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이 (Pai)
빠이로 가는 길.
우려했던 커브길은 미리 먹은 멀미약이 효과를 발휘하고 있는 듯 굉장히 평화로웠다.
전날 잠을 많이 못 자서 피곤했지만 잠도 오지 않았고,
점점 다가오는 빠이에 대한 기대로 눈과 마음은 더욱 반짝이고 있었다.
그런데.
1시간 정도를 달렸을까. 갑자기 폭우가 내리기 시작했다.
전날 홍수 재난을 겪은 데다 창밖으로 보이는 아슬아슬한 절벽뷰에 꽤 긴장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산 중턱이다 보니 인터넷이 잘 터지지 않는 구역들이 있어서,
내가 어디쯤에 있는지 구글맵을 보며 위치를 가늠해야만 했다.
만약 내가 여기서 죽는다면 누군가 나를 찾을 수는 있는 걸까?
점점 더 거세지는 빗줄기를 보면서 나의 걱정은 커져 갔지만, 폭우가 내리는 좁은 커브길에서도 앞을 가로막는 오토바이나 차를 만나면 거침없이 추월하는 운전기사님과 곡예하듯 운전하는 기사님 옆에서 흔들림 없는 숙면을 취하고 있는 앞자리 태국 현지인을 보니 불안했던 마음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아, 이건 이 사람들의 일상이지.
조심히 운전을 해달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태국어 실력도 아니거니와 내가 걱정한다고 달라질 문제가 전혀 아니었므로, 그저 기사님을 믿으며 차에 몸을 맡기면 그뿐이었다.
이토록 나는 일상 속에서도 얼마나 많은 걱정들을 미리 하면서 살아왔던가.
2시간 반을 달린 차가 '메홍손(빠이가 속한 곳)'에 가까워지자, 하늘은 점차 개기 시작했다.
이윽고 빠이에 들어섰다. 알록달록한 풍경과 낮은 건물 사이를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배낭 여행자들의 스쿠터들이 등장했다.
고대하던 마을의 모습을 드디어 마주하게 된 것도 황홀했지만, 빠이에 들어서자마자 그보다 더욱 인상 깊었던 건 바로 미니밴 운전기사님이었다.
빠이에서는 어디서나 들개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조금 많이 과장을 해보면, 길을 걸을 때 사람 반 들개 반일 정도로 함께 공존하며 지낸다고 할 수 있는데, 우중 커브길을 그렇게나 질주하던 기사님께서 빠이에 들어서자마자 나타난 도로 위 들개들을 보시더니 속도를 10으로 내려서 서행하셨다. 기사님의 따뜻한 마음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지만, 머릿속에선 한국에서 일주일에 한두 번은 목격했던 로드킬로 생명을 뺏긴 동물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어서 떠오른 한국의 이미지는 콘크리트 속을 빠르게 질주하는 자동차였다. 씁쓸했다. 자연과 공존하고, 동물과 공존하며, 사람은 한낱 지구에서 결코 우수하지 않은, 그저 조화롭게 살아가야 할 동물일 뿐이라는 사실을 빠이에 오자마자 다시금 되새겼다.
이곳은 어떻게 배낭여행자의 무덤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을까.
빠이는 '배낭여행자의 무덤'이라는 별명 외에도 '히피들의 천국', '빠토피아'(빠이+유토피아)라는 놀라운 별명들을 가지고 있다. 자타공인 김히피로서 이곳이 얼마나 천국일지 잔뜩 기대되어, 자진모리장단으로 뛰는 심장이 주체가 되지 않았다.
첫 숙소는 앞선 에피소드에서 잠시 소개했듯 치앙마이 비행기 표를 예매하기도 전에 냅다 예약했을 정도로 이 여행에서 가장 기대한 곳이었다. 숙소는 빠이의 가장 메인 거리인 워킹스트리트 가장자리에 위치하고 있었고, 예약한 미니밴을 놓치는 바람에 줄어들어버린 호텔에서의 시간이 아까워 급히 미니밴에서 내렸다. 그러나 밴에서 내리자마자 눈에 꽉 차게 들어오는 빠이의 모습에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그대로 멈췄다. 그리고 늦어진 도착시간에 대한 아쉬움은 한 톨도 남기지 않고 싹 사라졌다.
내가 도착한 5시쯤은 일몰이 시작될 때였다. 상기된 표정의 여행자들이 가득한 워킹스트리트엔 노란색 전구들이 반짝이고 있었고, 양쪽으로 펼쳐진 오두막 같은 상점들 위로 펼쳐진 주황빛 하늘은 빠이에 도착하자마자 보이는 모든 풍경을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 보이도록 만들었다.
그 왜, 판타지 영화를 보면 어떤 입구를 넘어서자마자 다른 세상이 펼쳐지곤 하지 않는가.
