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일기

2-5

by 세타필

아무튼 우리는 다들 모였고, 현장에서 승차권을 끊었다. 좌석은 우측 열 앞뒤로 2칸씩 배정이 되었다. 호열이가 대표로 표를 끊었다. 녀석은 손에 승차권 4장을 들고 우리에게 돌아왔다. 이제 하나씩 나눠 가지면 되겠다. 속으로 생각하며 손을 내밀려던 찰나, 나는 친구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눈동자는 매우 불안정해 보였다. 무슨 일이지? 처음에 잠시 의문이 들었지만, 나는 금세 친구의 고민을 이해했다. 누가 누구와 앉아야 할까?


우리 사회에는 매우 이상한 관념이 자리 잡고 있다. 스무 살을 향해 달리는 아름다운 청춘들의 목표는 단 하나, 대학 진학이어야만 한다는 것. 그와 다른 목표를 가진다거나 해서는 절대로 안 되며, 목표에 방해가 될 수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들은 불경한 것이고,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취급하는 관념 말이다.


십 대 시절 이성 간의 교제라는 것 또한 바로 그 불경한 것 중 하나였고, 그래서 우리는 사회에 압력에 짓눌려 이성을 좋아하는 감정이라는 감정을 거세당한 채 살게 되었다. 여성에 대한 관심, 사랑이라는 감정, 연애라는 경험 모두.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물론 있었겠지만, 나와 내 친구는 좋게 말하면 말 잘 듣는 아이들이었기에 어른들이 말하는 나쁜 일은 해서도 안 되며, 관심도 가지지 말아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겉모습과는 달리 우리의 내면은 순진한 초등학생 시절에서 그다지 성장하지 못한 상태였다. 좋아하는 이성에게 어떻게 관심을 표현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이 점을 우리는 바로 시외버스정류장 대합실에서 깨닫게 되었다. 호열이와 나는 그 자리에서 그대로 굳어버렸다. 나도 나리에게 함께 버스를 타자고 말을 하지 못했고, 녀석도 유리에게 그러지 못했다. 녀석은 무언가를 남에게 전해주는 행위가 처음인 것처럼 어색한 동작으로 7-A, 7-B가 적힌 티켓을 나리에게 건네주었다. 표를 받아 든 나리는 잠시 티켓을 살피더니,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재빨리 눈길을 피했다. 너무나 비겁한 행동이었지만, 다른 행동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볼이 빨개지고, 머리가 뜨거워지는 게 느껴졌다.


유리는 별말 없이 나리에게서 티켓을 한 장 양도받았다. 나도 티켓을 한 장 받았다. 나는 한없이 쪼그라든 나 자신을 느끼며 티켓을 받아서 들었다. 분위기가 삽시간에 어색해졌다. 불쾌한 침묵 속에서 우리는 버스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역무원 아저씨께서 부산행 버스가 도착했음을 큰 소리로 알리셨고, 우리 넷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버스를 탔다.


나와 A는 6-A, 6-B 좌석에 탑승했다. 나리와 유리의 바로 앞자리였다. 버스가 끼익 소리를 내며 출발했다. 창문을 바라보았다. 점점 작아지는 터미널과 높이 솟아오르고 있는 태양이 보였다. 눈이 부셨다. 차창에 가림막을 쳤다. 나리네도 가림막을 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생각을 했다. 행동으로 옮기지는 못했다. 나에게는 뒷자리를 돌아볼 용기가 없었다. 버스는 덜컹거리며 열심히 달렸다. 나는 생각에 잠겼다. 나는 왜 그때 그 자리에서 나랑 같이 타자는 말을 꺼내지 못했을까. 놀이동산을 같이 놀러 가자고 말할 때의 그 용기는 어디로 가버렸던 걸까.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아마 내가 나의 마음을 자각한 이후라서 그런 게 아닐까. 학원 강의실에서 그녀에게 놀이동산을 가자고 했던 나와, 대합실에서 용기를 잃어버린 내가 인지하고 있던 내 마음의 선명함은 크게 차이가 났으니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당시의 나는 이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고, 종전의 실수만을 곱씹으며 내 자존감을 더욱더 깊은 곳으로 처박고 있었다.


뒷자리에서 재잘재잘 이야기하는 소리가 버스의 소음을 뚫고 내 귀에 들려왔다. 나는 실시간으로 내 자아가 쪼그라드는 느낌을 받았다. 옆자리에 앉은 이호열을 바라보았다. 녀석도 초점 없는 눈으로 반대편 차창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 상황이 나만의 문제는 아니라는 점에 안도감을 얻으면서도, 아 우리 어쩌냐고 하는 걱정 또한 내 가슴 속에 가득하였다.


