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사실 나리는 알고 있었다고 했다. 내가 얼마나 당산을 좋아했는지, 그리고 유적이 발굴된 이후 내가 어떻게 산과 멀어지게 되었는지. 그게 좀 보기 안타까웠다고 했다. 낯선 사람들이 오고, 땅을 헤집고, 여기저기 울타리를 친 건 맞지만 그래도 당산은 그대로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상에서 내려보는 광경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당산은 거기에 그대로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고 했다.
조금 더 걸으니 큼지막한 바위들이 나타났다. 길이 조금 더 좁아졌고, 바람이 좀 더 강해졌다. 하늘을 가리던 나무들이 점점 사라졌다. 파란 하늘이 더 많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상에 도착했다. 우리 집 거실쯤 되는 규모의 평지와 그 가운데 위치한 비석이 눈에 들어왔다.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쏴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근처의 대나무 숲이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이리 와. 나리가 나를 손짓했다. 나는 나리의 손이 이끄는 대로 걸었다. 나리는 나를 정상의 남쪽으로 끌고 갔다. 우리 동네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기 멀리 나와 나리의 집이 보였다. 우리가 지나온 OO 슈퍼와 OO 오락실도 보였다. 우리 초등학교도 보였다. 마침 수업 시간이 끝났는지 운동장에는 교실에서 쏟아져 나온 학생들로 가득했다.
나는 이해했다. 나리의 말이 맞았다. 당산은 예전 그대로였다. 모습이 조금 변하긴 했지만, 정상에서 보이는 풍경은 그대로였다. 그동안 당산을 찾지 않은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똑같다. 내가 나리에게 말했다. 나리는 맞지? 하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는 한동안 그렇게 동네를 바라보고 있었다. 바람이 선선히 불었다. 땀이 마르며 약간의 닭살이 돋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나리를 바라보았다. 그녀도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마주 보았다. 우리는 싱긋 웃었다. 그리고 다시 동네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그 아이와의 기억은. 그날 이후 우리는 따로 만나거나, 무언가를 같이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건 전적으로 내 잘못이었을 것이다. 그 시절 나에게 여성이라는 존재는 그냥 달리기 느린 생물 그 이상 아무것도 아니었으니까. 나리도 딱히 나에게 말을 걸거나 그러지 않았다. 예전처럼 그냥 데면데면한 짝꿍으로 우리는 지냈다. 조금 달라진 점이 있기는 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학교에서 다투지 않았다.
시간이 흘렀고 여름방학이 되었다. 워터파크는 갔다 왔을까? 가끔 나리가 생각나곤 했다. 하지만 나리의 집에 전화를 건다거나, 찾아간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건 그냥 단순한 호기심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오랜 시간 잊고 지내던 친구의 이야기가 나왔을 때, 그 녀석 요샌 뭐 하고 지내지? 하고 흘러가듯 말하는 것, 그 정도의 감정이었다.
방학은 눈 깜빡하는 사이 지나가 버렸다. 계절은 여름을 지나 가을을 준비하고 있었다. 새 학기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등교를 했다. 개학 첫날 자리에 앉아 생각했다. 아마 자리를 바꾸게 되겠지. 괜히 좀 섭섭했다. 그새 조금은 정이 들었나 보네. 생각하며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나리는 아직 오지 않았다.
반 친구들과 잡담을 했다. 근처에 살아서 방학 때 뻔질나게 만났던 놈들도 있었고, 조금 멀리서 살아 보지 못했던 녀석들도 있었다. 시계가 정각을 가리키고, 종이 울렸다. 우리는 다들 자리로 돌아갔다. 나리는 그때까지도 오지 않았다. 몸이 어디 안 좋은가. 짝꿍으로는 마지막 날일 텐데 아쉽게 되어버렸네. 나는 생각했다.
얼마 있지 않아 담임 선생님께서 교실에 들어오셨다. 우리는 다 같이 안녕하세요. 외쳤다. 외쳤다. 방학 잘 보냈니? 선생님도 반갑게 화답하셨다. 새 학기가 시작되면 정해야 할 것이 많았다. 선생님과 우리는 할 일 목록을 칠판에 적어서 하나하나 해 나가기로 했다. 아참. 선생님은 판서하시다 몸을 돌려 우리는 바라보셨다. 천천히 교실을 훑으시다 눈동자가 내가 있는 곳 주위에서 멈췄다.
