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나도 그곳에서 같이 수업을 듣는 친구들과 매우 친해졌다. 하지만 나리는 예외였다. 그녀와는 어색한 첫 만남 이후로 서로 별다른 말을 주고받지 않았다. 웃긴 점은 우리는 서로를 훔쳐보고 있었다는 점이다. 나는 수업 시간 중에도 몇 번을 몸을 좌우로 돌리거나, 목을 스트레칭하는 척하며 나리를 흘깃흘깃 바라보곤 했다. 그러다 보면 이미 나를 훔쳐보던 나리와 눈이 맞는다던가, 아니면 내가 그녀에게 시선을 들키거나 했다. 서로가 서로의 행동을 인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누구 하명이라도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다면 우리는 분명히 그 반의 누구보다 친해질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춘기의 우리는 감정을 품은 이성에게 선뜻 먼저 다가가기에는 너무나 서툴고 미숙한 존재였던 것이다. 특히나 남중에서 사춘기의 3년을 보낸 학생이었던 나는 여자 앞에서 용기를 낸다는 것의 의미조차 모르는 무지렁이였고, 왜 나리랑은 말도 하지 않냐는 친구 놈의 물음에 굳이 말을 해야 하냐며 나는 되려 짜증을 내기만 했다.
나의 필사적인 회피 기동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있었다. 그때의 우리는 이제 피어나는 어린 학생들이었다는 것이다. 서로 꽃봉오리를 막 틔워내는 시기에 같은 공간에서 함께 지낸다는 건, 무시할 수 없는 큰 사건임은 분명했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이제 예시를 들어 설명해 주도록 하겠다.
한 날은 호열이가 학원을 마치고 계단을 내려오며 넌지시 물었다. 너 유리 어떻게 생각하냐? 뭘 어떻게 생각해. 내 퉁명스러운 대답에 친구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아니, 좀…. 예쁘장하게 생기지 않았느냐고. 나는 계단을 내려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친구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질문의 의도와 그 배경을 파악하는데 몇 초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마침내 모든 걸 이해한 나는 웃음을 터뜨렸다. 너 걔 좋아하냐? 내 웃음 섞인 물음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붉어진 친구의 얼굴을 보며 매우 즐거워진 나는 이 녀석을 어떻게 더 놀려줄까 고민을 잠시 했다. 하지만 호열이의 얼굴로 향하는 혈류의 속도와 녀석의 굳어진 얼굴을 보고 나는 마음을 고쳐먹기로 했다. 흠흠. 나는 괜한 헛기침으로 웃음기를 거두고 친구의 질문에 진중하게 대답하기로 했다. 유리 정도면 뭐…. 괜찮은 거 같은데? 성격도 좋고. 사실 나는 유리의 성격을 잘 알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리는 바로 나리의 단짝이었다. 둘은 나와 호열이처럼 항상 짝을 지어 자리에 앉아 수업을 들었다. 그런 유리와 내가 자주 말을 했을 리는 만무했다.
그렇지? 나는 걔가 좀 괜찮더라고. 괜찮은 거 같아…. 녀석은 나를 앞에 두고 독백인지 대화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나는 속으로 다시 웃음이 올라왔으나, 친구의 사업을 존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래서 뭐, 걔가 좋아? 아니, 뭐 좋다기보다는, 그냥 눈이 간다. 그 정도…. 내 물음에 친구는 말을 질질 끌며 대답했다. 나는 함께 집에 가는 길에 녀석에게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꼬치꼬치 물어보았다.
호열이는 유리가 처음 봤을 때부터 눈에 들어왔다고 했다. 나와 나리가 어색한 눈인사를 주고받았던 첫 만남 때부터 말이다. 왠지 모르게 눈길이 계속 갔다고 그랬다. 아, 그랬냐고. 녀석이 말하는 동안 나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너 걔 좋아하는 거야? 내 물음에 그는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아니, 좋아하는 건 아니라니까. 내가 걔를 왜 좋아해. 친구는 한사코 부인했다. 과도한 부정은 사실을 뜻한다는 말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데, 그 말은 참으로 맞는 말인 것 같았다. 그 시절에는 남자들 사이에서 먼저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걸 이야기하면 놀림감이 되는 이상한 분위기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나에게 어떻게 보면 부끄러울 수 있는 이야기를 해 준 친구의 존엄을 지켜주기 위해서 과도한 놀림은 지양하기로 했다.
