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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나리도 그때의 나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게 될 테지. 오락실에 들어가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굳어졌다. 미리 생각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여기까지 와 버렸는걸. 지금이라도 알게 된 게 다행이지 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면 오락실은 가지 말자. 내가 말했다. 나리는 알겠다고 했다. 그러고 우리는 한동안 가만히 있었다. 오락실에 들어가서는 안 된다는 생각은 같았다. 하지만 그러면 이제 어딜 간단 말인가? 나는 내가 자주 가는 곳들을 나리가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특히나 다음번 장소를 말하기가 조심스러웠다.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축구하러 가자고 할 수도 없고, 숨바꼭질? 둘이 숨바꼭질을 어떻게 해. 소꿉놀이는 내가 하기 싫고….
당산에 가자. 그 순간 나리가 말했다. 당산? 응, 당산. 나는 놀라서 나리를 쳐다보았다. 당산은 학교에서 바로 가는 게 훨씬 가까운데…. 왜 이제 와서 이야기하냐는 말을 속으로 꿀꺽 삼키고, 나는 나리에게 그러자고 말했다. 나도 오랜만에 당산에 가 보고 싶었다.
동네에 있는 자그마한 뒷산을 가리켜 우리는 당산이라고 불렀다. 토지나 마을의 수호신이 있다고 하여 신성시하는 마을 근처의 산이나 언덕. 네이버 국어사전에 나오는 뜻처럼 그곳은 신성한 산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몇 년 전 당산에서 유적이 발굴되었다. 원래도 당산에는 군데군데 조개껍데기가 쌓여 있는 구릉지가 있었는데, 그곳이 알고 보니 삼국시대에 만들어진 패총이었던 것이다. 패총이란 사람들이 먹고 버린 조개껍데기가 무덤처럼 쌓여 있는 곳을 뜻하는 말인데, 그 말인즉슨 당산 주위에 매우 큰 촌락이 존재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처음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나와 내 친구들은 당산에서 바로 그 조개껍데기들을 서로에게 던지고 놀았었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숨바꼭질을 하거나 족구를 할 때도 항상 우리는 당산을 찾곤 했다. 하지만 뒷산이 고고학적으로 중요한 유적지임이 알려지고 나서부터는 상황이 달라져 버렸다. 어느 날 갑자기 많은 아저씨가 오더니, 산을 돌아다니며 무언가를 찾고 의논했다. 그러더니 나중에는 더 많은 아저씨가 와서는, 기중기와 삽을 가지고 땅을 막 파기 시작했다. 등산로 주변에 천막이 세워지고 산의 곳곳에는 방책이 세워졌다. 우리는 그렇게 당산을 잃어버렸다.
이는 실로 큰 손실이 아닐 수 없었다. 우리에게 당산은 단순히 놀이터만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쑥이 참 많이 자랐는데, 초봄이 되면 많은 아주머니가 갓 자란 쑥을 캐러 동산에 오르곤 하셨다. 우리 어머니도 가끔 당산에 들리셔서 쑥을 캐오곤 하셨는데, 그걸로 무침도 해 먹고 국도 해 먹곤 했다. 참 맛있었다. 하지만 발굴 작업이 시작된 후로는 너무나 많은 사람이 당산을 들락날락 한데다가, 몇몇 곳을 제외한 다른 곳은 출입이 제한되어 쑥을 캐기 쉽지 않은 환경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이후로는 어머니께서 시내 오일장에서 쑥을 직접 사 오셔서 요리해 주시곤 하셨는데, 오일장 표 쑥국 또한 맛이 꽤 괜찮았다. 하지만 당산을 자주 갈 수 없다는 사실에 잔뜩 심술이 난 상태의 나는, 예전 쑥 요리가 더 맛있었다는 둥, 쑥이 맛이 없어졌다는 둥, 괜히 요리에 어깃장을 놓곤 했고, 덕분에 어머니로부터 많은 꾸중을 듣곤 했다. 그뿐만 아니었다. 괜히 당산에 놀러 가려는 친구들을 못 가게 한다거나, 시내를 갈 때도 당산을 질러 가면 훨씬 가까울 수 있는 길을 괜히 빙 돌아간다거나 하기도 했다.
나도 그때 했던 행동들이 매우 어리숙한 짓이었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미숙했던 그 시절의 나를 위해 변명을 해 보자면, 그 모든 것은 친구처럼 존재하던 공간을 빼앗겨 버린 꼬마 아이가 상실감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법이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이후로 당산에 올라갔을 때 나의 눈동자에 비친 풍경은 내가 알던 당산과는 매우 달라진 모습이었고, 그 사실을 인지하게 될 때마다 나는 마음속 한구석이 이유 없이 아려오는 기분을 느껴야 했기 때문이다.
