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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용민 Dec 07.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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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1일, 터미널에서 만나.”


“그래.”


그 이후의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막상 약속을 잡고 나니 겁이 덜컥 났다. 가서 뭘 하지? 가면서 무슨 말을 하지? 호열이와 나는 머리를 맞대고 토론했다.


“너랑 유리는 원래 말을 많이 하던 사이니까 편할 거 아냐. 내가 문제라고.”


나는 호열이에게 항상 징징댔고, 이호열은 또 녀석대로,


“너네는 동창인 데다가 할 이야기가 많잖아. 내가 문제라고.” 하며 징징댔다.


우리는 약속 며칠 전에야 겨우 장소를 정할 수 있었다. 지금은 너무나 간단히 목적지로 가는 경로를 스마트 폰으로 검색할 수 있지만, 그 시절에 스마트폰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우리는 학원이 마치면 바로 피시방으로 달려가서 열심히 인터넷을 뒤적거려야 했다.


네이버에서 두 시간 가까이 되는 기나긴 여정을 확정한 순간 나와 호열이는 눈빛을 교환했다. 정말 멀다. 삼 일 전에 모든 계획을 정하고, 이틀 전에 나리와 유리에게 모임 장소를 통보했다.


커다란 이벤트를 앞둔 상황이면 그 사이의 시간은 참 빠르게 사라진다. 그 주의 토요일도 그랬다. 뭘 했는지 모르게 토요일은 지나갔고, 일요일이 왔다. 21일. 놀이동산을 가기로 한 날 말이다. 나는 평소 주말에 늦잠을 잘 자는 편이었는데, 그날은 참 이르게도 눈이 떠졌다.


샤워를 했다. 머리에 샴푸를 하고 이를 닦았다. 샤워하고 거울을 보니 나라는 놈이 좀 괜찮게 느껴졌다. 평소보다는 조금 더 시간을 많이 들여 머리를 말렸다. 내 머리는 반곱슬이라 손질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인상이 크게 변한다. 머리를 대충 말리게 되면 곱슬머리인 앞머리가 앞쪽으로 뻗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그렇게 없어 보일 수가 없었다. 공을 들여 앞머리를 옆으로 보냈다. 머리카락 한 가닥 한 가닥을 세심하게 돌봐주었다.


로션을 바르고 선크림도 발랐다. 햇빛을 많이 볼 테니까. 어젯밤 미리 꺼내둔 옷을 입었다. 하의는 국방색 카고 팬츠에 상의는 보라색 후드를 입었다. 안에는 내복을 받쳐 입었다. 날씨가 꽤 추웠다. 하지만 하의는 내복을 입지 않지. 나만의 규칙이었다. 외투로는 애용하는 검은색 패딩을 골랐다. 두툼하니 따뜻한 친구였다. 마지막으로 신발은 슈퍼스타.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꽤나 괜찮았다.


터미널에 도착해서 시계를 보니 아홉 시 10분 전이었다. 친구들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렵지 않게 그들을 찾을 수 있었다. 나리와 유리가 함께 앉아 있었고, 호열이는 그 주위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내가 다가가자, 그들은 손을 흔들었다.


“안녕.”


목소리와 함께 나리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당시 유행하던 반윤희 스타일로 옷을 입고 왔다. 하의는 통이 넓은 복고풍의 청바지를 입고, 위에는 프린팅이 된 검은색 후드와 그 위로 당시 유행하던 디키즈의 패딩을 걸쳐 입고 있었다. 나도 안녕하고 인사했다. 호열이랑 유리와도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사실 뭘 입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뭐라도 입고 왔겠지, 뭐. 나에게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현장에서 승차권을 끊었다. 좌석은 우측 열 앞뒤로 두 칸씩 배정이 되었다. 호열이가 대표로 표를 끊었다. 녀석은 승차권을 들고 우리에게 돌아왔다. 이제 하나씩 나눠 가지면 되겠다고 생각하며 손을 내밀려던 찰나, 나는 호열이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의 눈동자는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금세 친구의 고민을 이해했다. 누가 누구와 앉아야 할까?


우리 사회에는 매우 이상한 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스무 살을 향해 달리는 아름다운 청춘들의 목표는 단 하나, 대학 진학이어야만 한다는 것. 그와 다른 목표를 가진다거나 해서는 절대로 안 되며, 목표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은 불경한 것이고,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취급하는 관념 말이다.


십 대 시절 이성 간의 교제라는 것 또한 바로 그 불경한 것 중 하나였고, 그래서 우리는 사회에 압력에 짓눌려 이성을 좋아한다는 게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한 채 살아왔다. 여성에 대한 관심, 사랑이라는 감정, 연애라는 경험 모두.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물론 있었겠지만, 나와 내 친구는 좋게 말하면 말 잘 듣는 아이들이었기에 어른들이 말하는 나쁜 일은 해서도 안 되며, 관심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겉모습과는 달리 우리의 내면은 순진한 초등학생 시절에서 그다지 성장하지 못한 상태였다. 무슨 말이냐면, 우리는 좋아하는 이성에게 어떻게 관심을 표현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바보들이었다는 거다. 우리는 시외버스정류장 대합실에서 이 사실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호열이와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도 나리에게 옆자리에 앉고 싶다는 말을 하지 못했고, 녀석도 유리에게 그러지 못했다. 녀석은 무언가를 남에게 전해주는 행위가 처음인 것처럼 어색한 동작으로 티켓 네 장을 나리에게 건네주었다. 표를 받아 든 나리는 잠시 티켓을 살피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재빨리 눈길을 피했다.


유리는 아무 말 없이 나리에게서 티켓을 전부 받아 들더니, 나와 호열이에게 한 장씩 티켓을 건넸다. 나는 내 자아가 한없이 쪼그라든 걸 느끼며 승차권을 받아 들었다. 분위기가 삽시간에 어색해졌다. 불쾌한 침묵 속에서 우리는 버스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역무원 아저씨께서 부산행 버스가 도착했음을 큰 소리로 알리셨고, 우리 넷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에 올랐다.


나와 호열이는 6-A, 6-B 좌석에 앉았다. 나리와 유리의 바로 뒷자리였다. 버스가 끼익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창밖을 바라보았다. 점점 작아지는 터미널과 꽤나 높이 솟아오른 태양이 보였다. 눈이 부셨다. 차창에 가림막을 쳤다. 나리네도 가림막을 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직접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나에게는 그럴 용기가 없었다. 버스는 덜컹거리며 열심히 달렸다.


앞자리에서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소리가 버스의 소음을 뚫고 내 귀에 들려왔다. 옆자리에 앉은 이호열을 바라보았다. 녀석도 초점 없는 눈으로 반대편 차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상황이 나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에 안도감을 얻으면서도, 앞으로 에 대한 걱정 또한 내 마음속에서 커져갔다.


버스는 생각보다 일찍 목적지에 도착했다. 우리는 다 같이 내려서 81번 버스를 타기 위해 이동했다. 터미널에서 티켓을 나눈 순간부터, 우리는 남자 둘, 여자 둘로 짝지어 다니게 되었다. 내 옆에는 늘 그랬듯이 호열이가, 나리 옆에도 늘 그랬듯이 유리가 있었다. 나는 곁눈질로 나리를 흘깃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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