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휴식처에서의 깨달음
디스크 환자로서 여행을 할 때, 아니 삶을 살아갈 때도 가장 중요한 것은 틈틈이 허리를 쉬어주는 일이다. 뻐근함이 올라오기 전에 미리미리 쉴 타이밍을 맞추기는 쉽지 않다. 특히 여행을 할 때는 제한된 시간의 일분일초가 아까워 무리하기 쉽기 때문에 아쉬움을 뒤로하고 쉬는 시간을 챙기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오전에 동네 한 바퀴를 걷고 홈스테이 숙소 침대에 누워 쉬고 있을 때였다. 빠이 정보를 나누다 친해진 블로거님께서 식당과 카페 한 곳을 추천한다며 연락이 오셨길래 구글 지도로 검색해 보니, 다음날 숙소 근처에 위치해 있었다. 두 맛집을 저장한 뒤 주변에 가볼 만한 곳을 구글맵으로 둘러보다가, 천국이 이런 모습일까 싶은 뷰의 'Lalamal Cafe'를 발견했다. 지금 있는 곳에서도 도보 40분 정도로 크게 멀지 않은 거리였지만, 거리보다 높이가 문제였으므로 이 기회에 타보고 싶었던 스쿠터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태국은 오토바이 이동이 많고, 특히 치앙마이와 빠이는 대중교통이 거의 없는 편이기 때문에 학생들도 오토바이를 이용한다. 빠이는 치앙마이 보다 더 작은 마을이라, 스쿠터를 배운다면 좀 더 단순한 거리를 달릴 수 있는 빠이에서 시작해 보는 게 좋을 듯했다. 갑자기 목표가 생겨버린 나는 흥분에 휩싸여 바로 오토바이 렌털샵과 교육 장소를 찾아보았고, 목적지를 정한 후 거리로 나섰다. 이럴 때 빛을 발하는 나의 행동력.
처음엔 이게 하루 만에 가능할까? 싶었지만 의외로 나는 베스트 드라이버였다. 처음엔 스쿠터 시동 거는 방법도 헷갈려했지만, 1시간도 안 돼서 턴이 멋지다는 칭찬과 함께 수업을 종료했다. 뿌듯한 마음으로 24시간 이용할 수 있는 스쿠터를 빌렸고, 다음날 일어나자마자 Lalamal Cafe로 향했다.
전날 밤과는 비교도 안 되게 한산해진 워킹스트리트 거리를 지나고, 땀 흘리며 걷던 뙤약볕을 스쿠터를 타고 시원하게 달리니 너무나도 상쾌했다. 홀로 아무 계획 없이 자유롭게 여행하고 있었지만, 발에 날개가 달아줄 아이템을 획득하니 더욱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게 되어 가슴이 뻥 뚫리는 듯했다.
Lalamal Cafe
그렇게 도착한 Lalamal Cafe. 카페 마당에 스쿠터를 주차하고 안쪽으로 들어서자마자, 눈을 의심했다.
세상에. 이곳은 천국인 건가?
하늘과 구름과 땅이 뒤엉킨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풍경에 잠시 어지러워 휘청거렸다. 눈이 멀어버릴 것만 같았다.
평일 아침이라 그런지 카페에는 커플 한 쌍과 책을 가져온 한 명의 손님만 있었다. 나는 바깥을 향해 몸을 내밀고 앉아있는 손님께 옆 자리에 앉아도 될지 여쭤봤고, 흔쾌히 앉으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의 옆에 놓인 빈백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가져온 다이어리에 여행기를 쓰기 시작했다. 십여 분쯤 지났을까. 고개를 들어 옆을 돌아보니 옆자리의 그는 책은 여전히 덮어둔 채 정확히 처음에 본모습 그대로 하염없이 멍하게 하늘만 계속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늘만 쳐다보네? 무슨 일이 있나?’
슬그머니 그가 걱정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다이어리를 펼쳐 여행기를 적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 그를 따라 하늘을 바라봤다. 멀리 보이는 산에는 구름이 걸쳐져 있었고, 구름은 공기에 기댄 채 아주 천천히 하늘을 흘러가고 있었다. 고요한 사방 속 커플들의 정다운 말소리만이 이따금씩 노래처럼 들려왔다. 그 순간. 누군가 내게 소리치는 듯했다.
