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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민 Dec 03.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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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실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벽시계의 초침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책상에 학원 교재를 펼쳐놓았지만,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나리에게 말을 걸고 싶었다. 우리는 같은 초등학교에 다녔었고, 같은 반이기도 했고, 서로의 짝꿍이기도 했으니까. ”어떻게 지냈어? 키가 많이 컸네. “ 등의 일상적인 대화를 그녀와 나누고 싶었다.


문제는 그게 참 나에겐 일상적이지 않은 일이었다는 점이다. 감정을 품은 이성과 일상적인 대화한다는 건 나에겐 너무나 힘든 일이었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몸을 배배 꼬아대고, 마음에도 없는 이상한 말이나 늘어놓는, 그때의 나는 그런 소년이었으니까. 그래서 다짐했다. 이참에 아무도 강의실에 없을 때, 이호열이라는 있으나 마나 한 친구 놈 한 명만 있을 때 어색함을 깨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고 말이다. 호열이에게 부끄러운 건…. 원래 우리는 서로를 부끄러워하니까.


“오늘 왜 이렇게 늦었어?”


이호열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의 바다에 잠겨있던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나 안 늦…?” 입을 떼는 순간, 나는 녀석의 고개가 나를 향해 있지 않다는 걸 알아차렸다. 녀석의 고개가 향한 곳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안 늦었는데?”


호열이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더니 나리와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누었다.


“아, 그러네. 오 분 전에 왔으니까…. 그나저나 오늘 눈 진짜 많이 왔더라.”


나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이렇게까지 많이 온 건 처음 봐.”


“우리 어릴 때도 한 번 이 정도로 내린 적이 있었는데.”


“맞아. 그때 눈사람도 만들고 했던 기억이 있어. “


“초등학생 때도 여기 살았어? 난 네가 중학생이 돼서 우리 도시로 전학 온 줄 알았는데.”


“응, 어릴 때 이 도시에서 살았어. 나 OO 초등학교도 다녔었거든.”


“아, 그래? 잠깐만. 너도 거기 나오지 않았어?”


이호열의 팔꿈치가 나를 쳤다. 고개를 들었다. 나리와 호열이, 둘 다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말했다.


“어…. 맞아. OO 초등학교.”  


“우리 같은 반이었어. 짝꿍도 했었는데.”  


“아, 진짜?”


나리의 말에 이호열은 얼굴에 웃음을 가득 띈 채 나를 바라보았다. 녀석의 머리에 딱밤을 놓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맞아. 그랬지.”


나는 웅얼거리며 나리의 눈길을 피했다. 내 마음속에는 나리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감정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때 네가 전학을 갔잖아.”


나는 괜히 영어 시제에 흥미가 생긴 척 책을 뒤적이며 말했고, 곧이어 나리의 조용한 목소리가 대답했다.


“맞아. 그게 갑작스레 결정된 일이라서…. 그때 친구들에게도 소식을 많이 전하지 못했어. 너랑도 오랫동안 짝꿍을 했었는데 그렇게 갑자기 가버려서 미안했어. “


”그랬다며. 나중에 규리에게 들었어.”


“네가 규리랑 이야기도 했었어?”


나리의 깜짝 놀란듯한 목소리에 나는 교재를 덮고 그녀를 쳐다봤다.


“아니, 네가 갑자기 사라져서…. 궁금해서 물어봤지. 그래도 짝꿍이었잖아.”


“네가 먼저 걔한테 말을 걸었다는 게 신기해서. 내 걱정을 많이 해줬구나.”


나리는 나를 보며 미소 지었고, 나는 그 순간 무너져 내렸다. 볼은 터질 듯 달아올랐고, 몸에는 경련이 일었다. 나는 그날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을 느꼈다. 나는 그녀를 좋아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오로지 그녀만을 나는 좋아하고 있었다. 그녀에겐 내가 어떤 존재일지 알 수 없었지만, 내가 그녀를 좋아하고 있다는 건 확실했다. 그동안 그녀를 훔쳐보려 수업시간에 했던 모든 허튼짓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맹세코 여태껏 그런 일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를 보기 위해서는 그렇게 했다. 수업 시간 중에도 그녀가 갑자기 보고 싶어 졌고, 잠시 그녀를 훔쳐본 뒤에도 다시 그녀가 보고 싶어 졌다. 정말 그랬다. 나는 곰곰이 기억을 훑으며 나 자신이 참 우습다고 생각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을 그녀가 알게 된다면 무슨 말을 할까? 아니, 호열이는 무슨 말을 할까? 감정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나을 어떻게 비웃을까?


“너 뭐 이렇게 얼굴이 빨개졌냐?”


이호열의 눈치 없는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왔다. 나는 최대한 나리 쪽을 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라디에이터가 너무 강한 것 같다고 대답했다. 호열이가 동의하는 말을 웅얼거렸고 나리에게 라디에이터 온도를 낮추자고 제안했다. 나리가 동의했고, 이호열은 자리에서 일어나 온도를 조정했다.


