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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

by keemondo


내가 빠이라는 도시에 더욱 빠져들 수 있었던 건

바로 차이와의 만남 덕분이었다.


Jazz House Pai


야시장을 걷다가 전날 가보지 않은 새로운 골목에 들어섰는데, 그곳에는 '재즈하우스빠이(Jazz House Pai)'라는 재즈펍이 있었다. 내가 간 시간은 7시 40분쯤이었고, 재즈 공연이 막 시작된 이른 저녁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야시장에서 저녁을 먹고 있었으므로, 나는 이 재즈바의 맨 앞자리를 선점할 수 있게 되었다.


맥주를 마시며 공연을 즐기던 와중,

옆자리에 앉은 분들의 음료가 눈에 띄었다.


나 빼고 모두 코코넛 워터


코코넛 워터..?


이곳은 펍이고, 내가 생각하는 펍은 자고로 맥주나 칵테일이 함께 해야 하는 것인데! 혹시 이렇게 코코넛 모양으로 나온 술이 이 가게의 시그니처 점보 사이즈 칵테일인 걸까?


궁금해진 나는 옆자리 사람에게 이 코코넛이 술인지 물어봤고, 그저 코코넛 워터라는 답변이 돌아왔다. 의아해하는 나를 보며 웃던 그. 그가 바로 차이였다.


이스라엘에서 온 차이는 15년 동안 세계를 여행하다가 지금은 빠이에 꽤 오래 머물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한국 드라마와 문화에 관심이 많았던 차이는 내게 최근에 본 한국 드라마 '눈물의 여왕'과 '환혼'을 이야기해 주었고, 내가 아직 '환혼'을 보지 못했다고 하니 제발 꼭 보라며, 정말 재밌는 드라마라며 추천을 해주었다.

"한국인에게 한국 드라마를 추천해 주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니, 너무 웃겨!"

우리는 깔깔거리며 대화를 나눴고, 그렇게 친구가 되었다.




공연을 보는 내내 우리는 틈틈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지금 공연을 하는 중인 가수가 다음 타임 공연의 드러머라는 것. 그리고 차이는 그 밴드의 기타리스트고, 밴드의 키보드를 맡은 여신은 내가 살았던 브리즈번의 이웃이었으며, 베이스 연주자는 바로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룹의 일원이 한국인이라는 말에 신기해하던 와중에 이 베이스 연주자가 공연을 위해 펍으로 들어섰고, 차이는 그를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빠이에서 한국어로 대화할 사람을 이렇게 만나다니 너무나도 재밌고 신기했던 재즈하우스빠이에서의 시간. 그 외에도 중간중간 테이블에 다녀가거나 합석한 친구들을 차이는 모두 내게 소개해주었다. 국적은 모두 달랐지만 빠이에 머물고 있는 외국인들이 서로서로 친구가 되어, 지역 커뮤니티에서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이방인과 현지인의 경계가 사라지는 마법 같은 곳. 나는 지금 빠이에 있는 게 아니라 지구에 머물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는 것 같았다.


차이의 공연은 9시부터 시작이었는데, 태국에 와서 밤에 혼자 돌아다니지 말자고 다짐했기 때문에 30분 정도만 보고 가겠다며 차이에게 아쉬운 인사를 했다. (특히 빠이는 낮이나 밤에 혼자 여행 왔냐고 말을 거는 사람들이 꽤 많았기 때문에 더욱 조심해야 했다.) 차이는 내게 내일 ‘빠이토요 마켓’에 올 건지 물어봤고, 나는 들르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다음날 빠이토요마켓에서의 만남을 기약하며 그는 공연을 하러 무대에 올라갔다.


9시 반 즈음 자리에서 일어나 집으로 향하는데, 갑자기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듯 스치는 생각.


'맙소사. 약속 시간을 안 정했잖아????'




빠이 토요 마켓


다음날. 오전 11시쯤 빠이 토요 마켓이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빠이 토요 마켓은 시장이라기보다는 지역 주민들의 작은 축제 같은 느낌이었다. 꽤 작은 시장이지만 가족들이 함께 공원으로 나와 시간을 보내고 작은 플리마켓들이 열려 있었는데, 내가 다녀본 어느 야시장이나 시장보다 가족 친화적인 느낌이라 좋았다. 끈끈한 유대로 이어져있지만 서로의 거리를 지키며 자유로운 사람들. 그리고 여유라는 공기가 흘러넘치지만 또 한편으로는 활기찬 곳. '빠이'라는 도시를 축약해 놓은 게 바로 이 '빠이 토요 마켓'이 아닐까 생각했다.


질 좋고 저렴한 수제 공예품들을 구경하다가 전날 먹지 못한 사모사(삼각형 모양의 춘권 같은 튀김)를 발견했다. 각각 다른 맛의 사모사 3개를 구입하고 있는 나의 어깨를 누군가 톡 쳤다. 돌아보니 어느새 바로 옆에 차이가 와 있었다.

“어머!! 차이!!! 하이!!!!! “

시간을 정하지도 않았는데 이렇게 만나지다니. 놀랍고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를 했다. 정말이지 신기함의 연속인 빠이.


차이가 사준 첫 코코넛 워터


함께 토요마켓 거리를 걸으며 지난밤 공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때 왼쪽에 코코넛 부스가 나타났다.

"너 마셔볼래?"

