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곳이 어디든, 모두 천국이 될 수 있다는 것

by Keempado
Seoul, 2017

사진 속 공책은 뉴욕의 한 서점에서 샀던 공책이었다. 저 공책을 샀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미국에서 일을 그만두고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하루빨리 내 나라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서 지내고 싶었다. 더는 이방인으로써 겪어야 하는 차별이나 그놈의 '신분' 때문에 마음고생하지 않아도 되는 곳, 그때만 해도 한국은 공책에 적힌 단어처럼 그저 천국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한국으로 돌아온 지 이 주도되지 않아 나의 생각은 그저 바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돌아온 곳에서의 삶도 미국에서의 삶과 같이 녹록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한국이 아닌 미국이야말로 천국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미국의 자유로움, 그곳에서 누렸던 문화나 자연을 비롯해 그곳에서의 나를 그리워하기 시작했다. 분명 뉴욕에서는 천국 같은 한국을 기대하며 샀던 공책인데 아이러니하게도 공책은 그 반대되는 내용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그러다 우연히 본 TV 프로그램에서, 이효리가 <효리네 민박>을 찾은 손님에게 한 말을 들었다. "제주도 공기 좋은 데서 사나 서울에서 사나. 제주도에서도 마음이 지옥같이 사는 사람도 많아. 서울에서도 얼마나 즐기며 사는 사람이 많니. 어디서 사느냐,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냥 내가 있는 자리 그대로 너무 좋다 만족하면서, 그렇게 사는 게 제일 좋은 것 같아." 한국에서는 미국을, 미국에서는 한국을 그리워하는 나에게 큰 울림을 준 말이었다. 그래, 어디서 사는지가 아니라 내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사는지가 중요하지, 라는 마음을 갖고 한국에서의 삶에 적응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서울의 한 회사에 취업했고, 집이 있는 경기도와 회사가 있던 서울을 매일 출퇴근했다. 서울에서의 삶이 익숙해지고 또 바빠지면서 더는 한국과 미국을 비교하지 않았지만, 나는 경기도가 아닌 서울에서의 삶을 꿈꾸기 시작했다. 집과 회사의 거리가 너무 먼 것은 체력적으로도 큰 손실이었고 무엇보다 서울은 뉴욕만큼이나 재밌는 도시였다. 막차를 걱정하지 않고 친구들을 만나고 싶었고 왜 아직도 집에 오지 않느냐는 엄마의 전화가 걸려오지 않도록 혼자서 지내고 싶었다. 늦은 밤에도 원하는 영화를 볼 수 있고, 늦잠을 자거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면 몇 배는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Seoul, 2019

재밌게도 회사를 그만두고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그토록 원하던 서울생활을 하게 됐다. 친구가 미국으로 3개월 간 여행을 가면서 비워진 집을 내가 쓰게 된 거다. 설레는 서울에서의 삶이라니! 처음에는 하루하루가 너무 신나고 재밌기만 했다. 낮이든, 밤이든 언제든 내 마음대로 친구들을 만나러 가거나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도 행복했고, 공연이 늦게 끝나거나 보고 싶은 영화가 심야 시간과 가깝더라도 걱정이 없었다. 아름다운 한강과 공원을 보면서 감탄하는 날들도 많았다. 맛있는 곳도, 좋은 카페도 너무 많다 보니 돈이 문제지 먹고 싶은 걸 언제든 먹을 수 있다는 것도 큰 행복이었다.


하지만 그런 행복도 완벽하진 않았다. 원룸이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요리를 쉽게 할 수 없었고, 힘들게 요리를 해서 먹어도 혼자 먹는 밥은 생각처럼 신나지 않았다. 그렇게 신경 쓰이고 귀찮던 엄마의 전화도 오지 않는 시간이 길어지면 괜스레 외롭고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밤 중에 갑자기 아프거나 손을 다쳐 한동안 고생했을 때에는 혼자서 오롯이 아픔을 견뎌야 한다는 것, 내가 아프거나 다치거나 하는 것과는 별개로 매일 해야 하는 집안일은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 짜증스럽고 서럽기도 했다. 미국과 한국, 집과 서울. 운 좋게도 원하던 곳에서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을 모두 살아 보았지만 완벽한 곳은 없었다. 내가 바라던 '천국'이란 어디에 초점을 맞추냐에 따라 어디에도 없고, 어디든 될 수 있는 거였다. 여행과 삶도 같은 범주의 이야기가 아닐까. 광활한 자연이나 타국의 분위기가 주는 행복은 분명히 여행에 즐거움을 더하는 요소지만 여행이 즐거운 건 나의 마음가짐이 삶을 대할 때와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글을 쓰면서 행복도 천국도 어디에나 있을 수 있고 어디에나 없을 수 있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인스타그램만 챙겨 볼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은 나에게 달렸다는 마음가짐을 챙기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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