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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이 거부한 타패행 ep.3

나.. 빠이 갈 수 있어..?

by keemondo


신기루처럼 사라진 여권과 국제운전면허증.


여권은 그렇다 치고 국제운전면허증은 한국에서 짐을 챙길 때 이후로는 한 번도 꺼낸 적이 없는데 사라졌다니. 대체 이게 무슨 일인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짐을 풀고, 다시 넣고, 또 풀고 넣으며 10분 넘게 뒤졌지만 끝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둘.

나는 결국 이 두 개의 신분증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했다.


이 와중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어처구니없지만 ’ 빠이행은 어떻게 되는 거지?’였다.

오전에 빨리 긴급여권을 발급받으면 오후에는 빠이에 갈 수 있겠다는 생각에, 여행 전 J(계획형) 친구가 알려준 치앙마이 한국영사관 주소를 친구와의 카톡방에서 찾아보았다. 그리고 영사관으로 가기 전, 실낱같은 희망으로 혹시 전날 체크인 후 여권을 돌려받지 않았던가 싶어 리셉션으로 향했다.


방을 나서서 직원을 찾아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멀리서 내 얼굴을 본 직원분께서 갑자기 카운터에 있는 뭔가를 집으며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Passport?"

오 신이시여.


기뻐하는 나를 보던 사장님은 “너 정말 행운이야. 보통 여권을 잃어버리면 이렇게 쉽게 찾기 힘들어!”라며 웃으면서 말씀하셨고, 전날 밤 호텔 앞에 떨어진 여권과 국제운전면허증을 누군가가 보고 호텔에 맡겼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 볼트에서 내릴 때, 비도 오고 정신없는 와중에 팁을 내려고 가방 앞 주머니를 열었던 거 같은데 아마 그때 떨어진 듯했다.


이런 정이 넘치는 도시 같으니라고.

정말이지 치앙마이는 모든 사람들이 친절하고 정겹다.


(어제 그 볼트 기사님이 아닐까 해서 볼트 어플로 메시지를 보냈는데, 볼트 시스템이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아직 답장이 오지 않고 있다. 천사님 답장 부탁드려요..)





가벼운 마음으로 배를 채우러 나선 길.



핑강을 사이로 Thapae와 구분되는 ‘Wat Ket’이라는 동네에 미리 가보고 싶은 식당과 카페를 찾아봐두었고,

동네 구경을 할 겸 설레는 마음으로 핑강을 지나 걸어갔다. 하지만 걸을수록 내 마음은 무거워졌다. 어제 내린 비의 여파로 곳곳의 낮은 지대들 피해가 상당히 심각해 보였다.



앞서 걷던 외국인이 발길을 돌리는 것을 보면서 설마 이 동네도 잠긴 걸까 걱정이 되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핑강 다리를 지나자마자 동네로 들어서는 초입이 내리막길이었다.

내가 봐둔 식당은 내리막길이 시작되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곳이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심히 인도로 걸어가 봤지만, 걸으면 걸을수록 인도에도 물이 차올랐고, 좀 더 걸어가니 종아리까지 빗물에 잠겼다.



가려던 식당과 카페는 물론이고 일대의 모든 상점 문이 닫혀 있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웃과 이야기를 나누는 주민들을 보면서 사랑스러운 치앙마이의 주민들이 힘들지 않길, 그들에게 피해가 크지 않길 기도하며 발길을 돌렸다.




올드타운과 타패에서 문이 열린 식당과 카페를 찾아 배를 채우고, 빠이행 미니밴을 타러 가기 위해 호텔에서 체크아웃을 했다. 타패에서의 24시간 동안 충격적인 일들이 연달아 이어졌기 때문에 떠나는 발걸음이 솔직히 무척이나 가벼웠다.



그. 러. 나 떠나는 순간까지 나를 놓아주지 않는 타패에서의 불행.


