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하늘이 거부한 타패행 ep.1

100년 만의 홍수 재난

by keemondo

사실 이번 치앙마이 여행의 진짜 목적지는 태국 북부 지역에 위치한 메홍손의 ‘빠이’였다.


배낭여행자들의 무덤, 혹은 빠토피아(빠이+유토피아)로 불리는 이 도시는 대체 어떤 곳이길래 이런 엄청난 별명을 가지게 된 걸까?

한국에서 치앙마이행 비행기 표를 예매하기도 전부터 무작정 빠이 호텔과 빠이 행 버스부터 예약했을 만큼 이곳에 대한 기대가 컸으므로, 빠이에 가기 전날은 미니밴을 타는 버스터미널 2 아케이드와 조금이라도 가까운 숙소로 옮기고자 타패로 향했다.

(이 선택이 100년 만의 홍수 사건의 중심에 서게 만들게 되리라는 걸 이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THAPHAE GATE


타패는 올드타운의 동쪽 문(THAPHAE GATE)을 넘어선 지역으로, 감각적인 카페와 식당이 즐비한 거리에는 치앙마이의 가장 대표 야시장인 나이트바자와 저렴한 식재료 및 기념품을 구매할 수 있는 와로롯 시장 등이 있다. 현대적인 맛집과 역사적인 장소들, 그리고 치앙마이 현지의 삶이 적절히 섞인 매력적인 동네 타패. 이곳에서 만난 현지인들은 치앙마이에 온 후 올드타운에만 있어 보았다는 나의 말을 듣고는 넌 아직 치앙마이를 제대로 못 봤다며, 타패가 최고라는 말과 함께 엄지를 들어 올렸다. 현지인에게도 특별히 사랑받는 동네라는 생각에 더욱 이 동네에 호기심이 일었다.



타패에서는 태국 전통 방식의 고즈넉한 숙소를 경험해 보고 싶어서 ‘롬포 부티크 호텔’이라는 곳에 묵기로 했다. 이 호텔은 타패게이트와 나이트 바자, 와로롯 시장의 중간 지점에 위치해 도보 10-15분 거리로 동네를 둘러볼 수 있었고, 1박의 가격이 무려 2만 원 대였다. 미래가 불투명한 디스크 환자로서 숙박비를 아낄 수 있기에도 좋은 기회였다.



온통 나무로 지어진 내부, 그리고 마치 치앙마이의 역사가 엿보이는 방. 오래된 에어컨에서 나는 소음과 세월이 묵은 듯한 습기가 나를 조용히 누르는 곳. 그러나 3만 원이 채 되지 않는 가격의 방이라기엔 손님에 대한 사랑이 너무나도 느껴지던, 사랑스러운 롬포 부티크 호텔.


(습기에 예민하신 분들께는 힘들 수 있어서, 장박으로는 개인적으로 추천하지 않습니다)



웰컴 푸드라며 수줍게 건네는 사과는 직원들의 미소만큼이나 달았다.




디스크 환자가 여행을 할 때는 꼭 지켜야 하는 규칙이 있다. 이건 허리디스크로 1년을 누워 지내는 동안 나의 삶을 돌아보며 깨달은 진리인데, 바로 아프기 전에 미리미리 꼭 쉬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


생각해 보면 나는 늘 일은 벌이면서 쉬는 타이밍은 몰라 크게 앓곤 했다. 대학생 때는 복수전공에 교직이수를 해서 두 과목 교원 자격증을 따느라 학점 채우기에 허덕였고, 졸업 후에는 취직 후 본업을 하면서도 늘 부업을 찾았다. 보고 싶었던 두 시간의 영화도 몇 번이나 끊어서 볼 만큼 혼자만의 초조함에 갇혀 무리하게 일하다 몸살에 걸리고 번아웃이 오기도 했지만, 체력을 회복하면 나는 아팠던 시간을 보상하려는 듯 더욱 바쁘게 지냈다. 대체 나는 왜 이렇게 늘 바빠야만 했을까.

