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일기

2-1

by 세타필

나도 나이를 먹고 어느새 고등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17살의 나는 9살의 나와 그다지 많이 달라진 건 없었다. 껍데기는 많이 변하긴 했지만, 속은 여전히 말랑말랑한 푸딩 같았다. 여리고 순수한. 나는 당시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내 의지로 다니게 된 건 아니다. 순전히 시작은 아버지의 의지였다. 중학교에 다닐 때 많은 친구가 학원에 다녔다. 학교 수업이 끝나면 반에서 친구들과 조금 시간을 보내다가, 학원 차가 올 때쯤 학교 정문으로 나가 봉고차를 타고 학원으로 향하는 삶. 학원에 가서 수업을 듣고, 과제를 하고, 해가 지고 나서야 건물을 나와 다시 봉고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그런 삶. 주변의 많은 친구가 그렇게 살고 있었다. 나는 그러기가 참 싫었다. 그 시간에 뭔가를 하지는 않았지만 학교가 끝난 뒤 다시 등교를 한다는 생각이 너무너무 힘들었다.


그래서 공연히 나는 학원 따위 다니지 않아도 얼마든지 공부를 잘할 수 있다고 말하고 다녔다. 실제로 당시 학원에 다니지 않는 친구 중 공부를 매우 잘하는 친구들도 많았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나는 그런 애들이 아니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점점 성적이 떨어졌고, 중학교 2학년 2학기 기말고사를 기점으로 아버지의 인내심이 바닥나 버리고 말았다. 나는 집에서 엄청 혼이 났고, 벌로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아버지도 보통 분은 아니셨다. 보통 우리 학교 아이들이 많이 다니는 동네 근처의 여러 학원이 아닌, 학교와 엄청나게 멀리 떨어진 종합학원에 나를 등록해 버린 것이다. 물론 나는 처음에 엄청나게 반항했다. 처음에는 학원에 가기 싫다고, 그리고 다음에는 학교 근처 학원을 보내 달라고. 하지만 나의 요구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화가 난 나는 가출이든 뭐든 반란 계획을 세워도 봤지만, 그 후폭풍을 감내하지는 못할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16년간의 경험으로 나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고 있었으니까. 결국 나의 계획은 미수에 그쳤고. 학원에 다니게 되었다.


서울의 유명한 동네 이름을 딴 학원이었다. 당시에 우리 시에는 애들이 많이 다니기로 유명한 종합학원이 몇 군데 있었는데, 그곳은 그중 하나였다. 당연하게도 그곳에서는 나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다. 우리 중학교가 있는 곳에서 꽤 많이 떨어진 곳에 있는 학원이었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시내를 나가야만 겨우 볼 수 있었던 교복들로 가득 메워진 공간에 처음 발을 딛었을 때의 기분은 그렇게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내가 갑자기 사라진다고 하더라도 그 누구 하나 신경 쓸 것 같지 않은 느낌. 그런 썩 유쾌하지 않은 기분을 내내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었나 보다. 시간이 지나니 그곳에서도 친구들이 생겼다. 모두 우리 중학교에 다니는 놈들이었다. 그 수는 총 4명이었는데, 그게 우리 중학교 인원의 전부였다. 중학교 3학년은 녀석들과 재미있게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가기 싫다고 울부짖던 학원이 친구들이 생기니 가고 싶은 공간으로 바뀌었다. 우리는 친해지고 나서는 항상 학교가 끝나면 같이 자전거를 타고 학원에 갔다. 가는 길에 아이스크림을 사 먹기도 하고, 음료수 내기를 하기도 하고 그랬다.


시간은 참 빨라서 내가 학원에 다니게 된 지도 어느새 1년이 다 되어 갔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이제 고등학생이 될 나이가 된 것이다. 우리들 대부분은 당시에 우리 지역에서 명문으로 유명했던 A 남자 고등학교를 1순위로 지원했다. 유일하게 한 명이 남녀공학을 가고 싶다며 자기 집과 가장 가까웠던 B 고등학교를 지원했다. 그 녀석은 우리 중에서도 특출나게 여자에 관심이 많았던 놈이었다. 다들 그 사실로 그 녀석을 놀렸다. 의리 없는 놈. 당시에는 그 어느 것보다도 우리에겐 친구가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그놈은 참 머리가 좋았다.


하지만 내가 간과했던 점은 우리 동네는 어차피 평준화 지역이라 뺑뺑이를 돌려야만 했다는 것이다. 날이 꽤 추워지고 우리가 배정받은 학교가 발표되었다. 결과는 예상과 매우 달랐다. 5명 중 단 두 명만이 지원했던 학교에 배정이 되었다. 한 명은 남고에 배정이 되었고, 남녀공학을 지원한 녀석도 합격했다. 나머지는 전부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는데, 가장 난감했던 사람은 바로 나였다. 그 많던 희망 학교 중 제일 뒷순위로 작성한 학교에 배정이 되어버린 것이다. 문제는 내가 배정받은 학교는 1년 전 개교한 신생 고등학교로, 우리 집이나 학원과는 매우 먼 신도시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었다.


