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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새해가 왔다. 첫눈도 왔다. 몇 년 만에 눈을 보는 건지. 뉴스에서는 난리가 났다. 동남권에 내린 기록적인 폭설로 현재 대중교통이 마비된 상황입니다. 아침을 먹는 동안 TV에서는 특파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족들은 모두 식사 중이었다. 혹독한 기상 상황에 대해 아무도 아무런 말이 없길래, 내가 슬며시 운을 뗐다. 오늘도 학원 가야 해요? 위험할 거 같은데요.
두꺼운 패딩을 입고 현관문을 나섰다. 몸이 후끈후끈했다. 어머니에게 등짝을 맞은 탓에 핫팩은 따로 필요가 없었다. 평소에 나는 자전거를 타고 학원에 다녔지만, 오늘은 길이 얼어 위험할 수 있었다. 나는 천천히 길을 걸어 등원했다.
학원에 도착해서 강의실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었다. 처음 보는 광경에 시계를 쳐다보았다. 수업 시작 20분 전이었다. 그렇게 일찍 온 건 아닌데. 나는 고개를 갸웃하고 지정석에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호열이가 도착했다. 어서 오라며 인사를 하고, 바로 잡담을 시작했다. 너 오늘 자전거 타고 왔냐? 아니, 길 미끄러울 거 같아서 걸어왔지. 오, 나도 나도.
잠시 후 학원 선생님께서 들어오셨다. 수업 시작하려면 아직 시간 남았는데요, 선생님. 나와 A의 목소리에 선생님은 알고 있다고 하셨다. 사실 선생님께서는 수업 전 인원을 체크하러 들어오신 것이었다. 눈이 내려 대중교통이 마비되었으니, 학원 근처에 살지 않는 학생들이 많은 ‘그 외 고등학교‘ 반의 출석 인원이 화두가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확실히 눈이 많이 왔나 보다. 선생님이 단둘만이 남아있는 강의실을 둘러보며 말씀하셨다. 선생님 저희는 어떡해요? 호열이가 질문했다. 선생님은 잠시 고민하시더니, 입을 떼셨다. 너희 둘 밖에 오질 않았으니, 오늘은 자습을 하고 수업은 다음에 보충으로 해결하자. 자습하다 모르는 거 생기면….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그냥 안 온 거로 해 줄 수 없겠냐는 말을 내가 하려는 찰나 강의실 문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나리가 그곳에 서 있었다. 그녀의 머리카락에는 하얀 눈이 밥알처럼 군데군데 붙어 있었다. 건물에 들어선 후 옷에 앉은 눈을 치웠는지 그녀의 검은 패딩은 여기저기 물기에 젖어 있었다. 강의실에 있던 우리 셋은 나리를 쳐다보았고, 그녀도 우리를 바라보았다.
나리의 눈동자가 선생님을 거쳐 호열이를 지나, 나에게로 향하는 걸 지켜보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찰나, 그녀는 눈을 벽시계로 돌렸다. 시계는 아직 수업이 시작하기 이른 시간이라는 걸 알려주었다.
선생님이 나리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멀리서 어떻게 왔어? 지금 버스도 안 돌아다닐 텐데. 아, 아버지가 태워주셨어요. 아, 그래? 눈길에 위험하셨을 텐데. 운전이 업인 분이어서 괜찮아요. 선생님과 나리의 대화를 훔쳐 듣다 나는 호열이와 눈이 마주쳤다. 녀석은 웃고 있었다.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사실상 박장대소를 하는 녀석의 얼굴을 보니,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다. 왜 웃냐? 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안 웃었는데? 웃으며 안 웃었다고 열받게 말하는 친구 덕분에 새로운 경지의 짜증을 느낄 때쯤, 선생님께서 강의실을 나가셨다. 그럼, 자습들 일단 하고 있어. 철컥. 손잡이의 고리가 체결되는 소리가 들렸다. 나리는 천천히 걸어서 본인의 자리로 향했다. 가방은 옆자리 의자에, 패딩은 책상 위에 올려두고 자리에 앉았다.
강의실은 조용했다. 너무 조용해서, 벽시계의 초침이 가는 소리가 공간에 울려 퍼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똑딱똑딱. 나는 학원 교재를 읽고 있었다.. 물론 거기에 쓰인 글은 한 글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 내 머릿속은 너무 빠르게 돌아가고 있어서, 활자 따위가 비집고 들어올 공간은 없었다. 나는 나리에게 말을 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튼 우리는 같은 초등학교에 다녔었고, 같은 반이었고, 짝꿍이기도 했으니까.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나리와 어색하게 지낸 것 그 자체가 그녀를 내가 다른 아이들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의 증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참에 아무도 없는, 이호열이라는 있으나 마나 한 친구 놈 한 명만 있을 때 어색함을 깨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말을 걸면 될까. 잘 지냈어? 아니야. 벌써 나리와 같이 수업을 들은 지가 며칠인데, 이건 탈락. 오늘 같은 날 왜 학원을 온 거야? 아니야. 너무 시비조잖아. 그냥 안녕이라고 해 볼까? 음. 그게 오히려 좋을지도 모르겠어. 아까 눈이 마주쳤을 때도 그렇고 나리와 제대로 인사를 나눈 적이 없는 것 같으니까. 아무렇지 않은 듯한 표정으로 가볍게 안녕이라고 인사를 건네야겠어.