하도 생각을 많이 해서 그런가, 버스는 생각보다 일찍 목적지에 도착했다. 우리는 다 같이 내려서 81번 버스를 타기 위해 이동했다. 터미널에서 둘둘 티켓을 나눈 순간부터, 우리는 남자 둘, 여자 둘로 짝지어 다니게 되었다. 내 옆에는 늘 그랬듯이 호열이가, 나리 옆에도 늘 그랬듯이 유리가 있었다. 나는 곁눈질로 나리를 흘깃 바라보았다. 지금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조금 기다리니 버스가 도착했다. 부산은 큰 도시여서 그런가, 정류장에 사람들이 참 많았다. 줄을 지어 사람들이 내리고, 우리도 줄을 지어 한 명씩 버스에 올랐다. 삐빅 학생입니다. 단말기가 카드와 접촉하며 소리를 냈다. 버스 안은 만석이었다. 영락없이 서서 가야 할 판이었다. 그래도 조금 더 가면 사람들이 좀 빠지겠지? 나와 호열이는 희망을 말하며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손잡이를 잡았다. 삐빅. 학생입니다. 여자아이들이 탑승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들 또한 생각보다 많은 사람 때문에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나리와 유리는 더군다나 키가 작은 편이었기에 걱정이 많이 되는 듯했다.


생각해 보면 참 신기했다. 초등학생 때는 나리가 분명 나보다 키가 컸었는데, 지금은 내가 훨씬 크다는 사실이. 그만큼 시간이 흘렀다는 거겠지. 나나 그녀도 그만큼 성장한 거고…. 하지만 지금 이런 감상에 빠져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내가 입을 열려는 찰나 이호열이 그녀들을 불렀다. 고개를 돌리니 녀석이 앉아 있었다. 자리가 그새 하나가 났나 보다. 호열이는 유리와 나리를 부르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기 앉아. 그렇게 말하곤 나를 끌고 버스의 반대편으로 갔다. 나는 왜….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나는 친구를 따라갔다. 사람들을 지나 반대편 손잡이를 잡았다. 고개를 돌려 우리가 있던 자리를 쳐다보았다. 자리에는 유리가 앉아있었다. 나리는 그 앞의 의자에 있는 손잡이를 잡고 서 있었다. 얼굴을 보이지 않았다. 유리가 나를 보는 듯했다. 나는 재빨리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곳에는 호열이가 있었다. 나는 왜 끌고 온 거야? 내가 물었다. 응? 녀석은 멍한 얼굴로 반문했다. 자세히 보니 녀석의 눈이 평소와 조금 달랐다.


성취감에 젖은 사람이 짖는 표정이 있다. 눈동자에는 초점이 없으며, 입가에 약하게 띄운 미소, 그리고 괜스레 우쭐대는 몸짓. 나는 녀석을 살피고 이해했다. 아, 멋진 일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구나. 괜히 나의 불만으로 친구의 황홀한 시간을 망가뜨리고 싶지는 않았기에, 나는 아무 말 않고 가만히 있기로 했다. 대신 한 번 더 나리가 있는 방향을 흘깃 바라보았다. 변한 건 없었다. 그녀들은 여전히 재잘재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버스는 종점을 향해 달렸다. 어린이 대공원이 있는 동네는 꽤나 멀었다. 종점이 가까워질수록 버스를 가득 채웠던 사람들도 조금씩 사라졌다. 어느새 버스 안은 한적해져서, 나와 이호열, 그리고 나리 모두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나와 호열이는 버스의 오른쪽 좌석 앞뒤로 자리를 했고, 나리와 유리는 오른편 출구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들은 끊임없이 이야기를 했다. 휴대전화를 보면서도 이야기했고, 창가를 보면서도 이야기했다. 반면 우리는 아무런 대화를 나누지 않은 채, 조용히 버스 창가 넘어 풍경을 감상했다.


차고지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종점에 도착했다. 버스 기사님이 종점입니다. 외치시고 커피 한잔을 하기 위해 앞문으로 내리셨다. 나와 이호열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반대편 열의 나리와 유리도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 보였다. 우리는 뒷문을 통해 버스를 내렸다. 한 겨울이었지만 해가 내리쬐는 정오는 그렇게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입은 패딩의 지퍼를 조금 내렸다.


어린이 대공원은 여기서 조금 더 걸어가야 했다. 점심시간이라 그런지 배가 출출했다. 우리는 본격적으로 놀기에 앞서 분식으로 허기를 달래기로 했다. 우리 넷은 근처의 분식집에 들어가 4인용 탁자에 자리를 잡았다. 물론 내 옆은 이호열의 차지였다. 총무 역할을 맡은 그는 우리의 의견을 수렴하여 주문하러 떠났다. 아주머니!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식당 카운터로 사라졌다. 유리도 마침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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