중학교에서의 마지막 학기가 끝이 났다. 날씨가 꽤 추워졌고, 방학이 시작되었다. 학원에서는 우리가 배정된 고등학교를 조사했다. 선행학습 같은 차기 수업 일정을 준비하기 위함이었다. 하루는 수업이 끝나고 친구들과 강의실을 나서는데, 선생님이 나를 불러 세웠다. 용민아. 네. 우리 학원에서 너만 유일하게 ㅁㅁ고에 배정이 되었더라. 아마 거리가 멀어서 그런가 봐. 아, 그래요…? 응 네가 학원을 계속 다닌다면 우리가 물론 관리는 해 주겠지만, 일단 상황이 그러니 알고는 있어야 할 거 같아서. 부모님께도 말씀드려 보고. 알겠지? 아, 네….


부모님께서는 전적으로 내 결정에 따르겠다고 말씀해 주셨다. 나는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씀드렸고, 우리는 일단 입학 전 선행학습까지는 학원에 다니기로 했다. 학원은 중학교 때와 마찬가지로 인근의 학생들로 가득했다. 학원 두 블록 너머의 B 고등학교나, 한 정거장 거리의 C 고등학교의 아이들이 많았다. 내가 배정된 신생 고등학교를 포함해서 A 남고나, A 여고에 배정받은 학생들도 학원에는 별로 없었고, 우리는 자투리 처리반같이 ’그 외 고등학교 반‘으로 함께 수업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그녀를 다시 만난 순간이. 우리 무리 중 A 남고에 배정받은 친구와 함께 첫 수업을 위해 강의실에 들어선 순간 말이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난다. 두 분단으로 나누어진 책상들 사이, 시금치 색깔의 교복을 입고 옆의 친구와 떠들고 있던 나리. 사실 처음에는 그게 나리인지 알지 못했다. 얼굴도 보지 못했고, 단지 뒷모습만이 전부였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 아직도 그때의 기억이 또렷하다. 아마도 내 머리로는 그녀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했지만, 근육과 심장이 재회를 알아차린 게 아닐까.


나와 내 친구 호열이는 그녀 옆 분단의 바로 옆 책상에 자리를 잡았다. 나리도 친구와 떠들다 낯선 사람이 들어 온 걸 느꼈는지, 대화를 멈추고 우리를 바라보았다. 눈이 맞았다. 우리는 어릴 때보다 조금 더 긴 시간 눈을 맞추었고, 서로가 서로의 볼이 달아오르는 걸 인지한 후, 시선을 돌렸다. 신기한 경험이었다. 가슴이 빠르게 뛰고, 몸이 저릿저릿했다. 나리도 똑같은 기분을 느꼈을까? 심장이 너무 떨렸다. 어릴 때는 이러지 않았는데, 머리에 피가 쏠리고 눈이 충혈된다는 기분이 들었다. 이대로 계속 서 있다가는 어지러울 것 같아 재빨리 자리에 앉았다. 지금 내 상태가 알려질까 무서워 벽과 제일 가까운 자리에 털썩하고 앉았다. 아, 네가 안쪽 앉을 거야? 친구의 말이 저 멀리서 흐리게 들렸다. 나는 대답할 수가 없어서 조그마하게 고개만 끄덕였다. 친구도 크로스 백을 책상 걸이에 걸더니, 내 옆자리에 앉았다. 너 왜 이렇게 얼굴이 빨개? 갑자기 따뜻한 곳에 와서 그런가? 친구의 목소리가 웅얼거리듯 들렸다. 나는 어서 이 상황이 지나가기만을 바랐다.


예전에도 눈이 참 컸는데, 지금도 크네. 그때는 저렇게 피부가 하얀지 몰랐어. 살이 약간 오른 것 같은데 오히려 더 잘 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별 이상한 생각이 수업 시간 내내 계속 들었다. 아니, 이상한 생각이 아니라 나리 생각이. 그날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어떤 말씀을 했고, 무슨 과목을 들었고, 뭐 이런 건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냥 머리가 몽롱했고 약간 공중에 떠 있는 듯한, 그런 느낌만이 들었다. 수업이 끝나고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그녀와 다시 눈을 맞추지 못한 채 도망치듯 강의실을 뛰쳐나왔다. 너 왜 그러냐는 친구의 물음에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왜냐면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몰랐으니까.


증세는 시간이 지나며 조금 완화되었다. 매일 가는 학원에서 매번 그런 상황이 계속되었다면 아마 나는 탈진해서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곳은 학교가 아니라 학원이었다. 선행학습을 시작하며 서로를 소개한다거나 하는 시간을 따로 가지진 않았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니 몇 명 되지 않았던 ‘그 외 고등학교 반‘의 친구들은 서로 자연스레 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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