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일기

2-4

by 세타필

사실 우리는 사정이 더 했다. 학교가 끝나면 학원에 와서 수업을 2시간 더 들어야 했으니까. 이렇게 사는 게 맞아? 기나긴 토론 끝에 호열이가 이해할 수가 없다는 투로 말했다. 나도 모르겠다. 내가 말했다. 나는 정말로 모르겠다는 심정이었다. 그래도 좋은 대학 가려면 어쩔 수 없잖아. 다들 그렇게 하니까. 나리가 조용히 말했다. 우리 셋은 조용히 있었다. 곧 닥쳐올 암울한 미래에 다들 우울해 보였다. 침묵은 계속 이어졌고, 나는 그 분위기가 너무 싫었다.


놀이동산 갈래? 내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천장을 쳐다보던 호열의 고개가 나에게로 향했다. 분명 자신에게 말했다고 생각했겠지. 게슴츠레하게 뜬 녀석의 눈동자는 나에게서 멈추더니,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왜냐면 내가 녀석을 바라보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리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눈을 맞추고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때 뭔가에 홀렸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놀이동산 가자. 이런 우울한 이야기 하지 말고, 놀러 가자. 나리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을 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본능이었을까?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고, 나도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내 얼굴, 교복, 가방, 전부를 훑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그대로 있었다. 잠시 후에 그녀가 고개를 돌렸다. 그래. 짧은 대답이었다. 나도 고개를 돌렸다. 한숨을 내쉬었다. 후. 그제야 감정의 파도가 몰아쳤다. 손이 덜덜 떨리고 심장이 쿵쾅거렸다. 내가 방금 무슨 짓을 한 거지? 내 행동을 정확히 인지 하기도 전, 내 눈에 호열이가 들어왔다. 녀석도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녀석의 얼굴을 보자 갑자기 나에게 생각 하나가 떠올랐다. 나리야. 응? 내 부름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유리랑 여기 이호열이랑 같이 가자. 유리? 응. 친구들이랑 같이 가면 좋잖아. 나리의 시선이 나에게서 호열이에게로 옮겨 갔다. 너는 갈 거지? 호열이에게 내가 말했다. 어…. 어어. 호열이가 말끝을 흐렸다. 나중에 유리한테 물어봐 줘. 알겠지? 물어는 볼게. 나리가 대답했다. 그녀의 시선은 다시 교과서 위에 놓인 휴대전화로 향했다. 나는 한 번 더 크게 숨을 내쉬었다. 물론 나리에게 들리지 않게 매우 작은 소리로. 가슴을 쓸어내리고 내 친구를 바라보았다. 녀석의 얼굴은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듯 멍청해 보였다. 내가 책상 밑으로 엄지를 치켜세워 보였다. 녀석도 옆자리에서 천천히 오른손을 들어 올리더니, 엄지를 들어 올려 보였다. 내가 씩 하고 웃었고, 녀석도 같이 씩 웃었다.


우리는 1시간이 넘는 자습 끝에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고 학원을 뛰쳐나왔다. 선생님께 오늘은 집에 일찍 가 보겠다고 말씀을 드렸고, 선생님도 탐탁지는 않으셨지만, 어쨌든 우리의 요구를 수용해 주기로 하셨다. 집으로 오는 길에 나와 A는 유리가 승낙할지 말지 열띤 토론을 벌였다. 당연히 결론은 나지 않았다. 여자의 마음을 우리가 어떻게 알겠는가. 우리는 늘 헤어지는 다리 위에서 옥신각신하다가, 내일 보자는 말을 끝으로 헤어졌다. 도로 옆에 쌓여있는 눈들 때문이지 세상이 더 밝게 보였다. 저 멀리 공원이 보였다. 나무들이 모두 눈을 한가득 품고 있었다. 나는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눈이 오고 다음 날 학원에 갔다. 강의실에 들어서자, 나리와 유리가 보였다. 나리도 내가 들어온 걸 알아차리곤 반갑게 인사를 했다. 나와 이호열은 늘 앉았던 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나는 외투를 벗으며 녀석의 얼굴을 슬쩍 쳐다보았다.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을 보니 녀석이 엄청나게 긴장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유리가 나를 불렀다. 자기도 놀이공원에 갈 거라고 말했다. 알겠다고 대답한 후 나는 호열이의 얼굴을 다시 바라보았다. 녀석은 상대 분단에 등을 진 채 내려놓은 가방에서 필기구를 꺼내고 있었다. 나리와 유리는 녀석의 얼굴을 절대 볼 수 없는 상태였다. 녀석보다 더 안쪽 책상을 사용했던 나만이 녀석의 표정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때 녀석이 지은 이상하게 기분 좋아 보이는 미소는 오로지 나만 볼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우리는 놀이공원에 대해 따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다. 1월 21일, 무슨 역에서 만나. 그래. 그게 전부였다. 나 역시 혼자 있을 때는 놀이동산에 가려면 어디에서 버스를 갈아타야 하는지, 가서는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 열심히 찾아보고 했지만, 이 사실을 나리가 있는 앞에서 티를 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듯 만나서, 어떻게 해야 해? 나리가 물어보면, 늘 그랬다는 듯이 능숙하게 착, 하고 안내하는 것이 내 목표였다.


