움을 벌였을 라자냐면들은 서로를 살뜰히 품어보기로 극적인 대통합을 이룬 듯 했고, 그리하여 하나가 된 라자냐면을 분리하는 과정은 새벽 댓바람의 노동치고는 꽤나 중한 노동이었다. 모양이 고른 부분만 잘라내며 토마토 소스와 치즈, 불고기를 차곡히 쌓아올려 구색을 맞추고, 그렇게 탄생된 먹어본 바 없는 나의 첫 라자냐 맛은 의외로 꽤 훌륭했다.



좋아하는 취미 리스트에 요리가 등재된 역사는 오래되지 않았다. 2년 전, 처음으로 ‘맛’이라는 것에 관심을 갖고 더 훌륭한 미각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 부단히 맛집들을 찾아다니며 내 몸에 축적시킨 5kg의 지방 만큼이나 진지한 생체실험을 감행한 후 최근에야 비로소 취미라는 영역에 굳건히 자리매김한 요리.


어릴 땐 물만 부으면 되는 컵라면도 못 끓인다며 오빠에게 놀림을 받았던 나였는데, 지금은 팟타이, 각종 파스타, 아구찜 등 각 세계의 음식들을 넘나들며 척척 만들어 낸다.(지금에서야 하는 고백이지만, 당시 늘 라면을 끓여주던 오빠가 처음으로 나에게 라면을 끓여달라고 한 날이었다. 봉지라면도 아니고 컵라면을 가지고 가 물 조절도 제대로 하지 못한 게 아니라 하지 않은 건,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 내가 이걸 제대로 하는 순간 앞으로 오빠가 내게 컵라면이나 라면을 끓여줄 일은 없겠구나. 다정한 오빠라는 아름다운 유년기의 기억을 짙게 하기 위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오빠가 다정할 수 있는 기간을 스스로 늘렸을 뿐이다.)


혼밥 레벨도 단계가 있듯, 집에서 내가 먹을 음식을 직접 만드는 것 또한 여러 단계가 있다.


1. 조리식품을 조리만 하는 초보적 단계

2. 밥 정도는 직접 하지만 반찬류는 사는 단계

3. 먹고 싶은 음식들을 직접 만들어 응용까지 하는  단계


 이 단계는 1,2,3으로 나뉘어 있지만 다소 근소한 차이의 1,2번에 비해 3번의 사이엔 엄청난 격차가 존재한다. 내 기준으로 1번과 2번 단계는 뭐랄까. 배가 고프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먹어야 해서 먹는 느낌이라면, 3단계는 영양소나 건강을 생각해서 재료를 엄선한다거나 원하는 맛을 찾아내려는 각고의 노력을 시행하는 단계랄까.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1단계와 2단계를 거쳐서 얼마 전 3단계로 올라왔다. 3단계에 입성하면서 부터는 요리 그 자체를 즐기며 새롭게 알게된 음식도 집에서 시도해보는 경지에 이르게 되었는데, 이렇게 변한 내 모습에 나 스스로도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고, 그 모습이 신기해 더욱 요리를 자주 하고 있다.

 내가 먹고 싶어하는 음식을 고르고(나의 뇌와 위장을 위한 일), 설탕 대신 대체 감미료를 찾으며 나의 건강을 아끼며(나의 무병장수를 위한 일), 결과적으로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느끼는 행복까지(그저 행복). 이렇게 스스로를 위한 시간과 정성을 쏟는 과정을 반복하니 자연스레 나는 나 자신을 더욱 아끼게 되었다.


자존감 회복에는 ‘성취’의 개념이 무척 중요하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서 침구정리를 하는 것이 단기적인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효과적인 일이라 밝혀진 바 있다. 요리도 마찬가지다. 요리는 짧은 시간에 결과물이 나올 수 있는 단기 성취 행위이므로, 반복되는 요리과정은 내 자존감 회복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배고픔을 때우기 위해 식사같지 않은, 그저 음식을 섭취하기만 했던 나 자신을 돌아보며 자주 미안해 한다. 그리고 그 기간을 보상이라도 해주려는 듯, 지금의 나는 열심히 나를 사육(?)시키고 있다. 오늘은 무엇을 먹을까. 그리고 내일은 또 어떤 맛있는 걸 만들어 볼까가 요즘 가장 진지한 고민이다. 이 글을 마무리하면 엄마가 보내준 불고기에 양파와 마늘, 파와 파스타를 넣어 불고기 파스타를 해먹어야지. 저녁 5시가 되어가니 불고기 생각에 집중력이 흐트러진다. 이만 글을 마무리해야겠다. 모두들 나를 위한 맛있는 저녁을 직접 요리해서 드셔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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