한국에서 나는 미리 12시 반 미니밴을 예약해 두었고, 호텔에서 버스터미널까지는 약 15분 거리였다. 넉넉히 11시 40분쯤 체크아웃을 하고 택시를 불렀는데, 이게 웬걸. 택시가 잡히지 않았다.

잡힌 택시는 3-4분 뒤 돌연 취소를 하기 일쑤고, 이런 경우가 4-5번 반복되면서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콜을 취소한 택시에게 어플로 메시지를 보내 상황을 물으니 침수된 도로 때문에 갈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고, 또 다른 택시가 잡혀서 12시 반까지 가야 한다고 말씀드리니 그건 불가능하다고 취소가 되기도 했다.


12시가 되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카카오택시의 블랙과 유사한 가장 비싼 택시를 불렀다. 이내 잡힌 택시 기사님께 12시 반까지 가야 하니 서둘러 줄 수 있겠냐 물었고, 나의 마지막 희망의 택시는 12시 12분에 도착을 했다. 신호등 하나로 달라질 수도 있을 만한 아슬아슬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정말 말도 안 되게 이어지는 불행.



애초에 전날 일부러 아케이드 터미널이 가까운 타패로 숙소를 옮긴 것이었는데, 택시 내비게이션은 올드타운 쪽으로 돌아가는 길을 안내했다.

게다가 갑작스레 내비게이션이 경로 업데이트를 하더니 같은 곳을 두 번이나 돌게 했다!

(기사님도 황당해하셨다.)



실시간으로 도착 예정 시간은 늘어났고, 결국 40분에 도착한 버스 터미널.

오늘 예약해 둔 빠이 숙소가 치앙마이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하기도 전에 예약했던 곳인 만큼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였으므로, 일단 빨리 빠이행 버스부터 다시 예매하러 갔다. 오늘 갈 수 있는 버스가 없다면 택시비 10만 원을 주고서라도 빠이를 가겠다는 결연한 의지로 오늘 남아있는 버스가 있는지 여쭤보니, 다행히 1시간 뒤인 1시 반 버스 좌석이 남아 있다고 했다.

미리 예약해 둔 명당 좌석을 놓친 건 아쉬웠지만 그다음으로 좋은 좌석인 2A좌석을 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아니, 오늘 빠이에 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





한 시간 후, 드디어 오매불망 기다린 밴에 탑승했다.

밤새 내리는 폭우에 과연 빠이를 갈 수 있을까 우려했지만 너무나도 쾌청했던 빠토피아 행



창밖에 펼쳐진 거짓말처럼 눈부신 하늘을 보고 있으니 지난 24시간이 떠올랐다.

홍수 재난을 겪고, 여권을 잃어버려서 당황하고, 빠이행 버스 명당자리를 예약해 두고 놓쳤지만, 이런 게 여행이고 삶이겠다는 생각을 했다.


뜻대로 되는 게 없다 생각했지만

여권 재발급을 하지 않게 된 것도 행운이고,

잠을 못 잤기 때문에 죽음의 빠이행 커브 코스를 자면서 갈 수 있게 되었고,

1시 반으로 미뤄진 차에는 한 라인 당 한 명씩만 타서

중간에 허리가 아프면 잠시라도 누울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진짜 목적지였던 빠이 기간 내내 비 소식이 없다고 했다.

모든 게 행운으로 이어진 타패에서의 불행.



뜬금없지만 잠시 고백하자면, 내 좌우명은 ‘아모르파티(Amor Fati)’다.

모든 건 운명이라는 뜻인데, 나는 여기서의 ‘운명’이 미래가 아닌 과거라고 해석한다.

내가 겪는 이 모든 것들은 더 잘되고 행복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겪어야만 했던 일이라고 말이다.

이번 여행도 나의 좌우명처럼, 불행이라 생각했던 모든 일들이 행운으로 바뀌었다. 이것은 내 삶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모든 일들은 나의 더 큰 행복을 위해 겪어야만 했던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드는 것이 내가 현재를 살고, 여행을 다니는 이유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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