퇴사 후 수술을 받고 그렇게나 피하려고 했던 쉼의 시간을 무한히 가지게 되고서야 나는 이 부분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그제야 나는 내면에 뿌리 깊게 자리해 스스로 있는지조차 몰랐던 자아를 찾아낼 수 있었다.


나는 자신감이 무척이나 결여된 사람이었다.


스스로를 믿지 못했기 때문에 늘 불안했고, 그 불안함을 외면하고 싶어 바쁘게 지내면서 열심히 살고 있다고 자위하며 살아오고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된 것이다. 그렇게 스스로를 기만하며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떠다니며 살다가 갑자기 허리가 뚝 고장 나버렸다. 처음 허리디스크가 발병했을 땐 대체 왜 하필 내게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억울했고, 이유가 궁금했고, 절망스러웠지만 이제는 인정한다. 허리 역시 나의 쉬지 못하는 성격 때문이었다는 걸. 소를 많이 잃고 외양간을 아주 뒤늦게 고치고 있지만, 이번 외양간은 무너지지 않게끔 튼튼히 고쳐볼 생각이다. 고장 난 몸도, 마음도, 그리고 오늘의 희망도.


그래서 아침부터 몸을 움직이고, 올드타운 서쪽에서 타패까지 걸어 다니느라 고생한 허리와 다리를 쉬어주기 위해 호텔에서 한 시간 정도 누워 있다가 와로롯 시장으로 향했다.





와로롯 시장(Warorot Market)으로 걸어가는 길은 마치 새벽 시장의 동대문 풍경 같았다. 천 가게와 저렴한 액세서리 가게들, 그리고 옷을 포장한 자루들이 한 블록 내내 이어져서, 인적이 드문 길을 걸으면서도 왠지 모르게 친숙한 마음이 들었다.



와로롯 시장과 바로 맞은편의 똔람야이 시장은 치앙마이의 가장 큰 전통시장이다. 망고스틴 1kg에 한화 1,400원이라는 말도 안 되는 과일 가격과 저렴하지만 고품질의 수제 공예 작품들, 그리고 태국의 유명한 요리들을 밀키트로 판매하고 있어서 마지막 날 기념품 사러 오기에 좋은 곳.



내가 이 시장을 찾았던 건 바로 '사이 우아'라는 태국 북부 지역의 전통 소시지를 먹어보기 위함이었는데, 다진 돼지고기에 카레 소스와 매콤한 향신료를 넣어 밥반찬으로 먹기에도 훌륭하고, 숙소에서 술 한 잔 할 때 먹을 안주로도 좋을 듯했다.


사이 우아를 먹으면서,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것이 여행의 장점이자 목적이라면, 내가 어느 곳에 머물든 걸어보지 못한 새로운 길을 걷고, 새로운 맛을 알고, 새로운 친구를 사귀는 등 온갖 새로운 것들을 한다면 그것이 바로 '여행'의 삶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했다.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만족스러웠던 맛에 감탄하며 왜 사이 우아는 여태 한국에 없는 걸까, 통탄을 금치 못하면서 나이트바자(Night Bazaar)로 발걸음을 돌렸다. 돌아선 눈에 비친 건물은 종로 세운상가를 닮아 있었다.



나이트바자에 도착할 때 즈음, 폭우가 내렸다.



하지만 다행히 이곳은 실내 포차처럼 꾸며진 곳이라 비가 와도 즐길 수 있었고, 라이브 가수의 공연과 반짝이는 전구, 그리고 저렴하고 맛있는 음식들과 술에 빗소리까지 더해지니 낭만이 폭발해 버렸다.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서 만들어내는 분위기에 압도당하여, 애초 계획이었던 맥주 한 병이 어느새 두 병으로 늘어나 있었다.


안돼, 강 아래쪽에 있는 클렁매카에 가봐야지.


가까스로 관광객으로서의 의무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밖으로 나온 나는 눈을 의심했다.



두 시간 만에 나이트바자 거리는 강으로 변해 있었다.


나..

집에 어떻게 가지...?

keyword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