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한 마음이 건네준 깊은 온기
오늘은 시부모님 댁에서 시동생 부부와 처음으로 다 같이 식사를 했다. 저녁메뉴는 우리들 몸보신하라고 준비해 두신 오리백숙. 어린 시절 트라우마로 오리고기를 드시지 않으시면서도 자식들을 위해 늘 맞춰주시는 아버님은, 혼자 드실 곱창순대볶음을 따로 포장해 오셨다.
연애시절부터 결혼 후 3년 동안 다섯 명이 모이다가, 식구가 한 명 더 늘었을 뿐인데 집안이 조금 더 북적이는 느낌이 싫지 않았다. 시부모님께도 살갑고 붙임성 있게 다가가는 동서 같은 사람이 가족이 된 것이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은 동서의 생일이라 케이크를 준비해 조촐한 생일파티도 함께 했다. 파티가 끝난 뒤, 아버님께서 방에 다녀오시더니 우리 모두에게 주의를 집중시키셨다.
“우리가 다음 달에는 이렇게 다 같이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니까, 지금 미리 메리크리스마스, 미리 해피뉴이어의 의미로 준비했어. “
그리고는 흰 봉투를 어머니, 나, 남편, 시동생, 동서에게 하나씩 건네셨다. 봉투에는 5만 원 권 몇 장이 들어있었고, 액수와 상관없이 평소 표현에 서툰 아버님의 깜짝 이벤트에 모두가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아버님께서는 내 어깨를 살짝 토닥이며 덧붙이셨다.
"우리 첫째네는 올해 고생도 많았으니까."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눈물이 쏟아졌다.
아버님이 말씀하신 '고생'은 내가 올해 초 암 진단을 받았던 걸 의미하는 것이었다. 아버님께서는 그 일 이후에도 예전과 다름없이 대해주셨다. 그래서 내가 아픈 것을 깊이 걱정하고 계신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했다. 하지만, 서운하기는커녕, 평소처럼 대해 주시는 게 오히려 감사했다.
근데 오늘에서야, 그동안 나를 걱정해 오셨던 마음을 처음으로 말로 표현해 주신 것이었다.
암 진단 이후 나는 더 씩씩한 모습을 보여드리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간 나의 아픔을 '알고 있다'라고 표현해 주신 담백한 한 마디에 눌러두었던 감정이 한꺼번에 무너져버렸다.
말수가 적으신 아버님이 내 아픔을 처음으로 언급해 주신 그 순간의 울림은 생각보다 훨씬 더 컸다. 그리고 내가 겪은 아픔이 결코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음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
'너는 우리 가족이야.'
말없이 보여주셨던 그 마음이, 오늘은 말로 전해졌다.
아버님의 잔잔하지만 깊은 마음은, 그 어떤 것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귀한 치유였다.
2025.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