나와 내 친구, 그리고 나리는 아무도 없는 강의실에서 1시간 정도 시간을 보냈다. 우리는 수다를 떨었다. 이야기의 주제는 주로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우리에게 괴담처럼 흉흉했던 소문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야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야간 자율학습의 준말인 야자는 이름과는 다르게 매우 타율적인 제도였다. 아침 여덟 시까지 등교해서 야자를 마친 후 저녁 아홉 시가 넘어서야 학교를 떠날 수 있는 삶에 대해 우리는 심층 깊은 토론을 했다. 이게 도대체가 맞는 일인 건지 말이다.


“사실 우리는 사정이 더 해.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 와서 수업을 2시간 더 들어야 하잖아. 이렇게 사는 게 맞아?”


기나긴 토론 끝에 호열이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나도 모르겠다.”


나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래도 좋은 대학 가려면 어쩔 수 없잖아. 다들 그렇게 하니까.”


나리가 말했다. 우리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정확히 같은 순간에 한숨을 내쉬었다. ‘에휴.’ 나는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하고, 조용히 교재로 시선을 옮겼다. 강의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놀이동산 갈래?”


침묵을 깬 사람은 이호열이었다. 집중력을 잃고 방황하던 내 고개가 녀석에게로 향했다. 갑자기 무슨 놀이동산이냐고 면박을 주려던 나는 순간 얼어붙고 말았다. 호열이의 눈동자는 나를 향하고 있지 않았다. 나를 보지 않았다는 건, 다른 사람을 보고 있다는 것. 내 눈동자는 점점 커져갔다.


“놀이동산?”


나리의 반문에는 ’ 너랑 나랑?‘ 이 빠진 듯했다. 호열이도 이를 느꼈는지 씩 웃음을 지어 보였다.


“너랑 유리랑, 나랑 본우랑. 넷이서 가면 재미있을 거 같은데?”


나는 번개처럼 녀석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너무 빨리 돌렸는지 목 관절이 조금 아파왔다. 하지만 별로 신경 쓰이진 않았다. 나는 눈으로 녀석에게 대답을 요구했고, 호열이는 여전히 입가에 웃음을 띤 채 나를 무시하며 말을 이었다.


“본우는 간다고 했거든, 맞지?”


호열이의 시선을 따라 나리도 나를 쳐다봤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의 시선이 스캐너처럼 내 얼굴, 교복, 가방, 전부를 훑고 있었다. 나는 사실 우리가 서로를 제대로 쳐다본 적이 별로 없었다는 점을 깨달았다. 신체검사를 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그대로 있었다. 잠시 후, 나리는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답했다.


“그래.”


“유리한테는 네가 말할래?”


이호열이 볼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응, 내가 물어볼게. 근데 내가 가자고 하면 같이 갈 거야.”


“그래, 그렇게 하자.”


둘의 대화가 끝이 났다. 나리의 시선은 다시 교과서 위에 놓인 휴대전화로 향했다. 강의실은 다시 조용해졌다.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감정의 파도가 몰아쳤다. 손이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상황을 정확히 인지하기도 전, 내 눈에 호열이 녀석이 들어왔다. 녀석도 약간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고, 정신을 한번 더 가다듬은 후, 녀석은 나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책상 밑으로 호열이가 치켜세운 엄지가 보였다.


집으로 가는 길에 나는 호열이에게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일을 벌였는지 따져 물었다.


“왜 나한테 아무런 말도 없이 그런 일을 벌인 거야?”


녀석의 대답은 너무 간단해서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물었으면, 동의했을 거야?”


나는 녀석의 대답에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사실 내가 동의하느냐 마느냐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았다는 점을 나는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녀석에게 면박을 주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지만, 속으로 무엇보다도 염원했던 걸 녀석의 손을 빌려 얻어냈다는 점 때문에 나는 녀석에게 어떠한 말도 꺼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순간 녀석의 얼굴에 드러난 의미심장한 웃음은 내 소중한 비밀이 더 이상 비밀이 아니라는 선언과도 같았기에, 나는 벌거숭이처럼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다음 날 나는 똑같이 등원했다. 강의실에 들어서자 나리와 유리가 보였다. 우리는 인사를 했다. 나는 외투를 벗으며 호열이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을 보니 녀석이 엄청나게 긴장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유리가 우리를 불렀다. 자기도 놀이공원에 갈 거라고 말했다. 알겠다고 대답한 후 나는 녀석의 얼굴을 슬쩍 쳐다봤다. 녀석은 상대 분단을 등진 채 가방에서 필기구를 꺼내고 있었다. 각도상 나리와 유리는 녀석의 얼굴을 절대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오로지 나만이, 녀석보다 더 안쪽 책상에 앉아있던 나만이 녀석의 황홀한 미소를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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