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빠이라는 도시에 더욱 빠져들 수 있었던 건
바로 차이와의 만남 덕분이었다.
야시장을 걷다가 전날 가보지 않은 새로운 골목에 들어섰는데, 그곳에 재즈하우스빠이라는 재즈펍이 있었다.
이른 저녁시간이라 야시장에서 저녁을 먹는 사람들이 많아 내가 들어간 시간엔 한산했고, 그래서 앞자리를 선점할 수 있었다.
공연을 즐기던 와중,
옆자리에 앉은 분들의 음료가 눈에 띄었다.
코코넛 워터..?
이곳은 펍이고, 내가 생각하는 펍은 자고로 맥주나 칵테일이 함께 해야 하는 것인데 !
이렇게 코코넛 모양으로 나온 술이 이 가게의 시그니처인 걸까,하는 생각에 나는 옆자리에 앉은 사람에게 이 코코넛이 술인지 물어봤고 그저 코코넛 워터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리고 이리하여 대화를 나누게 된 사람이 바로 차이였다.
차이는 15년 동안 세계를 여행하다가 지금 빠이에 꽤 오래 머물고 있다고 했다.
한국 드라마와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차이는 내게 최근에 본 한국 드라마 '눈물의 여왕'과 '환혼'을 이야기해주었고, 내가 아직 '환혼'은 보지 못했다고 하니 제발 꼭 보라며, 정말 재밌는 드라마라며 추천을 해주었다.
"한국인에게 한국 드라마를 추천해주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니, 너무 웃겨!"
우리는 깔깔거리며 대화를 나눴고,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공연을 보는 내내 틈틈이 이야기하면서, 지금 공연을 하는 가수가 다음 타임 공연의 드러머라는 것 그리고 차이는 그 밴드의 기타리스트이고 키보드를 맡은 여신은 내가 살았던 브리즈번의 이웃이었으며, 베이스 연주자는 바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 한국인 베이스 연주자와 직접 만나 인사도 나눌 수 있었는데, 빠이에서 한국어로 대화할 사람을 이렇게 만나다니 너무나도 재밌고 신기했던 재즈하우스빠이에서의 시간. 그 외에도 중간중간 테이블에 다녀가거나 합석한 친구들을 차이가 모두 소개해주었고, 국적은 모두 달랐지만 빠이에 머물고 있는 외국인들이 서로서로 친구가 되어, 지역 커뮤니티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이방인과 현지인의 경계가 사라지는 마법같은 곳. 나는 지금 빠이에 있는 게 아니라 지구에 머물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았다.
차이의 공연은 9시부터 시작했는데, 태국에 와서 밤에 혼자 돌아다니지 말자고 다짐했기 때문에 30분 정도만 보고 가겠다며 차이에게 아쉬운 인사를 했다. (특히 빠이는 낮이나 밤에 혼자 여행왔냐고 말을 거는 사람들이 꽤 많았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했다.) 차이는 이전에 내게 알려줬던 ‘빠이토요마켓’에 혹시 올 건지 물었다. 나는 들르겠다고 말했고, 차이는 그럼 내일 보자며 공연을 하러 무대에 올라갔다.
9시 반 즈음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스치는 생각.
다음날. 오전 11시쯤 빠이 토요 마켓이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빠이 토요 마켓은 시장이라기 보다는 지역 주민들의 작은 축제같은 느낌이었다. 꽤 작은 시장이었지만 가족들이 공원으로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작은 플리마켓들이 열려 있었는데, 내가 다녀본 어느 야시장이나 시장보다 가족 친화적인 느낌이라 좋았다. 끈끈한 유대, 하지만 자유로운 사람들. 그리고 여유라는 공기가 흘러넘치지만 또 한편으로는 활기찬 곳. '빠이'라는 도시를 축약해놓은 게 바로 이 빠이 토요 마켓이었다.
질좋고 저렴한 수제 공예품들을 구경하다가, 어제 먹지 못했던 사모사(춘권같은 튀김인데, 삼각형 모양)를 발견했다. 숙소에 가서 먹으려고 사모사를 구입하고 있는데, 누군가 내 어깨를 톡 쳤다.
돌아보니 어느새 바로 옆에 차이가 와 있었다.
“어머!! 차이!!! 하이!!!!!“
시간을 정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만나진다는 게 너무 놀라웠고, 그래서 더욱 반가운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정말이지 신기함의 연속인 빠이.