‘이렇게 멋진 풍경이 눈앞에 있는데,
넌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정확히 네가 해야 할 일이야!'
그러니까 말이다. 비행기를 타고 치앙마이로 날아와 다시 버스를 타고 빠이로 왔고, 이곳에 오고 싶어 스쿠터까지 배우고 왔는데. 이 멋진 풍경을 앞두고 고개를 숙인 채 나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걸까? 나는 그 즉시 펜을 내려두고 다이어리를 덮은 뒤 빈백에 몸을 기대고 누웠다. 그리고 하염없이 하늘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냈다. 쉴 새 없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분주하던 뇌에 공기가 들어차는 기분이었다. 마음이 평화로이 가라앉는 걸 느끼며, 그가 왜 책을 볼 수 없었는지 비로소 이해가 되었다.
허리 수술을 하고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누워서도 아파했지만, 아무것도 못하는 그 시간을 나는 너무나도 불안해했다. 체력에 비해 늘 욕심이 많았던 터라 대학생 때는 복수전공에 교직이수까지 무리하며 공부했고, 회사를 다니면서도 늘 부업을 하면서 또 다른 일거리를 찾아 헤매던 N잡러의 삶. 그렇게 바쁘게 지낸 이유가 나의 저조한 자존감을 잊고 열심히 살고 있다 자위하려 했다는 것을 지금은 알지만, 어쨌든 나는 쉴 줄 모르는 사람이었고 쉬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그런 내가 빠이에 와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야말로 지금 해야 할 일을 100% 꽉 채워하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다이어리에 무언갈 끄적이는 건 일상 중에서도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행위조차 마치 시험 시작 10분 전에 딴 일을 하는 듯 느껴졌다. 의무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 최초의 시공간에서 빈백에 누워 구름의 움직임을 쫓고, 가끔 찾아오는 새의 날갯짓을 바라보았다. 비로소 제대로 쉬고 있다는 생각을 했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것조차 시간 낭비가 되는 그런 곳이었다.
이 시간 동안 나는 나 자신에게 기대하는 바가 없었다. 한국에서는 내가 뭘 하고 있고, 과거에 무엇을 했었다는 걸 놓기가 힘들었으며, 더 나은 내가 되는 걸 증명해 보여야만 하니 계속 욕심을 놓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여행을 하면서는, 특히 빠이에 와서는 그저 하루를 무사히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스쿠터를 배워서 카페에 오는 것 정도의 아주 작은 성취로도 자존감이 올라갈 수 있다는 게 좋았다. 특히 정말 내가 원하는 것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면서, 좀 더 내 마음과 삶에 순수해질 수 있다는 게 내 마음을 크게 위로해주고 있었다.
살며 가장 중요한 건 ‘자유’라고 생각한다. 늘 자유를 가장 추구하며 살아간다 생각했지만, 나는 마치 방향을 잃어버린 마라토너처럼 결코 결승전에 도달하지 못하며 그저 열심히 뛰기만 하다 지치기 일쑤였다.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일단 열심히 달리고만 있었으므로 쉴 수도 없었다. 목적지가 없었으므로 내가 쉰다면 모든 목적지에서 도태될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런 내가 빠이에 와서 드디어 방향을 찾았다. 목적지는 바로 나여야만 했다.
무조건 나다울 것
그리고 나는 이곳에서 배운 진정한 휴식을 통해 나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일과 진심 또한 배웠다.
1. 내가 진심으로 좋아하는 것을 진심으로 즐기면서 하기.
2.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진심을 다하고, 나를 아껴주는 사람에게 진심으로 대하면서 나의 시간을 그 둘로 채우기.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바로 "진정한 자유"였다.
나는 빠이에 온 지 3일 만에 이번 여행의 목적을 모두 이루었다. 고민하던 문제들이 쌓이고 쌓여 머릿속이 어두컴컴했는데, 안쪽 깊은 곳에서 초 하나가 켜진 듯했다. 실마리가 조금씩, 조금씩 선명해지고 있었다. 더 이상 이 여행에 여한이 없었고, 나 또한 여행자의 무덤에 묻히기 전에 치앙마이행 버스에 올라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