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남은 여행 속 장면들

by Keempado
Miami Beach, 2013

나는 영화를 좋아한다. 단순히 영화를 감상하는 시간뿐만 아니라 어떤 영화를 볼 것인지 정하는 것부터 영화를 다 보고 난 뒤 여운에 잠기는 일까지의 과정 모두를 좋아한다. 하지만 시간을 들여 리뷰를 읽거나 내가 좋아하는 영화와 비슷한 영화를 검색해서 보고 싶은 영화를 찾았다고 해도, 모든 영화가 마음에 쏙 드는 영화로 남는 건 아니다. 나는 드라마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스릴러인 경우처럼 장르조차 예상하지 못한 영화도 많았고 내가 원하던 장르였지만 연기나 연출이 기대와 달랐던 경우도 많았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영화를 보는 이유는 어떤 영화든, 마음에 남는 대사나 마음에 남는 장면은 꼭 하나씩 남겨 주었기 때문이다.


여행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아무리 꼼꼼하게 열심히 준비한다고 해도 여행에서는 내가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진다. 힘들게 찾아간 곳이 갑자기 문을 닫기도 하고 마음이 너무 잘 맞는 사람과 떠난 여행에서 다툼이 생기기도 한다. 날씨가 속을 썩일 때도 있고 음식이 안 맞아 고생을 하기도 한다. 내가 미처 예상하거나 준비하지 못한 일들이 연속해서 벌어지면 그 여행은 아쉬운 여행이나 속상한 여행으로 남는다. 하지만 아무리 좋지 않았던 여행이라도 돌아보면 특별한 순간 하나씩은 남는다. 우리가 계속해서 여행을 떠나는 건 이 점을 알기 때문이 아닐까. 오늘은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내 마음에 또렷이 남은 여행 속 장면들을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Miami beach, 2013

친구와 함께 플로리다로 여행을 떠났을 때였다. 나도, 친구도 플로리다는 처음 가보는 거였다. 처음이라 설렘과 매력이 배가 될 때가 많았지만 처음이라서 겪는 시행착오도 많았다. 그날은 유니버설 스튜디오가 있는 '올랜도'시에서 바다가 유명한 마이애미'시로 이동하는 날이었다. 이미 전날 모든 체력을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소진하고, 새벽같이 마이애미로 가는 버스를 타고 여섯 시간을 달린 후였다. 우리는 피곤했고 배가 고팠으며 더위까지 먹은 상태였다. 빨리 목적지에 도착해서 짐을 놓고 백사장에 눕고 싶었지만 그때는 몰랐다. 우리가 알아봤던 버스의 노선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점점 목적지와 멀어지는 GPS를 보면서 헐레벌떡 버스에서 내렸다. 누구의 잘못도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예민하고 지친 마음은 서로를 할퀴었다. 결국 우리는 한 시간 넘게 방황하다 목적지인 ‘마이애미 비치’에 도착했는데, 그 순간 내 눈 앞에 놓인 바다의 모습은 딱 사진 그대로였다. 눈부시게 하얀 백사장과 에메랄드 빛깔의 바다, 그리고 그림 같은 하늘까지. 지치고 속상한 마음이나 전날의 피로 가방의 무게 같은 것들은 한순간에 모두 녹아 없어졌다. 플로리다를 여행하면서 이 장면을 처음 발견했을 때보다 훨씬 재밌고 행복했던 시간이 많았는데도 지금까지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는 장면은 이 바다다.


Marina Beach, 2013

샌프란시스코에서 지낼 때에는 근교로 여행을 자주 갔다. 이날의 계획은 '몬터레이'를 가는 거였다. 농장이 많은 도시에서 과일을 마음껏 사 먹고 '카멜 비치'에서 일몰을 보는 게 우리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예정보다 일정이 늦춰지고 차가 막히기 시작하면서 일몰은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함께 여행을 갔던 언니가 근처의 아무 바다나 가서 해 지는 걸 보고 가는 게 어떠냐고 물었고 우리는 가장 가까운 바다였던 ‘마리나 스테이트 비치’로 향했다. 다행히 해가 지기 전에 도착해서 해가 떠나는 모습을 놓치지 않을 수 있었는데 한 부자가 바다를 향해 걸어왔다. 얼굴이 너무 닮아 누가 봐도 부자임을 알 수 있을 것 같던 그들은 아무 말 없이 거리를 두고 걸어와서는 또 아무 말 없이 거리를 두고 벤치에 앉았다. 그들은 해가 지는 중에도, 해가 지고 나서도 말없이 바다만 바라보았다. 수없이 본 일몰 중에서도 이 장면이 기억에 오래 남아있는 건 조용히 바다를 함께 보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그 장면을 완성시켰기 때문이었다.


나의 지난날들이 좋지 않았던 날과 좋았던 날들로 무수히 섞여있던 것처럼, 여행도 쓰고 단 시간들이 적절히 섞여있었다. 앞으로도 나는 삶의 갈림길에서 명확한 선택을 내리기 어려울 것이고 그로 인해 좌절하거나 상처 받는 것 또한 지속해서 일어날 일이겠지만, 삶은 잊히지 않는 영화 속 명장면처럼 반짝이는 순간들도 함께 줄 것이다. 내가 바라던 답은 아니지만 이쯤 되면 정해진 답이 없어서, 나를 포함한 그 누구도 인생을 알지 못해서, 우리의 하루가 번번이 풀어야 하는 숙제고 그로 인해 살아있음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는 걸 인정해야 될 때가 된 것 같다. 앞으로는 아직 발견하지 못한 명장면들을 더 부지런히 찾아보려고 한다. 나의 이야기가 멈추지 않고 지속될 수 있도록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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