당산을 가본 지 꽤 오래되었다는 내 고백을 듣고 나리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난 예전에는 자주 갔었다고도 말했다. 나리는 그것도 알고 있다고 대답했다. 당산에 관해 몇 가지 말을 더 주고받은 후, 우리는 다시 걷기로 했다. 당산 길은 우리 집에서 가는 길, 학교 근처에서 가는 길을 포함해서 총 4개 정도가 있었는데, 우리는 걸어왔던 길을 거슬러 학교 근처에서 올라가기로 했다. 나리의 집과 OO 슈퍼를 다시 지나쳤다. 주택가를 지나, 보육원과 중국집을 지나 산길의 시작점에 도착했다. 노루표페인트와 갓 만들어진 새시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인테리어 가게와 탕과 수증기를 형상화한 기호와 OO 탕이라는 가게 이름을 금빛으로 칠한 목욕탕 사이로 조그마한 샛길이 보였다. 이곳이 등산로의 시작점이었다.
당산은 산길마다 특징이 있었다. 예를 들어 우리 집 근처에서 시작되는 길은 등산로가 매우 완만하고 산책하기가 좋아서 예전부터 어르신들이 자주 밤 산책을 하시곤 했다. 반면 쑥을 따러 가는 길은 폭이 상대적으로 좁고 길이 구불구불해서 사람들이 잘 왕래하지 않았다. 학교 근처의 등산로로 말하자면 초입에는 경사가 그렇게 심하지 않았으나, 갈수록 기울기가 커져서 가장 힘든 등산로라는 평을 받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앞서 말한 조개 패총과 가장 가까운 길이 바로 학교 등산로였다.
나리와 나는 그 길을 함께 걸었다. 샛길을 조금 걸어가니 주위로 나무들과 풀잎이 무성해졌다. 마침 늦봄이라 날씨가 참 좋았다. 공기도 좋았다. 숨을 들이쉬면 풀 내음이 코로 들어왔다. 냄새는 콧구멍을 지나 머리로 갔다가, 혈관을 타고 몸으로 뻗어 나갔다. 정신이 또렷해졌다. 기분이 좋았다. 생각보다 당산은 잘 정비되어 있었다. 유적지로 지정된 공간에는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등산로 근처에는 안내문이 큼지막하게 박혀 있었다. 나와 나리는 멈춰서서 글을 읽었다. 우리나라 고고학상 최초의 발굴이 이루어진 유적인 OO 패총은…. 글이 참 길고 어려웠다. 읽기를 그만두고 더 걷기로 했다. 우리는 산길을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학교를 마치고 친구들이랑 무엇을 하는지, 요즘 제일 좋아하는 불량식품은 어떤 것인지, 곧 다가올 여름에는 무엇을 할 계획인지, 그때 우리는 왜 싸웠는지. 서로 조잘대며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상의 중턱에 도착했다.
중턱에 위치한 평평한 구릉지는 여전히 엉망이었다. 공사 현장에서 볼 수 있는 접근금지 울타리가 쳐져 있었고, 그 안에는 안전모를 쓴 아저씨 몇몇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풀밭이 무성하던 그곳은 흑갈색 토양으로 뒤덮여 있었다. 푸른 빛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땅은 여기저기 사각형 모양으로 파헤쳐져 있었고, 그곳에 원래 있던 흙은 구석에서 조그만 언덕이 되어 있었다. 기분이 안 좋아졌다. 어서 지나가자. 나리가 속삭였다. 우리는 구릉지를 지나쳐 곧바로 정상으로 향했다.
괜찮아? 나리가 물었다. 아마 저기압이 되어버린 내 상태를 눈치챈 것 같았다. 응 괜찮아. 나는 거짓말을 했다. 나리는 입을 다물고 무언가를 생각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정상에 도착하면 괜찮을 거야. 거기는 그대로거든. 응. 내가 대답했다. 살짝 기분이 나아졌다. 누군가 내 기분을 헤아려 준다는 것이 참 기뻤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나리는 왜 나와 같이 당산을 오르려고 했을까? 학교에서부터 궁금해야 했을 질문이 그제야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바로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러기에는 뭔가 부끄러웠다. 내 마음속에서 두 인격이 싸우기 시작했다. 물어보자. 아냐 물어보지 마. 한동안 엎치락뒤치락하더니, 결국 호기심이 부끄러움을 이겨냈다. 한창 나리는 여름 계획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워터파크를 가기로 했다며 즐거워하던 나리에게 나는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걸 숨기지 못했다. 내 반응이 어딘가 고장 났다는 걸 느꼈는지 나리가 이야기하다 멈추고 나에게 물었다. 왜 그래? 내가 우물쭈물했다. 물어는 보고 싶었는데, 막상 입을 떼려니 말이 나오질 않았다. 혼자서 이상한 염소 소리를 내다, 겨우 목을 가다듬고 나는 질문했다.
오늘 왜 같이 당산을 가자고 한 거야? 겨우겨우 내뱉은 말은 산들바람을 타고 나리의 귀로 흘러 들어갔다. 나리의 볼이 살짝 발그레 해졌다. 우리는 맞추고 있던 눈길을 서둘러 거두어들였다. 나리는 습관처럼 땅을 바라보았고, 나는 괜히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잠깐의 정적이 지나고 나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의 눈길은 여전히 땅을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