녀석은 한번 입이 터지더니, 사실상 본인의 짝사랑에 대해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다. 나도 옆에서 계속 추임새를 넣어주었다. 그러다 우리가 헤어져야 하는 지점인 하천 다리에 다다랐을 때쯤, 갑자기 말을 멈추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뭐야? 나는 상사병이라도 걸렸나 싶어 발걸음을 멈추고 호열이를 바라보았다. 그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하천을 바라보더니, 나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사실 걔가 남주를 좋아하는 것 같아.
응? 남주? 응. 내 반문에 호열이는 쓸쓸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남주 역시 우리와 함께 수업을 듣는 친구 중 한 명이었다. 남중을 나온 우리와는 달리 남주는 학원 근처의 남녀공학을 졸업한 친구였다. 고등학교는 우리와도, 학원과도 거리가 제법 먼, 근처의 산 이름을 딴 D 학교에 배정이 된 친구였다. 성격이 시원시원하고 재미있는 친구라 우리와도 금세 친해질 수 있었는데, 키가 매우 크고 농구를 좋아해서 남자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꽤 좋은 친구였다.
남주 멋있지. 호열이가 바닥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녀석의 말속에는 씁쓸함이 잔뜩 배어 있었다. 나는 무슨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냥 그를 바라보았다. 감정이 굉장히 복잡해졌다. 이 복잡하고도 미묘한 상황이 내 주변에서 일어났다는 사실도 믿기지 않았고, 그 주인공들이 내 친구들이라는 점도 참 이상했다. 완전 사랑의 스튜디오로구먼.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아, 그냥 그렇다고. 나도 남주 좋아해. 좋은 친구야…. 나 이제 집에 갈래. 내일 봐. 내가 복잡한 표정으로 고민하는 걸 본 호열이가 말했다. 나는 녀석이 터덜터덜 가는 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갑자기 문득 생각이 들었다. 나는 호열이에게 달려가 팔을 잡아끌었다. 야. 어, 왜? 왜 이러냐는 녀석의 표정을 보며 내가 말했다. 내가 하나 이야기를 해 줄게.
나는 호열이에게 나리와 나의 이야기를 해 주었다. 사실 모든 걸 다 말하진 않았다. 그냥 그녀와 내가 같은 초등학교를 나왔다고, 2학년 때는 짝꿍도 같이한 사이라는 말만 했다. 아니, 그런데 왜 그러게 데면데면하게 군거야? 이야기를 다 듣더니 호열이 물었다. 나도 몰라. 그냥 그렇게 되던데. 그래? 대답을 듣고는 갑자기 그가 흐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내 얼굴에 혈류가 몰려왔다. 아, 뭐 어쩌라고. 내가 짜증을 내자 녀석이 웃으면서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난 저 여자에게 전혀 관심 없는 놈인 줄 알았는데. 알았는데 뭐? 난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갑자기 급발진하냐? 아니 너가….
우리는 다리 위에서 투닥거리다 헤어졌다. 친구가 내 시야에서 사라졌고, 나는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걸었다. 하늘을 바라보니 별들이 참 많이 보였다. 뭔가 기분이 이상했다. 나리와 있었던 일을 누군가에게 털어놓은 건 이번이 최초였다. 무언가 후련한 듯하면서도 매듭짓지 못한 과제를 남겨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다시 생각해 보니 내가 왜 나리 이야기를 녀석에게 했는지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에이, 아무렴 어때. 나는 잠시 생각을 하다, 머리가 복잡해지는 걸 느끼고 그냥 다시 집으로 걸었다.
다음날, 여느 때와 다름없이 학원에 갔다. ‘그 외 고등학교‘ 반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모든 것은 그 전까지와 다름없었다. 나리를 포함한 여자애들은 왼쪽 분단을 차지한 채 떠들고 있었고, 남자아이들은 오른쪽 분단에서 서로 장난을 치며 놀고 있었다. 나와 호열이가 함께 들어서자, 아이들의 시선이 모두 우리에게 향했다. 어, 얘들아 어서 와. 남주가 쾌활하게 인사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어젯밤의 이야기를 들은 후의 학원 강의실은 나에게 굉장히 다르게 느껴졌다. 예를 들자면, 내 옆자리에서 자꾸 옆 분단을 흘깃거리는 호열이가 자꾸 신경이 쓰인다거나, 혹은 종종 유리가 기지개를 켜는 척을 하며 우리 분단 제일 뒤에 앉아 있는 남주를 훔쳐보는 게 자꾸 눈에 들어오는 것 말이다. 아주 정글이 따로 없구먼. 생각하다 또 괜히 속이 찔렸다. 나도 여전히 나리를 훔쳐보는 건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렇다. 강의실은 매우 조용했지만, 그 속은 아주 뜨겁게 끓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땐 아직 끓는점에 도달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마음을 알고만 있는 채로 며칠을 더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