오늘 왜 이렇게 늦었어? 내 옆자리에서 이호열이 말했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나 안 늦었는데? 말을 하려 입을 여는 순간, 나는 녀석의 고개가 나를 향해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녀석은 반대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 나를 보기 위해서 돌려야 하는 고개의 정 반대 방향. 친구의 고개가 향한 곳에서도 목소리가 들렸다. 나 안 늦었는데?
호열이와 나리는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누었다. 별 시답지 않은 대화였다. 눈이 많이 왔어. 그러니까. 이렇게 온 건 처음 봐. 우리 어릴 때 한 번 이 정도로 오지 않았나? 아 맞아. 그때 눈사람도 만들고 했는데. 초딩 때? 응, 맞아. 그때도 여기 살았어? 응, 이사를 몇 번 다니긴 했지만, 쭉 이 도시에서 살았어. 나 OO 초등학교 다녔었거든. 아, 그래? 야, 너도 거기 나오지 않았냐? 이호열이 나를 툭툭 치며 말했다. 나는 녀석과 나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둘 다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당황스럽네. 정확히 그때 느낀 감정이었다. 어, 맞아. 내가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때 나리가 불쑥 말했다. 우리 짝꿍도 했었어. 아, 그래? 이호열이 얼굴에 웃음기를 가득 띈 채 나를 말했다. 나는 녀석의 머리에 꿀밤을 놓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맞아. 그랬지. 내가 대답하며 나리의 눈을 바라보았다. 나리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부끄러운 감정은 그대로였다. 하지만 오늘은 눈을 피하고 싶지 않았다. 왠지 오늘마저 그래 버린다면 나리와 더는 이야기를 나눌 수 없을 거라는 느낌이 별안간 들었기 때문이다. 볼은 내 다짐과 상관없이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바깥의 추운 날씨 때문인지, 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리의 볼 역시 아직 빨갰다.
그때 이사한 곳에 살아? 응? 응. 아직 거기 살고 있어. 그때 네가 전학을 갔다고 해서. 맞아. 그게 갑작스레 결정된 일이라서…. 응 그랬다며. 나중에 규리에게 들었어. 네가 규리랑 이야기도 했었어? 아니, 네가 갑자기 사라져서…. 궁금해서 물어봤지. 그래도 짝꿍이었잖아. 그래도 네가 먼저 걔한테 말을 걸었다는 게 신기해. 아, 그런가. 나리는 잠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나를 보며 미소 지었다. 그래도 날 생각해 줬다니, 고마워. 그 말을 듣는 순간 안 그래도 발그레했던 내 볼은 터질 듯 달아올랐다. 몸의 모든 피가 볼로 몰리는 듯했다. 아, 아니야…. 나는 속삭이듯 말하며 나리의 눈에서 얼른 시선을 돌렸다. 이 정도로 빨개졌으면 분명 50미터 밖에서도 보일 텐데. 그 사실이 너무 부끄러웠다.
나리도 마찬가지였나보다. 내가 시선을 거둔 뒤, 이호열의 눈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들 뭐 이렇게 얼굴이 빨개졌냐? 안 빨개졌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최대한 나리 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고자 노력하며 이호열에게 말했다. 녀석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얄미웠다. 그 얼굴에서 웃음기를 없애주지. 다짐한 다음 나는 나리에게 물었다. 그런데 오늘 유리는 왜 안 온 거야? 버스가 너무 안 와서 오늘은 못 올 것 같대. 나리가 대답했다. 아 그렇구나. 나는 맞장구를 치며 호열이 쪽을 슬쩍 훔쳐보았다. 녀석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싹 가신 걸 확인하니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나와 이호열, 그리고 나리는 아무도 없는 강의실에서 1시간 정도 시간을 보냈다. 사실 선생 학습이라는 게 자습이 엄청나게 요구되는 일은 아니었다. 공부는 시험 기간에 하는 거니까. 그래서 우리는 공부보다는 잡담을 주로 했다. 이야기의 주제는 주로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것이었다. 당시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우리에게 괴담처럼 흉흉했던 소문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야자에 대한 이야기였다. 야간 자율학습의 준말인 야자는 이름과는 다르게 매우 타율적인 제도였다. 아침 8시까지 등교해서 야자를 마친 후 저녁 9시가 넘어서야 학교에서 떠날 수 있는 삶에 대해 우리는 심층 깊은 토론을 했다. 이게 도대체가 맞는 일인 건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