차이는 지난밤에 내가 물어보았던 코코넛 워터를 사주고 싶다고 했고, 그 덕분에 마트에서 팩으로 판매하는 코코넛 워터가 아닌 실제 코코넛 원액을 처음 마셔보았다. 마치 설탕을 첨가한 듯 달았던 코코넛 워터. 차이의 마음이 담겨 더욱 달았던 토요일 한낮의 코코넛 워터였다.


꽤나 무거운 코코넛워터를 두 손으로 들고 주민들 사이에 뒤섞여 앉았다. 아이들의 웃음소리, 연주가들의 음악 소리, 반갑게 인사 나누는 목소리들을 듣고 있다가 문득 나는 차이에게 물었다.


나 : 너는 여러 나라를 다녀봤잖아. 그런데 다른 나라가 아닌 왜 빠이에 계속 살고 있는 거야?

차이 : 나는 빠이가 좋아. 이곳은 자유로움 그 자체야.

나 : 아 무슨 마음인지 알 것 같아. 나도 그래서 빠이가 좋아.

차이 : 네가 빠이에 처음 와서 자유로움을 느끼고 빠이가 좋았다면, 두 번째 올 땐 아마 여기서 살게 될 거야.


나는 차이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아도 미리 사둔 치앙마이로 돌아가는 미니밴을 타지 말까,라는 마음이 슬금슬금 고개를 쳐들고 있는 와중이었고, 이 버스를 타지 않는다면 정말이지 나는 이곳에서 일을 알아보고 있을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30분쯤 대화를 나누다, 차이는 토요마켓에서 열리는 JAM (악보 없이 여러 사람들이 자유롭게 참여하며 연주하는 즉흥적인 공연)에 참여하기로 했다며, 함께 가겠냐고 물었다.


잼이라니!


무조건 보고 싶다며, 함께 잼이 열리는 장소로 걸어갔다. 가는 동안 차이는 몇 번이나 멈춰 서서 친구들과 인사를 나눴고, (그랬다. 차이는 빠이의 셀럽이었다!) 그 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건 부스를 운영하던 어느 할머니께서 차이 손에 들린 빈 컵을 보시고는, 자신이 운영하는 부스 쓰레기통에 버리라며 일부러 차이를 부르시는 장면이었다.

타인의 생활에 간섭하지는 않지만, 타인의 불편에 관심을 가지고 배려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큰 감명을 받았다.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 사람들이 가져야 하는 태도가 바로 이런 게 아닐까.


빠이 토요 마켓에서의 잼


서서 구경하려던 나를 차이가 테이블 의자에 앉으라고 해서 앉긴 앉았는데, 잼이다 보니 원래 참여하기로 했던 멤버들 외에 지나가던 관광객도 자유롭게 테이블로 와 참여를 했다. 테이블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나는 왠지 무엇인가 해야 할 것만 같은 압박감이 들었다. 슬그머니 스쿠터 헬멧을 소심하게 드럼 삼아 두드리다가, 테이블에 놓인 미니 탬버린으로 아이템을 업그레이드하여 함께 곡을 만들어 나갔다. 생면부지인 사람들이 햇살 가득한 토요일 오전에 모여 음악으로 하나가 되는 이 광경은 정말이지 너무나도 아름답고 벅차서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여행자의 무덤이라 불리는 빠이에는 현지인이 된 여행자들로 가득하다. 지구 속의 작은 지구인 곳. 현지인보다 외부인이 더 많았으므로, 나 또한 더 이상 외부인이 아니게 되는 곳.

그래서일까. 빠이에서는 누구나 스스럼없이 말을 걸고, 누구나 친구가 된다. 혼자였으나 누구도 혼자이지 않은 그곳이 바로 빠이였다.


기억 속에서 영원히 맑은 날일 그날.


떠올리기만 하면 뜨끈한 무언가가 혈관을 타고 올라와 온몸을 따뜻하게 데워주는 광경이 하나쯤 있을 것이다. 나는 아무래도 이 기억을 가지고자 빠이로 향하게 된 것이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한국에 돌아가면 악기를 하나 꼭 배워야겠다고 다짐했다.




차이 : 너는 삶에 있어 이루고 싶은 꿈들이 있어?

나 : 내 꿈은 내가 갈 수 있는 지구의 모든 곳을 가고, 법 안에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는 거야.

차이 : 휴가처럼? 혹은 여행가처럼 항상 살고 싶다는 말이야?

나 : 응 글과 함께. 나는 어릴 때부터 항상 내가 누군지가 궁금했는데, 새로운 곳을 가고, 다양한 경험을 하고,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고, 글을 쓰는 게 나를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해. 나는 내가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경험을 하고 싶어!

차이 : 흥미롭네.. 나는 많은 곳을 다녔고, 많은 것을 경험했지만 지금의 평화로움에서 만족감과 행복을 느껴. 항상 무언가를 찾아 헤매는 걸 그만둠으로써, 나 자신을 더욱 찾을 수 있었어.

나 : 정말 흥미롭다. 아마.. 나는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아직 충족하지 못한 거 같아. 그리고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이 몇 가지 있는데, 아직까지 내 경험에서는 답을 찾지 못하겠어. 그래서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싶어.
이번 치앙마이 여행에서, 특히 빠이에서 나는 편안함을 느꼈고, 새로운 경험들을 하면서 나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어. 이게 내가 여행을 좋아하는 이유야.

차이 : 응 이해돼.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항상 정답은 너이고, 과거에도 너였다는 거야. 너 자체가 정답이야. 너는 이미 지금의 너처럼 완벽해. 네가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말이야.
스스로를 사랑한다면, 너의 마음이 원하는 걸 외부에서 찾지 않고도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너는 이미 100% 퀸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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