마치 타패에서 겪었던 모든 나의 불운과 지겹도록 이어지는 꼬부랑 커브길은 어떤 시험 같은 것이었고, 그 시험을 통과한 자는 비로소 동화세상 속으로 차원을 이동할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 있는 듯한 곳이 빠이였다.
인생의 고난을 뒤로하고 천국에 온 과정과 비슷해서 바로 '빠토피아'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게 아닐까,라고 빠이에 발을 딛자마자 생각했다.
마침내 도착한 숙소. 잠시 여담이지만 나는 영어 이름을 '앨리'로 지을 정도로 동화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동화의 배경인 숲 속 오두막 같은 풍경을 동경하고 찾아다니길 좋아하는데, 한국에서 숙소 사이트를 보다가 나의 판타지가 그대로 담긴 풍경을 보고 기대하며 예약했던 곳이 바로 이 'Pai Village Boutique Resort (빠이 빌리지 부티크 리조트)'였다. 실제로 본 이곳은 정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토끼와 모자장수가 금방이라도 나타나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내가 꿈꿔오던 풍경과 기대보다 더 닮아있었다
풍경과 분위기에 취해 정신이 아득해지고 몽롱해지는 곳.
그곳이 바로 빠이었고, 빠이부티크빌리지였다.
짐을 정리해 두고 거리로 다시 나왔다. 빠이는 작은 동네라 메인 거리만 구경한다면 1시간 정도로 다 둘러볼 수 있고, 근처 빠이캐년이나 온천, 밤부 브리지가 유명해서 휴양을 위해서도 많이 찾는 곳이다. 작은 동네라 대중교통은 없지만 휴양지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오토바이를 타지 않은 관광객보다 오토바이를 탄 관광객을 더 많이 볼 수 있는 곳.
10분 정도 걸어가는데, 곳곳의 상점들이 하나같이 예뻐서 한 걸음 걷고 사진 찍고, 한 걸음 걷고 사진을 찍었다.
‘과연 한 시간 만에 이 동네를 다 구경할 수 있을까?’
한 발 한 발 내딛으며 눈길이 지나가는 곳마다 다시 되돌아보게 만드는 신비로운 곳. 마을 전반에 깔려있는 여유에 몸과 마음이 압도당하여, 늘 폭이 얇고 높낮이가 큰 곡선을 그리던 마음의 진동이 빠이에서는 왠지 모르게 늘어지고 있었다. 어떤 생각의 겨를조차 없이 입 밖으로 문장 하나가 튀어나왔다.
와 여기서 살고 싶어!
동네를 구경하다가 슬슬 배가 고파져, 매일 5시부터 열린다는 워킹스트리트 야시장으로 향했다. 태국 자체가 물가가 저렴한 나라이지만, 방콕보다 치앙마이가 저렴하고, 치앙마이보다 빠이가 더 저렴하다.
어제 치앙마이 나이트바자에서 먹은 꼬치구이가 한화로 약 1,000원 정도였는데, 지나가다 발견한 할머니께서 판매하시는 꼬치구이는 약 400원 정도. 매운맛과 오리지널 맛을 약 800원에 구매했다. 내가 주문한 꼬치 두 개를 담아주시던 사장님께서 옆에 있던 스티키라이스를 가리키셨다. 나는 밥도 사라는 말씀이신 줄 알고 괜찮다며 황급히 손을 내저으면서 말씀드렸는데, 꼬치가 매우니 함께 먹으라며 서툰 영어로 "free"라고 하셨다. 돈부터 생각한 내 옹졸한 마음이 무척이나 부끄러워졌다. 낯부끄러운 두 손을 내밀어 꼬치구이 두 개와 스티키라이스를 감사한 마음으로 받았다. 마치 친할머니 댁에 온 듯한 정을 느끼며, 할머니 덕분에 태국에 와서 첫날 편의점에서 먹은 삼각김밥 외에 처음으로 쌀을 먹을 수 있었다.
이후에도 느꼈지만 빠이의 사람들은 이 할머님을 닮았다.
여유롭고, 정 많고, 타인의 행복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나는 빠이에 무차별적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소중한 양식을 들고 숙소로 돌아왔다.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저녁을 사 먹어볼까 했지만 오늘의 숙소보다 더 분위기가 좋은 식당은 없을 것 같았다. 야시장에서 사 온 음식들과 숙소의 과자, 그리고 편의점에서 구매한 술을 숙소 테라스에 펼쳤다. 캄캄한 숲 속. 보이는 것도 없고 고요한 적막 속에 풀벌레 소리만이 가득했던 밤.
늘 켜두던 영상을 끄고, 휴대폰도 뒤집어 두고 오직 풀벌레 소리만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술은 맛있었지만 1초도 이 시간을 잊어버리고 싶지 않아서 세 모금 정도만 마시고 모두 남겼다. 내게 술은 취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빠이에서의 술은 더 이상 취해야 하는 음료가 아니었다. 이 밤이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꽤 오랫동안 잠에 들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