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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eemondo Oct 23. 2024

지구의 작은 천국, 빠이


한국에서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기도 전에 빠이의 가고 싶은 숙소를 예약하고 빠이행 미니밴을 예약할 정도로,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대했던 태국 메홍손에 위치한 빠이(Pai).



전날 홍수 재난을 겪고, 여권과 국제운전면허증을 분실하고, 예약해 둔 빠이행 미니밴 명당자리를 놓치면서,

하늘이 나의 타패게이트 행을 거부하는 건가 생각했다.

이어서 빠이로 가는 미니밴에서조차 소나기를 만났지만, 메홍손에 이르면서 소나기는 개기 시작했다.



빠이 마을에 도착하니 비 온 뒤의 선선함까지 느껴져 최고의 온도로 워킹스트리트에 발을 딛었고, 놀랍도록 3일 내내 쾌청했던 하늘. 마치 하늘도 허락하고 반겨주는 듯했던 빠이 여행의 순조로운 시작.




이곳은 어떻게 배낭여행자의 무덤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을까.


빠이는 '배낭여행자의 무덤'이라는 별명 외에도 '히피들의 천국', '빠토피아'(빠이+유토피아)라는 놀라운 별명들을 가지고 있다. 김히피로서 얼마나 이곳이 천국일지 무척이나 기대가 되었다.



첫 숙소는 빠이의 가장 유명한 메인 거리인 워킹스트리트 끝쪽에 위치하고 있었고, 그곳을 향해 얼른 발걸음을 옮겼다. 치앙마이에서 예약한 미니밴을 놓치는 바람에 조금 늦게 출발해서 노을이 질 때 도착을 했는데, 워킹스트리트 위로는 주황색 하늘이, 아래엔 노란 전구가 켜지고, 양쪽으로 펼쳐진 오두막 같은 상점들, 그리고 여행자들의 상기된 표정들까지. 빠이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모든 풍경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웠다.


그 왜, 판타지 영화를 보면 어떤 입구를 넘어서자마자 다른 세상이 펼쳐지곤 하지 않는가.


마치 타패에서 겪었던 모든 나의 불운과 빠이로 향하는 꼬부랑 커브길을 넘어가는 게 어떤 시험 같은 것이었고, 그 시험을 통과한 자는 동화세상 속으로 차원을 이동할 수 있는 듯한 그런 곳이 빠이인 것 같았다.



그리고 도착한 숙소. 잠시 여담이지만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무척 좋아해서 영어 이름을 '앨리'로 지을 정도인데, 그래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배경인 숲 속 오두막 같은 풍경을 동경하고 찾아다니길 좋아했다. 한국에서 숙소 사이트를 보다가 나의 동경이 그대로 담긴 풍경을 보고 기대하며 예약했던 빠이 첫 숙소. 실제로 본 이곳은 정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토끼와 모자장수가 금방이라도 나타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내가 꿈꿔오던 풍경과 닮아있었다.


거리도 동화 같고, 숙소도 동화 같아서

풍경과 분위기에 취해 정신이 아득해지고 몽롱해지는 곳.


그곳이 바로 빠이었고, 빠이부티크빌리지였다.





짐을 정리해 두고 거리를 좀 더 걸어보기 위해 거리로 다시 나왔다. 빠이는 작은 동네라 메인 거리만 구경하면 1시간 정도면 다 둘러볼 수 있고, 근처 빠이캐년이나 온천, 밤부 브릿지가 유명해서 휴양하러도 많이 온다고 한다. 작은 동네의 시내와 먼 휴양지 덕분에 오토바이를 타지 않은 관광객보다 오토바이를 탄 관광객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곳.


10분 정도 걸어가는데, 곳곳의 상점들이 하나같이 예뻐서 한 걸음 걷고 사진 찍고, 한 걸음 걷고 사진을 찍었다.

‘과연 한 시간 정도만에 나는 이 동네를 다 구경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도로의 반대쪽에 있는 학교를 보는데, 그 뒤로 멀리 보이는 산에 구름이 걸려 있었다. 아름다웠다.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폭이 항상 얇고 높낮이가 큰 곡선을 그리던 마음의 진동이 빠이에서는 왠지 모르게 자꾸만 폭이 넓고 높낮이가 좁은 진동으로 바뀌고 있었다. 마을 전반에 깔려있는 여유에 내 몸과 마음이 압도당하고 있었다.



결국 내일 다시 남은 곳을 돌아보기로 하고, 워킹스트리트에 열린 야시장으로 향했다. 태국 자체가 물가가 저렴한 나라이지만, 방콕보다 치앙마이가 더 저렴했고, 치앙마이보다 빠이가 더 저렴하다. 어제 치앙마이 나이트바자에서 먹은 꼬치구이가 한화로 약 1,000원 정도였는데, 지나가다 발견한 할머니께서 판매하시는 꼬치구이는 약 400원 정도. 매운맛과 오리지널 맛을 약 800원에 구매했다. 내가 주문한 꼬치 두 개를 담아주시던 사장님께서 옆에 있던 스티키라이스를 가리키셨다. 나는 밥도 사라는 말씀이신 줄 알고, 괜찮다고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씀드렸는데 꼬치가 매우니 함께 먹으라며 서툰 영어로 "free"라고 하셨다. 돈부터 생각한 내 옹졸한 마음이 무척이나 부끄러워졌다. 낯부끄러운 두 손을 내밀어 꼬치구이 두 개와 스티키라이스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마치 친할머니 댁에 온 듯한 정을 느끼며, 할머니 덕분에 태국에 와서 첫날 편의점에서 먹은 삼각김밥 외에 처음으로 쌀을 먹을 수 있었다.


이후에도 느꼈지만 빠이의 사람들은 이 할머님을 닮았다.

여유롭고, 정 많고, 타인의 행복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나는 빠이에 무차별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소중한 양식을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어볼까 했지만 오늘의 숙소보다 더 분위기가 좋은 식당은 없을 것 같았다. 숙소 테라스에 야시장에서 사 온 음식들과 숙소의 과자, 그리고 편의점에서 구매한 술을 들고 나왔다. 캄캄한 숲 속. 보이는 것도 없고 고요한 적막 속에 풀벌레 소리만이 가득했던 밤.



너무나도 마음이 평화로웠다. 늘 켜두던 영상을 끄고, 휴대폰도 뒤집어 두고 오직 풀벌레 소리만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술은 맛있었지만 1초도 이 시간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세 모금 정도만 마시고 모두 남겼다. 내게 술은 취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빠이에서의 술은 더 이상 취해야 하는 음료가 아니었다. 이 밤이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꽤 오랫동안 잠에 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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