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 일기

1-3

by 세타필

오락실에는 검은 벨벳 커튼으로 분리된 또 하나의 게임 공간이 있었는데, 어른들에겐 그곳이 매우 인기가 많았다. 이 점을 어떻게 알게 되었냐고? 이른 아침에, 벨벳 커튼 앞 부스에서 주인아저씨가 잠에 취해 계실 때, 친구들과 함께 커튼 너머를 훔쳐보았거든. 아직도 기억난다. 홀딱 벗은 2D 여성의 중요 부분을 가린 블록 뭉치를 없애려 열심히 애쓰던 아저씨, 잔뜩 구겨진 미간을 만지며 파친코 봉을 계속 당기시던 아저씨, 그리고 그들 옆에 놓인, 꽁초가 수북이 쌓인 재떨이.

돌아보면 그곳에서 무언가 느꼈던 것 같다. 무언가 굉장히 거칠고 텁텁한, 날것 그대로의 세상이 주는 무게감을. 그리고 그 현실에서 도망친 사람들의 잔뜩 찌푸려진 얼굴과 그들이 뿜어내는 음습하고 비린내 나는 분위기를. 채 10살도 되지 않았던 나였지만, 8평 남짓한 조그마한, 담배 연기 자욱하게 피어나는 방에서 잠깐 맛보았던 것이다.


금단의 공간에 침입한 대가로 주인아저씨께서는 우리들 머리에 꽤 큰 혹을 만들어 주셨고, 부모님의 안부도 걱정해 주셨다. 다음번엔 너희 부모들한테 찾아갈 거다, 이놈들아! 귓속에서 아저씨의 외침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 이후로 나는 OO 오락실에 될 수 있으면 가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아예 발길을 끊을 수는 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좋아하는 게임인 삼국 전기와 메탈슬러그 3가 그 오락실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건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살금살금 다시 오락실에 숨어들어 가 게임을 하곤 했다. 아저씨께서도 처음에는 나를 보고 눈을 부라리시더니, 얌전히 게임만 하고 돌아가는 걸 몇 번 보신 뒤로는 내 존재를 크게 신경 쓰지 않으셨다.


문제는 사건 이후 어린이들 사이에서 OO 오락실에 관해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는 점이었다. 아이들 모두 장막 너머에서 목격한 것들에 대해 궁금해했고, 나를 포함한 우리 척후병들은 현장 목격자로서 꽤 많은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우리의 목격담은 입으로 입으로 전해졌다. 말이라는 것이 의례 그렇듯 퍼질수록 살이 계속 붙더니, 나중에는 사실 그곳은 조직폭력배들의 집합 장소라든지, 아니면 간첩들의 아지트라는 둥 별별 이상한 소리로 변질하였다. 결국에는 이게 맞다 느니, 저게 맞다 느니, 모두가 오락실을 둘러싼 미스터리에 관해 토론까지 하는 지경이 되었다. 다만 나는 그 주제에 별로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직접 목격했던 사람이었으니까. 나는 그보다는 주인아저씨의 생각이 궁금했다. 아저씨는 어느 순간부터 본인의 영업장에서 꼬마들이 사라진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셨을까? 몇 가지 가설을 세워보자면, 손님들이 줄어든 것에 기분이 좋지 않으셨을 수도 있고, 아니면 신경 쓰이는 꼬마들이 사라져서 속이 시원하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정답은 아저씨께서만 아시겠지.


오락실로 출발하기 전에 슈퍼를 들러 아폴로를 샀다. 내가 먹자고 했다. 아폴로는 다행히 남은 돈으로 살 수 있었다. 나리와 나는 입에 하나씩 조그만 빨대를 물고 ㅁㅁ오락실을 향해 걸었다. 오거리에서 좌회전을 했다. 나리의 집으로 가는 방향이었다. 오락실은 나리의 집에서 조금 더 걸어가야 했다. 도로에 부비트랩처럼 간간이 깔린 개똥과, 골목길을 지나다니기엔 조금 빠른 속도로 운행하는 자동차들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오락실에 도착했다. ㅁㅁ 오락실. 전구가 가득 달린 간판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입간판 속 커다란 우주 로켓은 태양 따위 무시하겠다는 듯 번쩍거리고 있었다. 강렬한 네온 빛이 우리의 얼굴을 주황색으로 물들였다.


