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경험으로 얻은 능력
오늘은 친정 근처에서 볼 일이 있었다. 일을 마치고 엄마, 아빠와 시간을 보냈다. 반갑게 맞아주는 아빠. 엄마는 내가 온다고 수육을 하고 있었다. 최근에 있었던 이야기들과 그저께 받은 유방 검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누구보다 이 소식을 기다렸던 아빠는, 내가 유방 검사를 받은 지 6개월이 되었을 때부터 얼른 받으라고 나를 재촉하셨다. 내 얘기를 듣자마자, "드디어 검사를 받았다니 속이 다 시원하다."라고 하셨다.
점심 식사 후에는 엄마와 함께 무인양품으로 쇼핑을 갔다. 엄마랑 나는 무인양품이나 자주처럼 의류나 잡화, 생활용품 등을 함께 다루는 브랜드를 구경하는 걸 좋아한다. 마침 지난주부터 ‘무지 위크‘라고 불리는 세일 기간이 시작된 터였다. 나는 스테인리스 포크를 사야 했고, 엄마는 따뜻한 가디건을 고르셨다.
쇼핑을 마치고 잠시 쉬며 커피 한 잔을 하러 쇼핑몰 안에 있는 스타벅스로 갔다. 커피를 마시며 엄마와 수다를 떨다 자연스럽게 주변을 둘러봤다. 가방에 임산부 배지를 달고 카페로 들어오시는 여성, 유모차를 끌며 커피를 마시는 아이 엄마, 이미 만삭이신 임산부까지. 유난히 오늘은 임신한 분들이 많이 눈에 띄었다.
한동안 자궁 적출 수술 후 예상치 못한 상실감에 마음이 힘들었다. 그 감정을 마주하고 나니, 담담하게 그들을 바라볼 수 있게 됐는데, 이런 내 모습을 보니 조금은 극복한 듯싶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엄마에게 말을 꺼냈다.
”요즘, 임신했거나 출산한 분들이 주변에 많아. 우리 층 엘리베이터 바로 앞에 사는 부부도 최근에 아기를 낳았더라고. 엘리베이터 앞에 서면 애기 우는 소리 들려. “
엄마는 지레 먼저 말했다.
“딸은 어차피 안 낳으려고 했었잖아.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지. “
“맞아, 근데 '못 낳는 것'은 마음이 좀 다르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동네에서 유모차를 끌며 함께 다니는 아이 엄마들을 보면 괜히 눈물이 나고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 차올랐지만, 이제는 더 이상 마음이 요동치지 않는다.
종종 블로그나 DM으로 같은 암환우분들이 어떻게 극복했냐고 묻는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애써 극복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제대로 마주하고 흘려보냈다. 나의 상황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인지하고, 받아들이고, 충분히 슬퍼하는 과정이었다. 그래야 흘려보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과 내가 바꿀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 바꿀 수 없다면, 그 안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나를 놓지 않는 것이었다. 잘 먹고, 잘 자고, 나를 잘 돌보는 일.
다행이다.
뭔가, 할 줄 아는 게 한 가지 더 생긴 느낌이다.
아픈 경험으로 인한 능력이지만, 나쁘지 않다.
마주하고 흘려보내기
2025.11.13
@keemwood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