나리가 전학을 갔어.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리 집이 조금 먼 곳으로 이사를 해서 같은 학교에 다니기 힘들어졌다고 하셨다. 친구들이 아쉬워하는 소리를 냈다. 몇몇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 아쉬움은 뒤로하고, 할 일을 하자. 당번은 다시 1번부터…. 선생님이 다시 칠판으로 몸을 돌리시며 말씀하셨다. 나는 옆자리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랬구나…. 기분이 이상했다. 미리 말해 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도 난 짝꿍이었는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쉬는 시간에 나리의 친구들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방학 중 급한 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갑작스레 결정된 일이라 자기들에게도 나리가 급하게 소식을 알렸다고 했다. 별로 상관없지 않아? 넌 어차피 나리 별로 안 좋아했잖아. 나리와 친했던 규리가 나를 보며 톡 쏘듯 말했다. 대꾸는 하지 않았다.
시간은 참 빠르게도 흘렀다. 나리의 기억도 얼마 안 가서 흐려졌다. 무언가에 계속 머물러 있기에는 초등학교 2학년은 너무나도 어린 나이였다. 조금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나는 여느 때처럼 친구들과 놀러 다니고, 장난을 치고 했다. 그렇게 나이를 먹으며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에 들어가고, 고등학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OO 씨 곧 외근 나가죠? 저 멀리서 희미하게 과장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던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시계를 쳐다보았다. 시침이 벌써 10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오전에 반드시 다녀와야 하는 업체가 있었다. 네. 대답을 했다. 과장님으로부터 관련 사항을 인계받았다. 그러니까 강하게 이야기해야 해요. 더 이상 이 사람들 봐줘서는 안 될 것 같아. 과장님의 말씀에 나는 열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을 챙기고 동료들에게 인사를 꾸벅했다. 다녀오겠습니다. 잘 다녀와요. 다들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들어 주었다. 다만, 눈을 돌려 나를 바라봐 주는 사람은 없었다.
건물 밖으로 나와 하늘을 바라보았다. 우중충한 하늘이 비를 예보하고 있었다. 곧 쏟아지려나. 어서 업체를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비 오는 날을 좋아했다. 쏟아지듯 내리는 거 말고, 부슬부슬 내리는 비. 왜 그럴까? 몇 번 생각을 해봤는데, 어린시절의 기억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남자는 자기 몸은 지킬 줄 알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명을 받들어 초등학생 시절부터 국술원이라는 무술 도장을 다녔었다. 국술원은 2층 정도 되는 건물의 지하에 있었는데, 건물의 구조가 조금 특이해서 도장에 가려면 지하실로 내려간 다음, 통로를 조금 걸어가야 했다. 비가 오는 날이면 그 통로는 특이한 냄새로 가득했다. 지하실 특유의 곰팡내와 비 맞은 흙내가 섞인 독특한 냄새였는데, 나는 그 냄새가 좋았다. 그래서 비 오는 날엔 지하실 통로에 멈춰 서서 킁킁거리며 향을 탐닉하곤 했다.
가까운 사람들에게 비를 좋아한다고 이야기하면 돌아오는 말은 넌 참 이상하다는 소리였다. 그게 뭐가 좋아? 라던가, 곰팡내는 몸에 안 좋아. 같은 소리도 들었다. 하지만 너는 그렇게 반응하지 않았지. 가만히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고, 우리가 다니던 골목길에도 비 오는 날만의 특이한 향이 있다고 말했었지.
그러나 그때는 그런 말이 나에게 얼마나 힘이 되는지 잘 알지 못했다. 이별이란 그런 것인가보다. 주변에 존재하다 사라진 것들에 대해 아픈 감정을 되새기게 되는 것 말이다. 그래도 지금은 조금 나아졌다. 다들 이야기했다. 과거에 발목 잡혀 나아가지 못하는 건 오로지 너의 잘못이라고. 털어버리고 앞으로 나아가라고 한다. 하지만 털어버리고 싶지 않았다면? 조금이라도 더 너에 대한 감정과 기억을 마음속에 두고 있기를 바랐다면? 그게 잘못된 것임을 알면서도 그러고 싶었다면…?
외근을 가는 길은 여느 날처럼 평온했다. 마치 흘러가는 바람처럼, 넌 영원히. 요즘 자주 듣는 노래가 자동차의 스피커 너머로 흘러나왔다. 이 곡은 기타 리프가 정말 좋다. 음량을 조금 더 올렸다.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었다. 노래와 빗소리가 섞여 평소와는 조금 다른 소리가 났다.
생각 없이 달리다 보니 시간에 딱 맞춰 업체에 도착했다. 사실 너무 오랜만에 오는 길이라 잠시 헤매고 말았다. 주차를 위해 잠시 대기했다. 경비원 아저씨께서 다가오셨다. 창문을 내리고 수고하십니다. 인사했다. 어떻게 오셨소? 물음에 나는 회사와 내 이름을 대답했다. 잠시 후 차단 봉이 올라가고 주차장으로 진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