함께 걷다가 지난 밤에 내가 물어본 코코넛 워터를 사주고 싶다던 차이 덕분에,
마트에서 팩으로 판매하는 코코넛 워터가 아닌 실제 코코넛을 그대로 잘라낸 원액을 처음 마셔보았다.
마치 설탕을 첨가한 듯 달았던 코코넛 워터. 차이의 마음이 담겨서 나의 첫 코코넛 워터는 더욱 달았다.
꽤나 무거운 코코넛워터를 두 손으로 들고 주민들 사이에 뒤섞여 앉았다. 아이들의 웃음 소리, 연주가들의 음악 소리, 반갑게 인사 나누는 목소리들을 듣고 있다가 문득 나는 차이에게 물었다.
나 : 너는 여러 나라를 다녀봤잖아. 그런데 다른 나라가 아닌 왜 빠이에 계속 살고 있는 거야?
차이 : 나는 빠이가 좋아. 이곳은 자유로움 그 자체야.
나 : 아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아. 나도 그래서 빠이가 좋아.
차이 : 너가 빠이에 처음 와서 자유로움을 느끼고 빠이가 좋았다면, 두 번째 올 땐 아마 살게 될 거야.
나는 차이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미리 사둔 치앙마이행 미니밴을 타지 말까, 라는 마음이 슬금슬금 고개를 쳐들고 있는데, 이 버스를 타지 않는다면 정말이지 나는 이곳에서 일을 알아보고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왜 빠이가 배낭여행자의 무덤인지 너무나도 잘 알 것 같았다.
그리고 차이는 토요마켓에서 열리는 JAM (악보없이 연주하는 즉흥적인 공연)에 참여하기로 했다며, 함께 가겠냐고 물었다. 잼이라니! 무조건 보고 싶다며, 함께 잼이 열리는 장소로 걸어갔다. 가는 동안 차이는 몇 번이나 멈춰서서 친구들과 인사를 나눴고, (그랬다. 차이는 빠이 셀럽이었다!) 그 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부스를 운영하던 어느 할머니께서 차이 손에 들린 빈 컵을 보시고는, 자신이 운영하는 부스 쓰레기통에 버리라며 일부러 차이를 부르시는 장면이었다. 타인의 생활에 간섭하지는 않지만, 타인의 불편에 관심을 가지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큰 감명을 받았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태도가 바로 이런 게 아니었을까.
서서 구경하려던 나를 차이가 테이블 의자에 앉으라고 해서 앉긴 앉았는데, '잼'이다 보니 원래 참여하기로 했던 멤버들 외에 지나가던 관광객도 자유롭게 테이블로 와 참여를 했다. 왠지 나도 무엇인가 해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이 들었다. 그래서 처음엔 스쿠터 헬멧을 소심하게 두드리다가, 테이블에 놓인 미니 탬버린으로 아이템을 업그레이드하여 함께 곡을 만들어 나갔다. 생면부지인 사람들이 햇살 가득한 토요일 오전에 모여 음악으로 하나가 되는 이 광경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아름답고 벅차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정말이지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았던 이 순간. 나는 한국에 돌아가면 악기를 하나 꼭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다.
빠이를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차이를 만나 인사를 했다. 차이는 너는 왠지 다시 올 것 같다고 말했고,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서로의 계획을 응원하며 우리는 작별했다.
목적 없는 친절을 받으면 나는 무장해제된다.
특히나 떠날 사람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 마음의 영역에서는 남겨진 사람이 더욱 무거운 짐을 지기 때문에 여행자에게 진심을 나눠주는 사람은 나는 존경하기까지 한다.
이번 여행에서 나는 너무나도 과분하게 많은 진심을 받았다.
사람으로부터의 상처는 가까울수록 자주, 그리고 깊게 새겨진다. 그래서 의외로 먼 사람에게서 뜻밖의 호의를 건네받을 때 인류애가 크게 샘솟으며 마음의 상처도 아물어진다. 특히 예상치 못했을 때 발라진 약은 아무리 깊은 상처에도 금방 새살이 차오르도록 도와주기도 한다.
차이 덕분에 나는 빠이에서 잼을 경험하고, 오랜만에 음악을 하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다시금 깨닫고, 빠이의 진짜 매력을 발견할 수 있었다.
내게 진심으로 대해준 차이와 빠이 지역 공동체의 모습을 보며 어느새 내 마음엔 새살이 올라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