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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열이는 유리가 처음 봤을 때부터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나와 나리가 어색한 눈인사를 주고받았던 첫 만남 때부터 말이다. 왠지 모르게 눈길이 계속 갔다고 했다. 녀석이 속내를 털어놓는 내내 나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웃겼던 점은 그래서 그녀를 좋아하냐는 내 물음에 녀석은 매번 손사래를 치며 아니라고 대답했다는 거다.
“아니, 좋아하는 건 아니라니까. 내가 걔를 왜 좋아해. “
호열이는 한사코 부인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시절에는 남자들 사이에서 먼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걸 이야기하면 놀림감이 되는 이상한 분위기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에 아직 익숙해지지 않은 탓일까. 한사코 고개를 저어대는 호열이를 보며 짓궂게 놀려주고 싶은 마음이 어느 때보다도 늪에 치솟았지만, 부끄러울 수도 있는 속 마음을 털어놓은 친구의 존엄을 지켜주기 위해서 나는 과도한 놀림은 지양하기로 했다.
녀석은 한번 입이 터지더니, 본인의 감정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다. 나도 옆에서 계속 추임새를 넣었다. 그러다 우리가 헤어져야 하는 지점인 하천 다리에 다다랐을 때, 녀석은 갑자기 한숨을 푹 쉬었다. 나는 호열이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녀석은 그 자리에서 꼼짝 않고 하천을 응시하더니, 나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사실 걔가 남주를 좋아하는 것 같아. “
”남주? 김남주? “
”응. “
호열이는 쓸쓸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남주는 우리와 함께 수업을 듣는, 호열이처럼 D 남자 고등학교에 진학 예정인 까무잡잡한 친구였다. 남중을 나온 우리와는 달리 남주는 학원 근처의 남녀공학을 졸업한 친구였다. 189의 키에 서글서글한 눈빛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운동을 꽤나 잘해서 우리 반 사람들 모두가 남주를 좋아했다. 한번 농구를 같이 한 적이 있었는데, 키가 매우 커서 림 밑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이 엄청났다.
”남주 멋있지. “
호열이가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녀석의 말투에는 씁쓸함이 잔뜩 배어 있었다. 나는 무슨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냥 그를 바라보았다. 감정이 복잡해졌다. 이 복잡하고도 미묘한 상황이 내 주변에서 일어났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았고, 그 주인공들이 내 친구들이라는 점도 믿기지 않았다.
”아, 그냥 그렇다고. 나도 남주 좋아해. 녀석은 참 좋은 친구야…. “
호열이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내 어깨를 치곤 작별을 고했다. 나는 녀석의 쓸쓸한 뒷모습을 바라보다, 갑자기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호열이에게 달려가 팔을 잡아끌었다. 왜 이러냐는 녀석의 얼굴을 보며 나는 말했다.
”내가 하나 이야기를 해 줄게. “
나는 호열이에게 나리와 나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사실 모든 걸 다 말하진 않았다. 그냥 그녀와 내가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다고, 2 학년 때는 짝꿍도 같이한 사이라는 말만 했다.
”아니, 그런데 왜 그러게 데면데면하게 군거야? “
이야기를 다 듣더니 호열이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도 몰라. 그냥 그렇게 되던데. “
”그래? “
내 대답을 듣더니 녀석은 눈을 작게 뜨며 나를 쳐다보았다. 이번에는 내 얼굴에 혈류가 몰려왔다. 내가 짜증을 내자 녀석이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아, 미안해…. 난 네가 여자라고는 전혀 관심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
”알았는데? “
우리는 다리 위에서 투닥거리다 헤어졌다. 하늘을 바라봤다. 별들이 참 많았다. 겨울치고는 날씨가 따뜻했다. 길가를 따라 높게 솟은 가로수와 그 아래서 바람에 찬찬히 흔들리는 풀잎들, 졸졸 소리를 내며 흐르는 하천과 집을 향해 빠르게 달리는 다채로운 색깔의 자동차들.
집으로 가는 길 내내 나는 호열이와, 유리와, 나리와 나에 대해 생각했다. 집에 도착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머리가 복잡했다. 생각이 실뭉치처럼 엉키고 설켜버렸다.
다음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원에 갔다. ‘그 외 고등학교‘ 반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모든 것은 그전까지와 다름없었다. 나리를 포함한 여자애들은 왼쪽 분단을 차지한 채 떠들고 있었고, 남자아이들은 오른쪽 분단에서 서로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다. 나와 호열이가 함께 들어서자,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우리에게 향했다.
“얘들아 어서 와.”