들어갈까? 내가 말했다. 하지만 나리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오거리에서처럼 가만히 서서 발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나리에게 다가갔다. 혹시 오락실 한 번도 안 와봤어? 내 물음에 천천히 나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한 번도? 응. 그녀는 작게 대답했다. 오락실을 와본 적이 없다니…. 이건 내 계획에 없었던 부분이었다. 어찌나 당황스러웠던지 괜히 나리에게 화가 났다. 아니, 얘는 오락실도 안 오면 방과 후에 뭘 하고 놀아? 가만 생각해 보니, 나리와 함께 무언가를 한 기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릴 때 숨바꼭질은 같이했던 것 같은데….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고부터였던 것 같다. 동네 여자애들 대부분이 우리와 따로 놀기 시작했다. 자기들끼리 고무줄을 하거나, 놀이터에서 소꿉놀이하거나, 아니면 무리 지어 어딘가를 같이 가거나 했다. 내가 놀라웠던 건, 걔네가 원래는 우리 남자애들과 함께 놀던 아이들이었다는 점이다. 동네 근처 놀이터에 가면 항상 만날 수 있었던 친구들이었는데, 어느 순간 모르는 사람들처럼 달라진 게 신기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나리가 오락실이 처음이라는 점이었다. 이게 왜 그런가 하면, 못하는 사람이랑 같이 게임을 하면 너무너무 재미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내가 처음 대전 게임을 배울 때 받았던 구박들이 떠올랐다.


당시 오락실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던 시리즈는 누가 뭐래도 철권 시리즈였다. 하지만 그 많고 많은 철권 시리즈 중에서도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게임이 있었는데, 바로 철권 태그였다. 시리즈별로 오락기가 하나밖에 없었던 다른 작품들에 비해 태그는 하늘을 찌르는 인기에 힘입어 3쌍이나 되는 오락기를 배정받았다. 오락실 측의 입장에서도 이는 실로 과감한 투자였는데, 태그는 다행히도 그에 화답하는 성과를 보여주었다. 3대의 오락기에서는 동네에서 난다 긴다 하는 철권 고수들이 본인들이 갈고닦은 무용을 뽐냈고, 주위에는 경기를 보고 싶어 하는 구경꾼들로 항상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고수들의 대전에 나 같은 어린아이가 낄 틈은 없었다. 철권 고수로 이름 날리는 사람들은 모두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형들이었고, 나는 자연스레 철권 태그보다는 철권 3을, 철권보다는 킹 오브 파이터즈를 즐겨 하게 되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철권에 비해 킹 오브 파이터즈는 다소 인기가 떨어졌다.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의 차이 정도. 나 같이 메이저리그에 출전할 수 없는 선수들이 가지고 놀던 게임이 킹 오브 파이터즈였다.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한다. 이 게임도 항상 철권과 함께 대전 게임의 대표주자로 취급받는 인기 많은 게임이었다. 다만 우리 동네에서는 철권에 그만 KO 패를 당하고 말았던 것이다.


킹 오브 파이터즈 시리즈 중 가장 인기가 많았던 건 97이었다. 새 시리즈인 99가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지만, 전 작까지 주인공이었던 두 캐릭터를 고를 수 없게 된 것, 그리고 새로운 주인공의 인기가 매우 좋지 못했던 것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인지 신작은 전 작들에 비해 인기가 좋지 못했다. 많은 사람이 97과 98을 즐겨 했다. 특히 97은 특정 커맨드를 입력하면 강력한 캐릭터를 고를 수 있었는데, 이 점 때문에 인기가 매우 많았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인데, 99에서도 커맨드 입력을 통해 전 작의 주인공들을 고르는 방법이 있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당시 우리 동네에는 아직 그 방법을 아는 사람이 없었고, 99는 한동안 사용자들에게 외면받았다.


덕분에 나는 99를 충분히 즐길 수 있었다. 좋아했던 캐릭터인 주인공 두 명은 고를 수 없었지만, 언제나 비어있는 자리 덕분에 다른 캐릭터들을 충분히 연습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컴퓨터를 상대로 당황하지 않고 기술을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정도면 다른 사람들이랑 붙어도 해볼 만하겠는걸? 혼자 우쭐해진 나는 우리 중 게임 고수로 평가받는 A에게 대결을 신청했다. A는 나를 오락실로 인도한 친구였다. 거의 오락실에서 살다시피 하던 녀석은 게임이라면 무엇이든 잘했다. 하지만 그런 것쯤 나에게는 별로 상관없었다. 나도 이제 실력이 일취월장했으니까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벽은 높았다. 그날 나는 다른 차원의 벽을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고작 커맨드를 입력해서 기술을 사용하는 게 다였다면, A는 기술을 연계해서 콤보 공격을 가능하게 했다. 콤보 공격이 성공하면 내 캐릭터는 아무것도 못 한 채로 A의 캐릭터에게 두들겨 맞을 수밖에 없었다. 내 야심 찬 도전은 0:3이라는 처참한 점수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A는 싱거운 대결이었다고 말했다. 반박할 수 없었던 나는 시무룩 해졌다. 화는 나지 않았다. 승리에 대한 일말의 희망도 볼 수 없었던 경기였기 때문이다. A는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더니, 콤보 공격을 이것저것 알려주겠다고 했다. 나는 거절했다. 이미 게임에 대한 흥미가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처참하게 패배하는 경험은 사람의 의지를 꺾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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