물론 호열이와는 열심히 교류했다. 가서 뭐 하지, 가는 동안 무슨 말을 하지? 별 시답지 않은 것 까지 우리는 토론했다. 너랑 유리는 원래 말을 많이 하던 사이니까 편할 거 아냐. 내가 문제라고. 나는 호열이에게 항상 징징댔고, 이호열은 또 녀석대로, 너네는 동창인 데다가 할 이야기가 많잖아. 내가 문제라고. 하며 징징댔다.


시간은 흘러 그날이 찾아왔다. 1월 21일. 나와 이호열은 지난 목요일에야 약속 장소를 정할 수 있었다. 지금은 너무나 간단히 목적지로 가는 대중교통을 스마트 폰으로 검색할 수 있지만 내가 중학생일 때 한국에는 스마트폰이 상용화되지 않았고, 그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학원을 마치고 피시방으로 향해, 인터넷을 뒤적거려야 했다. 1시간 정도의 사투 끝에 우리는 어떤 버스를 어디서 타야 하는지 알게 되었다. 일단 버스 터미널에서 시외버스를 탄 다음, 부산 시내에서 내려, 81번 버스를 타고 놀이동산을 간다. 이것이 우리의 계획이었다.


1시간 30분이 넘는 기나긴 여정을 확정한 순간 나와 호열이는 서로의 눈빛을 보며 말했다. 진짜 멀다…. 목요일에 모든 계획을 정하고, 금요일에는 나리와 유리에게 모임 장소를 통보했다. 통보는 호열이가 담당했다. 21일 9시에 버스 터미널에서 봐. 그래, 알겠어. 버스의 번호나 경로 등을 꼬치꼬치 캐물을 줄 알았던 나의 예상과는 달리, 그들은 일정을 덤덤히 받아들였다.


요즘에도 느끼지만, 커다란 이벤트를 앞둔 상황이면, 그 사이의 시간은 참 빠르게 사라진다. 그 주의 토요일도 그랬다. 뭘 했는지 모르게 토요일은 지나갔고, 일요일이 왔다. 21일. 놀이동산을 가기로 한 날 말이다. 나는 평소 주말에 늦잠을 잘 자는 편인데, 그날은 참 이르게도 눈이 떠졌다.


샤워를 했다. 머리에 샴푸를 하고 이를 닦았다. 샤워하며 거울을 보니 나라는 놈이 좀 괜찮게 느껴졌다. 평소보다는 조금 더 시간을 많이 들여 머리를 말렸다. 내 머리는 반곱슬이라 손질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인상이 크게 변한다. 머리를 대충 말리게 되면 곱슬머리인 앞머리가 앞쪽으로 뻗치게 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게 그렇게 없어 보일 수가 없었다. 공을 들여 앞머리를 왼쪽으로 보냈다. 평소에는 드라이어의 바람을 강으로 설정하고 머리를 말렸지만, 오늘은 약으로 설정하고 앞머리 한 가닥 한 가닥을 세심하게 돌봐주었다.


로션을 바르고 선크림도 발랐다. 햇빛을 많이 볼 테니까. 어젯밤 미리 꺼내둔 옷을 입었다. 하의는 된장 색 카고 팬츠에 상의는 상아색 후드를 입었다. 물론 안에는 내복을 받쳐 입었다. 날씨가 꽤 추웠다. 하지만 하의는 내복을 입지 않지. 나만의 규칙이었다. 외투로는 애용하는 회색 패딩을 골랐다. 두툼하니 따뜻한 친구였다. 마지막으로 신발은 컨버스. 마지막으로 거울을 봤다. 음, 좋네. 친구들이랑 놀러 다녀올게요. 어머니께 말씀을 드리고,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현관문을 나섰다.


우리 집에서 터미널까지는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여서 걸어서 이동할 수 있었다. 도착해서 시계를 보니 9시 10분 전이었다. 다들 도착했으려나. 친구들을 찾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두리번했다. 나는 어렵지 않게 동행자들을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은 이미 만나서 다 같이 대합실에 앉아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리와 유리가 함께 앉아 있었고, 호열이는 그 주위에서 서성이고 있기는 했다.


내가 다가가자, 친구들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안녕. 하는 목소리와 함께 나리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당시 유행하던 반윤희 스타일로 옷을 입고 왔다. 하의는 통이 넓은 복고풍의 청바지를 입고, 위에는 프린팅이 된 검은색 후드와 그 위로 당시 유행하던 디키즈의 패딩을 걸쳐 입고 있었다. 나도 안녕하고 인사를 했다. 호열이랑 유리와도 인사를 나눴다. 그들은…. 사실 뭘 입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뭐라도 입고 왔겠지, 뭐. 나에게 크게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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