남주가 쾌활하게 인사했다.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학원도, 친구들도. 하지만 어젯밤의 이야기를 들은 후의 학원 강의실은 나에게 무언가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옆자리에서 옆 분단을 흘깃거리는 호열이의 모습이나, 혹은 유리가 기지개를 켜는 척을 하며 우리 분단 제일 뒤에 앉아 있는 남주를 훔쳐보는 모습이 자꾸 눈에 들어왔다. 나라고 별로 다를 건 없었다. 나도 여전히 나리를 훔쳐보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렇다. 강의실은 매우 조용했지만, 그 속은 아주 뜨겁게 끓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 끓는점에 도달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알고만 있는 채로 며칠을 더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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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왔다. 낮이 매우 짧아졌고, 달은 얼굴을 조금 더 일찍 드러냈다. 날은 어느 때보다도 추웠지만 정오의 햇살은 잔뜩 얼어버린 세상을 녹이기에 충분할 만큼 내리쬐었다. 잔잔하며 시끄러운 날들이 이어졌다. 첫눈이 내렸다. 기자들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꽃잎을 앞다투어 보도했다.
‘동남권에 내린 기록적인 폭설로 현재 대중교통이 마비된 상황입니다.’
아침을 먹는 동안 TV에서는 특파원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식사를 빨리 마치신 아버지께서는 거실 소파에서 신문을 읽고 계셨고, 나와 동생은 어머니의 지도 아래 골고루 반찬을 섭취하고 있었다. 발코니 창에는 눈이 가득 쌓여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창가로 다가갔다. 하얗게 변한 세상이 눈에 들어왔다. 주차장에서 차에 쌓인 눈을 치우는 사람들이 보였다. 모두들 두툼한 외투를 입을 채 열심히 빗자루를 흔들고 있었다. 나는 사람들이 만들어 낸 길 위로 다시 눈이 쌓이는 모습을 지켜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꺼운 패딩을 입고 현관문을 나섰다. 등이 후끈거리는 탓에 핫팩은 따로 필요가 없었다. 괜히 학원을 쉬겠다는 말을 했다 어머니께 등짝을 맞은 덕분이었다. 평소처럼 자전거를 타고 학원에 가고 싶었지만, 오늘은 길이 얼어 위험할 수 있었다. 천천히 걸어서 등원했다.
강의실에 도착해서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시간을 확인했다. 수업 시작 15분 전이었다. 그렇게 일찍 온 건 아니었기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자리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열이가 도착했다.
“너 오늘 자전거 타고 왔냐?”
“아니, 눈이 이렇게 왔는데 자전거를 어떻게 타. 천천히 걸어왔지. 엄청 오래 걸렸어.”
“오, 나도 나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선생님께서 강의실에 들어오셨다.
“수업 시작하려면 아직 시간 남았는데요, 선생님.”
나와 호열이의 목소리에 선생님께서는 수업 전 인원을 체크하러 들어왔다고 하셨다. 눈이 내려 대중교통이 마비되었으니, 학원 근처에 살지 않는 학생들이 많은 ‘그 외 고등학교‘ 반의 출석 인원이 화두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확실히 눈이 많이 왔나 보다.”
선생님께서 강의실을 둘러보며 말씀하셨다.
“선생님 저희는 어떡해요?”
호열이가 질문했다. 선생님은 잠시 고민에 빠지셨다.
“이렇게 눈이 많이 올 줄 누가 알았겠어. 애들이 괜히 학원 오려고 무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일단 오늘은 너희 둘 밖에 오질 않았으니, 자습을 하는 걸로 하고 수업은 다음에 보충으로 해결하자. 아침에 일찍 문자를 미리 보낼 걸 그랬다. 자습하다 모르는 거 생기면….”
내가 그냥 오늘 집에 가는 걸로 해 줄 수는 없겠냐는 말을 하려는 찰나, 강의실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
입구에는 나리가 서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는 하얀 눈이 밥알처럼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옷에 앉은 눈을 치웠는지 그녀의 검은 패딩은 여기저기 물기가 있었다. 나리의 눈동자가 선생님을 거쳐, 호열이를 지나 나에게로 향했다. 시선이 잠시 머물더니, 이내 그녀는 벽시계로 눈을 돌렸다.
“나리야 고생했어. 멀리서 어떻게 왔어? 지금 버스도 안 돌아다닐 텐데.”
선생님께서는 나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아, 아버지께서 태워주셨어요.”
“아, 그래? 눈길에 위험하셨을 텐데.”
“운전이 업인 분이셔서 괜찮아요.”
선생님과 나리의 대화를 훔쳐 듣다 나는 호열이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웃고 있었다.
‘왜 웃냐?’
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 웃었는데?’
녀석은 웃으며 웃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짜증이 솟구쳤다. 그때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단 자습들 하고 있어. 조금 있다가 다시 올 테니까.”
철컥. 손잡이의 고리가 체결되는 소리가 들렸다. 나리는 천천히 본인의 자리를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